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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는 존재가치가 없네, 명창 오정숙
  • 2012-11-20 23:19
  • 조회 4802

본문 내용

 
 







소리 없이는 존재가치가 없네, 명창 오정숙

 


글. 양옥경

 

 

  

 

 

천생(天生)소녀 같은 결 고운 품성, 흐트러짐 없는 몸가짐, 넘치지 않는 유쾌함, 오정숙 명창을 만나러 가는 차 안, 미리 다운로딩 해둔 명인의 춘향가 음원을 올렸다. 예의 그 대목, 이도령이 방자를 꾸짖고 으르다가 또 지레 사정조로 바뀌는 것이 재미진 ‘해 좀 보아라’ 대목이다. 같은 대목을 ‘이도령, 춘향 만나러 가는 대목’ 이란 이름에 포함시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의 이름으로 ‘해 좀 보아라’가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이 다섯 음절에 이도령의 애간장 녹는 심정이 함축적으로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춘향이 추천하는 모습을 보고 반하여, 살며시 밀당까지 나누고 돌아와, 해가 지면 님을 찾아가려 마음먹은 방년 16세의 도령. 사랑에 빠진 이도령을 은근히 놀리는 방자의 해학 넘치는 대답까지 포복절도(抱腹絶倒)는 아니지만 즐거운 웃음이 배어나오는 이 대목을 오정숙 명창만큼 잘 부를 이는 없다고 본다.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를 제대로 구사하는 명인이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온갖 풍파 다 겪은 중년 넘은 월매 역은 또 왜 그리 맛깔나게 구성하는가? 그 뿐이랴. 진득한 사랑에 빠진 이도령, 본 일 없지만 순진무구한 계집아이 향단, 정숙과 애교의 양면을 다 가진 절세가인(絶世佳人)춘향, 그들을 관조하며 관객들에게 풀어 설명하는 도창 역까지......오정숙 명창이 펼치는 <춘향가>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통하여 밝고 유쾌하며 속깊은 인물로 환생한다. 심지어 심술궂은 변사또도 익살스럽고 엉뚱하고 귀엽다 못해 가엽기까지 하다. 생생한 입체력을 자랑하며, 명료한 전달력을 가진 소리, 이것이 오정숙 명창의 견줄 데 없는 비기(秘技)이며, 그 중에서도 <춘향가>는 오정숙 명창의 특장이다.

 

 

 

 

 

소녀명창의 반짝거림은 노(老) 명창에 이르러 삼경(三庚)의 은하수(銀河水)를 이뤘다

 

오정숙 명창은 1935년 전주가 출생지인 소리꾼 오삼룡의 슬하에 태어났다. 14세가 되던 해부터 그의 스승인 동초, 김연수가 조직한 <우리국악단>에서 활약하다 21세때부터는 창극 활동을 그만두고 판소리 학습과 공연에 주력했다 한다. 23세 때에 상경하여 김소희 명창에게도 잠시 수학하는 시기가 있었다. 1962년에 본격적으로 김연수 명창에게 입문하여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를 공부하였다. 1977년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수많은 주요무대에 도창(導唱)1)과 주연을 맡아 활약하였다.

한편, 오정숙 명창은 ‘기록 생산자’란 별칭을 얻을 정도로 숱한 신기(新記)들을 선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1975년에 복원되어 처음으로 열린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에서 강도근, 홍정택, 임준옥 등의 남성 명창들과 경합을 벌여 장원상을 수상하였다. 이어 1983년 남도문화제 제1회 판소리 명창부대회에서도 장원을 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부러울 것 없는 수상력도 갖추었다. 1982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기예능보유자 후보로 인정된 이후, 국립창극단 지도교수 및 서울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의 출강을 모두 중단하고, 향리(鄕里)인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315번지에 스승인 동초 김연수 선생님의 아호를 따서 '동초각'을 지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에서 동초제 판소리 전승과 후진 양성에 몰두하였다.

 

1)

1. 국악에서, 선창하거나 함께 부르면서 노래를 바르게 이끌어 가는 사람.

2. 창극(唱劇)에서, 연기자가 아닌 제삼자가 무대 뒤나 옆에서 극의 전개를 창으로 해설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

 

 

 

 

 

 

동초(東初)와 운초(雲超)

 

오 명창이 본격적으로 세간에서 칭송받게 된 것은 1972년을 시작으로 내리 5년 동안 판소리 다섯 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부르는 완창 무대를 갖기 시작한 이후부터다. 1년에 한 바탕 부르는 무대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는 판소리에 대한 일정의 지식이 필요하다. 

판소리 전승 5가에서 비교적 짧은 바탕소리인 <적벽가>와 <수궁가>도 두 시간을 훌쩍 넘는 분량의 공연물이다. 최장(最長)의 공연물은 역시 <춘향가>로, 특히 동초제 <춘향가>는 다른 유파의 소리보다도 훨씬 분량이 많은 텍스트를 자랑한다. 평소 사설과 소리의 이면성을 중시하던 동초의 지향(志向)이 공연텍스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특정 음악세계가 구현되어 예술적 경지를 이루었다고 생각될 때 붙여지는 ‘바디’라는 범주에서, 전승 5가가 빠짐없이 정리-완성-공연-전승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이다. 그런 면에서 동초제는 단연 굴지의 세계를 구축하였음은 틀림없다. 이 동초제 <춘향가>를 오정숙 명창이 장장 8시간 30분에 거쳐 완주한 완창무대는 아직도 예술 내외계에서 두루 회자되고 있다.

동초제 판소리 5가를 정리하고 음악적 완성을 이룬 업적은 분명 김연수의 것이지만, 동초 한사람의 예술세계에 그치지 않고 골간을 이어 준 오정숙 명창이 있었기에 오늘날 ‘동초제’라는 한 판소리 유파의 지칭 명사가 성립될 수 있었다는 점은 반드시 상기해야 되는 대목이다. 오정숙 명창이 부른 동초제 판소리 5가 사설은 최동현(판소리연구가, 군산대교수)이 주해를 달아 『동초 김연수 바디 오정숙 창 오가전집(민속원, 2001)을 펴낸 바 있다.

 

 

 

 

 

 

 

음악세계: 속울음으로 펼친 재담

 

오정숙 명창은 사실 바라만 봐도 사람을 참 기분 좋게 만드는 독특한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늘 웃음이 떠나지 않았고, 말씨는 온화하여 규중(閨中)의 아씨처럼 고운 말 맵시를 가진 사람으로 기억된다. 이런 평상시의 모습은 무대 위의 모습만 본 사람들로서는 선뜻 떠올리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신문 기사나 공연소식 등에서 무대 위의 오정숙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워딩(wording)들을 뽑으면 ‘정확한 발음’ , ‘능숙한/맛깔나는 연기’ , ‘탁월한 이면 해석’ , ‘단숨에 사로잡는 카리스마’ , ‘대단한 소리꾼’ 등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을 볼 수 있다. 소개 글을 쓰는 필자도,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아마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몇몇 지면에서 그녀가 남긴 메시지들을 살펴보면서 숨겨진 그녀의 내면을 직면하게 되었고, 그것은 때때로 육중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소리는 천부적 재질이 하나면, 나머지 아홉은 노력으로 이뤄지는 겁니다. 연마요, 단련이죠. 죽을 때까지 해도 그 깊은 세계에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합니다. 완성이란 있을 수 없죠.”

<1991년 동아일보 기획기사 “새문화재 순례, 판소리 인간문화재 오정숙씨” 기사에 실린 대담내용>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것,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구분지어 주는 것이 우리의 문화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리를 하면서 독공과정에서 피를 몇 동이를 쏟았다느니 하는 얘기들은 판소리 명창이 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해 볼 필요를 느낍니다. 이같이 어려운 훈련을 겪어야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판소리인만큼 오히려 걸작 선정이 늦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2001년 동초제판소리전수관 동초각에서 유네스코(세계인류무형유산) 판소리가 등재 소감 일부>

 

 

위 두 편의 기사 중 위의 것은 1991년 한 신문사의 기획 인터뷰 내용이며, 아래 기사는 2001년 동초제판소리전수관인 '동초각'에서 유네스코(세계인류무형유산)에 판소리가 등재된 기쁨을 밝힌 소감의 일부이다. 이 기록들에 실린 오정숙 명창의 이야기는 판소리에 대한 그녀의 철학과 시선은 물론, 그녀의 삶에 있어서 판소리의 존재감과 의미에 대한 자기 고백적 느낌이 함축되어 있다.

오정숙 명창은 일찍이 소녀 명창으로 남다른 주목을 받았었다. 여성 아이돌이 섹시 아이콘으로 시대에 어필하는 요즘 사회에서, 1900년대 중반의 엄숙하고, 이념적이고, 가부장적인 관념이 사회의 중추적 문화를 지배하는 시대에, 얼굴과 몸매가 아닌 전문성으로 승부한, 당찬 판소리계의 아이돌이었다. 반복해서 말하건대, 명인은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약 5년에 거쳐 판소리 다섯 바탕을 전부 완창하고, 음반으로도 취입하였던 사람이다. 그래도 “저거 언제나 제대로 되나” 라며 자신의 소리에 냉혹한 평을 내렸다는 한 지인의 회고담에서는 그저 숙연해질 따름이다.

 

 

2008년 7월 7일, 심근경색으로 타계하기 전까지도 하루를 거름없이 소리에 매진했던 그 사람.

“왜 이리 소리하는 사람은 감기가 잘 들리는지 몰라” 하며 송순섭, 안숙선 등의 명창들과 정담과 귀여운 투정을 내놓으시던 운초, 오정숙 명창. 그녀와 동시대에 살며 그녀의 무대를 볼 수 있었던 것, 그녀와의 인연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녀를 생생히 기억할 수 있게 된 것. 이것이 이후에 올 후세의 그대들에게 남기는 내 유일한 자랑 중의 하나이다.

 

“스승은 아마 전생에 제 부모였을거예요!”

 

생전에 오정숙 명창이 가장 기억에 남아했던 공연은 1974년 <수궁가> 완창 무대이다. 그 무대를 앞두고 바로 그 전날까지도 그녀에게 스승이자 아버지 같았던 김연수는 병석에 누워서 완창 무대를 앞둔 제자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그 날 새벽, 몇 시간 전까지도 자라가 토끼를 꾀어 엄포를 놓는 장면을 지도하던 동초는 세상을 하직하였다. 스승과 제자의 주변인들은 스승의 죽음을 그녀의 완창 무대가 막을 내리고서야 알렸다고 한다. 그녀가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스승은 아마 제 전생의 부모였을 거예요”라고 한 말은 이 일화를 듣고 더욱 큰 울림이 되었다.

 

 

동초선생이 타계(他界하루 전날에 공연을 앞둔 오명창을 지도했던 모습을 직접 목도한 한 사람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동초는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자세로, 장장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오 명창의 소리를 들으며 지도하였는데, <수궁가>의 한 대목에서 토끼가 소리에 놀라는 대목을 지필묵(紙筆墨)으로 ‘우르르르쾅 할 때 넘어지라’고 써서 지도하고, 오 명창은 그걸 읽고 세 번 정도 반복해서 스승에게 보여 주었다고 한다.

 

스승이 생존해 계실 때 미처 다 익히지 못한 <적벽가>를 녹음된 테이프으로 익혀 동초제 판소리 5가 완창 발표의 매듭을 완결 지은 그 뚝심은 단지 예술가의 집념만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스승에 대한 그녀의 존경과 사랑이 더 큰 동인(動因)이 되었으리라 슬며시 짐작하고, 깊이 감화되어 본다.

 

또 스승을 꼭 닮은 그 점은, 제자에 대한 절대적이고 타협 없는 헌신이다. 이일주, 조소녀, 민소완, 은희진 등 이미 원로 명창이 된 이들 외에도 그 아래 수 많은 제자들을 한결 같이 자식처럼 품었던 그녀이다. 판소리가 세계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어 온 나라가 흥에 겨워할 때, 오 명창은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큰 경사는 없습니다. 걸작 선정을 계기로 정부 차원에서 후손들과 제자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경사로운 일이 자신이 아닌 자식처럼 아끼는 판소리 후학들과 제자들에게 좋은 일로 이어지길 바라는 맘, 일상 속에서 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면 쉽게 꺼낼 수 없는 그녀의 진정이었을 것이다.

 

 

“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가치가 없다!”

 

명고수, 고(故) 김동준은 혼인은 했으나 혈육 한 점 없는 오 명창에게 평소 “자네는 소리를 부모 삼고 형제 애인 친구 자식삼아 살어야 하네” 라고 말하곤 했다 한다. 정말 꼭 그 말처럼 살다 간 운초. 홀로 있을 때는 <춘향가>의 ‘동헌경사’ 대목을 즐겨 불렀다는 운초, 오정숙! 오늘처럼 마알간 가을 하늘 그 구름 위 어딘가에서 예의 그 또랑하고, 재미지고, 구성 낀 소리로 부르며 이 가을날을 즐기시고 있으려나?

 

 

 

 

 

 

참고: 운초의 스승, 동초 김연수


동초 김연수는 1907년 전남 고흥군 금산면 대흥리에서 태어나, 14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서울로 옮겨 '중동중학'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1935년 순천에 체류 중인 당대의 명창 유성준 문하에서 <수중가>를 배운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 7월 서울에 올라와 <조선성악연구회>에 입회, 송만갑을 스승으로 모시고 <흥부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1936년에는 정정렬 문하에서 <적벽가>와 <춘향가>를 전수하였다. 1937년 <조선성악연구회> 이사가 되었고, 이 기관의 전속단체인 <조선창극좌> 대표가 되었다. 이 해에 일본 음반사인 <빅타>사의 전속가수가 되어, 판소리 5가의 더늠2) 대목을 추려 유성기 음반 30장을 출간했다. 1940년엔 <오케O.K>사의 전속가수로 <심청가> 전판과 <장끼타령> 한 질을 출간하여 판소리 명창으로서 입지를 한 것이 그의 출세작이다.

한편, 동초는 1945년 <김연수창극단>, 1950년엔 <우리 국악단> 등의 소규모 악단을 꾸려, 그가 품었던 창극 중흥을 위한 이론 정립과 실천을 부지런히 전개시켜 갔다. 1957년에는 대한국악원장, 1958년에는 ITI 한국본부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동초가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고, 책으로 묶은 판소리 5바탕은 동리, 신재효에 버금가는 업적이다. 특히 그의 사설집에는 각 사설마다 장단, 발성, 표현 기법 등이 부가되어 있어 기록 텍스트로서의 가치 이상의 기록물, 즉 실제 공연 상황을 선경험하고 이미지화 할 수 있는 공연 문서로써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

 

 2) 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다듬어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

 

 

 

 

 

오정숙 (1935 ~ 2008)

 

1935년 경남 진주시 출생

1950년~1963년 김연수 선생님에게 판소리 5마당 사사

1972년~1976년 판소리 전승 5가 전 바탕 완창 공연

1975년 제1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부 장원

1977년 <국립창극단> 입단

1982년 중요문화재 제5호 판소리 동초제 <춘향가> 준 보유자 지정

1983년 제1회 남도 문화재 판소리 명창부 장원(대통령상)

1984년 KBS 국악대상 수상

1985년~1999년 추계예술대, 한양대, 이화여대, 서울대, 중앙대, 한국종합예술대 강사

1986년 제4회 국제 평화 음악제 참가 (춘향전)

1989년 세계 민속음악 페스티발 참가 구라파 순회공연

1990년 평양 개최 범민족 통일음악회 참가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보유자 지정

1992년 한국예술문화 부문 공로상 수상

1993년 국립창극단 지도위원

2008년 <동초제판소리보존회> 이사장 재임 및 판소리 연구소 <동초각> 운영

2008년 7월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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