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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영원한 글쓰기 노동자, 극작가 박동화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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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글쓰기 노동자, 극작가 박동화
  • 2015-04-14 07:39
  • 조회 5514

본문 내용


 

 

 

 

 

 

 

 





영원한 글쓰기 노동자, 극작가 박동화

 

 

 

글. 최기우 (극작가·전주대학교 겸임교수)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박동화(1911-1978)는 전북 현대 연극의 개척자로 불린다. 전남 영암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극예술연구회·실험무대·조선연극협회·중앙무대 등에서 활동했으며, 일제에 저항했던 이력으로 1942년 옥고를 치렀다. 1959년 국립극장 희곡공모에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당선돼 본격적인 극작가의 길을 걸었으며, 1961년 전주에서 극단 창작극회를 창단한 이후 20여 년 동안 40여 편의 작품을 창작·연출했다. 목포호남평론·군산민보·전북대신문사 등에 근무하며 시·소설·수필·평론·희곡 등 다양한 글을 썼다. 전북예총회장과 전북연극협회장 등을 역임했다. 유고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와 "창문을 닫아라" 등이 있다.

 

국립극장 현상공모 당선작품인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전주극장과 이리삼남극장 무대에 오른 1961년 전라북도 현대 연극사의 막이 열렸다. 

 

 

지구가 돌고 태양이 솟아오르고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어서 우리 인간이 호흡하고 살고 있는 동안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 몸둥아리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상장(喪章)을 둘러 마지막의 내 호흡이 끊어진다면 나와 동일한 다른 운명의 소유자가 나의 독백을 이어받아 나의 독백은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독백, 인간의 독백은, 지구의 운명이 마지막 될 때 역시 지구의 운명과 같이 할 것이다.


박동화의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중에서

 

 

희곡작가이자 연극연출가인 박동화(본명: 박덕상·朴德相·1911-1978)는 개척자·선구자·산파·아버지 등의 수식어가 붙을 만큼 전라북도 현대연극사에서 가장 크고 명확한 족적을 남겼다. 그를 만난 적도 없고 그의 작품을 본 적도 없는 지금의 후배 연극인에게도 그는 여전히 이어 받아야할 정신과 뛰어 넘어야할 벽이라는 두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연극사에서 그의 이름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서울로 진출해 명예와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 전라북도의 가치를 발견하며 거짓과 욕심 없는 연극인이자 건강한 글쓰기노동자의 삶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주에 정착한 후 극예술이 지닌 중요성을 재인식한 후, 꾸준히 연극을 해왔네. 정말 꾸준한 노력이었지. 영예도 금욕도 바라지 않는 그저 꾸준한 노력이었지. 환갑을 눈앞에 바라보는 늙은 내가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밤이 늦도록 연습을 하고 나면 입에서는 쓴 냄새가 나고 발은 휘청휘청 힘이 빠지는 판일세. 재주가 없기로 이름 난 나라고는 하지만 연극에 쏟은 정열과 노력을 다른 면에 쏟았다면 지금의 가난은 면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나는 후회를 하지 않네. 앞으로도 내 건강이 허용하는 한 내 고장 극예술을 위하여 꾸준히 활동을 계속할 것일세. 우리 전북 연극인들은 앞으로도 좀 더 좋은 무대를 갖기에 노력할 것이며, 또한 우리 전북대학교 연극부 학생들도 이 지방 연극을 위해서 보다 적극 역할하여 주리라고 믿어질 때 나는 거기에서 보람을 느끼고 대견스럽게 자랑도 하고 싶네.


박동화의 수필 「공사장 공연」(전북대신문 1971년 12월 31일자) 중에서

 

 

모국어의 향기조차 맡기 어려웠던 일제강점기. 박동화의 삶과 작품 세계는 애잔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감상적 형용을 감히 어리댈 수 없다. ‘자존심이 강하여야 할 청춘의 향기로운 시절’에 그는 ‘세상을 멸시하는 불행한 청년’이 되었다. 대다수 예술인들이 온통 자존심을 팔던 그 무렵에도 ‘비애와 절망, 고통과 번민, 증오와 악심, 저주 이 따위 것들이 한 덩이가 되어 내 몸을 습격’하고, ‘조매(嘲罵)와 냉소와 빈곤으로서 나를 맞아주든 서울’로 가슴은 멍들고 희망과 욕망은 시들며 불안과 체념만이 움트고 자라났으리. 그는 결국 스스로 외로워졌다. 가난하고 서글프지만 용기 있는 이 결단은 이름도 흔적도 찾기 어려운 어느 ‘글쓰기노동자’의 도도한 투쟁이다.

1959년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로 다시 펜을 쥔 박동화는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그들을 작품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려 노력했다. 작가의 양심을 세우고 지키며 사는 것, 글쓰기를 삶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바로 이러할 것이다. 박동화는 전라북도 현대연극의 본 막을 펼치고 이어나간 가장 중요한 역사이며, 자존심이다.

 

 

 

 

 

시인을 꿈꾸다


박동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신파극이 공연되던 해인 1911년 4월 21일 전라남도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에서 농부인 아버지 박인태와 어머니 엄 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그 위로 1남 1녀를 둔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나던 해에 병으로 죽었고, 그는 계모 슬하에서 자랐다. 계모는 전처의 아이들을 몹시 냉대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그 속에서 싹튼 누이와의 정은 더 각별한 것이어서 누이를 엄마처럼 따랐고, 누이가 시집가던 날은 아예 가마 끝에 매달려 울부짖을 정도였다. 그에게 누이는 어린 시절 유일한 정신적인 위안처였기 때문이다. 박동화가 정에 약하면서도 강직하고 고집스러운 면을 보인 것은 외롭고 정에 주린 그의 어린 시절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 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낙엽」, 「상쇠」, 「孔社長」 등에서 젊은 후처가 등장하는 설정도 그런 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10살에 목포로 이사한 박동화는 1926년 목포영흥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목포상업학교 시위운동사건)에 가담한 이유로 1928년 퇴학당했고, 무작정 상경했다. 그는 1931년 지금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해 3학년까지 다니다가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고학생, 청년 박동화. 그는 늘 이렇게 중얼거리며 다녔을 것이다.

 

 

나는 노여워한다. 제일 사랑하는 문예사전 제1권을 전당(典當)하야 주린 창자를 채웠다는 것과 창작의 주제와 시상이 쏟아져 나와도 한 방울의 기름과 한 개의 초가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하고 한탄만 내쉰다는 것과 찢어지고 때가 묻은 양복저고리에 내야의 은택을 입어 볼기짝이 나오지 않는 양복바지를 입고 일본으로 간다는 것. 달게 여겨지지 않는 비애와 절망, 고통과 번민, 증오와 악심, 저주 이따위 것들이 한 덩이가 되어 내 몸을 습격한다. 자존심이 강하여야 할 청춘의 향기로운 시절에 세상을 멸시하는 이 불행한 청년. 아, 어느 때나 이놈의 현실을 잘 조화시켜볼꼬. 그러나 제일 큰 노여움은 시상(詩想)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동화의 수필 「어느 하루날」(호남평론 제3권 7호) 중 일부를 재구성함.

 

 

박동화는 시인 지망생이었다. 1930년대 초·중반 서정주·함형수·오장환 등과 교류하며 시를 썼던 시인부락 동인이었다. 하지만 한 신문에서 ‘시 못 쓰는 시인’ 이라는 평을 받고 좌절하고 만다.

 

 

류리창밖 아까시야나무엔

잃은 아츰마다 참새는 와서 재주거리것만

기두리는 발자최는 이미 옛 기억뿐……

언제나 내 가슴만 울렁거려

꺼지려는 마음의 등불 도구어주네

그대여 알고나있는가

호젓한 방 한구석에 옷똑이 홀로 앉어

느진봄 갈내에 귀 기우리는 이 마음을……


박동화의 시 「알고나있는가」(신문예 제1권 3호년 p10) 부분

 

 

 

 

 

 

연극을 만나다


그러나 그는 이미 1931년부터 서항석·이광래 등 많은 연극인들과 교류하며 연극무대를 경험했고, <극예술연구회>·<실험무대> 등과 인연을 맺으며 신극운동에 동참했다. 이 시기 연극배우로 1980년대까지 활동했던 고설봉(1913-2001)은 이 무렵의 박동화를 ‘연극 친구들과 같이 다니며 희곡작품을 쓰던 인텔리’로 기억했다.

 

 

“내가 박 형을 처음 뵌 건 일제시대 한창 신극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던 젊은 연극인 속에서였다. 그 때 당시 박 형은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연극 친구들이 좋아 연극 친구들과 같이 다니며 희곡작품을 쓰던 때였는데 언젠가 내가 인테리가 왜 하필 연극을 시작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내 연극 시작은 연극하는 친구가 사준 설렁탕 한 그릇 때문이요. 그 친구의 따뜻한 인정에 반하여 그들과 같이 생활하다보니 이렇게 연극을 사랑해버린 거요’ 라고 대답했다.”


「전북연극」창간호, 1986.3, 한국연극협회 전북지회

 

 

그 당시 연극계는 극장 부족, 제작 부실, 창작극 부족, 배우 부족 등 내적 어려움에 일제의 검열 강화라는 외부 압력의 진통으로 지지부진한 상태였다가 1931년 7월 동경유학생 출신인 서항석 등 해외유학파가 중심이 돼 본격적인 신극 단체인 <극예술연구회>를 구성해 심기일전하던 때였다. <극예술연구회>는 1932년 직속극단인 <실험무대>를 두고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기 위해 노력하면서 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6년 봄, 박동화는 본격적인 연극수업을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그는 <동경학생예술좌>와 인연을 맺고 극작과 연출 실무경력을 쌓는다. 자연스럽게 신극운동에 빠져들었던 그는 문학을 선호했기에 연기보다 희곡 공부를 시작했다. 곧 귀국한 그는 <조선연극협회>에 가입한다. 그리고 10월 24일과 25일 부민관 무대에 오른 모리엘 작 「수전노」에 처녀 출연한다. 출연 동기를 오장환 시인의 권유 때문이라고 했다.

 

 

그 무렵 오장환이 난데없이 나를 보고 연극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 이유인 즉, 자네는 희곡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당면한 식생활을 다소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극을 하게 되면 설렁탕을 하루 두 끼씩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중략) 나는 장환의 말에 쾌히 승낙을 하고 와룡동에 있는 극단 조선연극협회를 찾아갔었다.


박동화의 수필 「연극과 설렁탕」(전북대신문 1971년 10월 8일자) 중에서

 

 

“당시는 말이야. 내 체구나 얼굴로 배우 노릇은 할 수 없었지. 아무리 연기를 잘 해도 주역은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지. 난 무대에 서니까 너무 초라했어. 그래서 희곡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지. ……. 내 젊은 시절 꽤 많은 작품을 썼지. 그런데 말이야. 일본 놈들 때문에 남질 않았어. 일기도 썼는데, 모두 그 놈들이 압수해서 불 질렀거든. 그땐 그 녀석들이 금기시하는 삐딱한 작품도 썼지만 말이야.”


김정수의 논문 「박동화 연구」에 실린 내용(1960·70년대 문치상 등과의 이야기)을 재구성함.

 

 

이화삼·박학·이백·윤북양·강양양·유랑 등과 함께 「수전노」 무대에 오른 그는 라푸레슈 역으로 출연했으며, 본명인 박덕상 대신 ‘박동화’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다.

창립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조선연극협회는 1936년 11월 18일 와룡정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부서를 변경했다. 박동화의 이름은 문예부와 연기부 두 곳에 적혀 있다.

 

 

이광래 : 오늘 조선연극협회의 간부와 부서를 변경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서는 문예부와 연출부, 연기부, 미술부, 기획부로 하겠습니다. (둘러보면) 박동화 군은 오지 않았나?

이화삼 : 늦는 모양입니다.

이백희 : 왜 박동화씨는 두 곳에 포함돼 있죠?

오정구 : 박 군은 참신한 배우라기보다 글을 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저는 문예부에 추천했습니다. 연기부는 (이광래 가리키며) 저기,

이광래 : 자자, 중복 추천된 회원이 박 군 하납니까?

한순자 : 박동화 씨는 어느 부서를 원했나요?

이광래 : (머뭇거리며) 전 박 군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습니다. 잘 따를 거라 생각합니다.

오정구 : 그나저나 박동화 군은 왜 오지 않는 거지?

한순자 : 동화씨는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아요.

이화삼 : (이광래에게 작은 소리로) 아무래도 목포로 내려간 것이 아닐까요?


최기우의 희곡 「가인 박동화」 중에서

 

 

1937년 박동화는 목포로 내려가 전국 유일의 한글잡지인 『호남평론』을 내던 잡지사에서 근무했다.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부모의 간절한 뜻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미 1936년과 1937년 『호남평론』에 소설 「동냥개」와 희곡 「수해 후」 등 시·소설·희곡·수필·평론 등을 발표하곤 했는데, 1937년 첫 희곡 「수해 후」를 발표하면서 소설이나 수필을 발표할 때와 달리 박동화란 이름을 사용했다.

 

 

 

 

 

 

호남평론과 ‘애국지사’ 박동화


 

저것보세요. 참 아름답지요? 정말 우리도 저 새와 같이 자유스럽게 날아다닐 수 있다면…….


∥박동화의 수필 「추억·신록·그 女人」(호남평론 제3권 제5호 52쪽) 중에서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미비해 ‘박동화는 독립운동가이며, 애국지사다.’라고 공식 선언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게 그런 수식어를 붙인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1928년 광주학생의거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퇴학당했던 일과 1942년 ‘불량선인’이라 칭해지며 희곡과 일기 등을 압수당하고 수감생활을 했던 일이 그렇다. 또한 신의주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1940년대 중반 근근이 언론에 노출됐던 "신의주와 간도를 들락날락하며 독립군과 술을 마셨다."는 동명의 혹은 그로 여겨지는 박동화가 그러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매월 정기적으로 조선총독부 검열에 시달리던 『호남평론』에 근무했던 이력이다. 그 위험천만한 잡지에서 독립운동가인 김상수(1894-1945), 배치문(1890-1942), 설준석(1900-?) 등과 생활하며 그는 매호 쉼 없이 글을 발표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의 독립운동사는 눈부시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1942년 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돼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이유 역시 그때의 이력이 발단이었다. 당시 함께 끌려가 옥사한 배치문과 병보석으로 나온 뒤 투병생활을 하다 해방 전 생을 마감한 김상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설준석 모두 청년수양학교와 야학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면서 청년운동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들이다.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성격의 박동화였기에 어쩌면 우리는 또 한사람의 독립운동가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예명 ‘박동화’와 ‘박동’, ‘DK생’의 탄생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예술인들도 예명이 많았다. 『호남평론』만 봐도 그렇다. 이 잡지는 "어떠한 경우를 불문하고 지상익명은 가하다."며, 아예 익명으로 글을 쓰라고 공고를 한 탓인지 유달리 익명의 글이 많다. 일제 검열의 피해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호남평론』에 실린 필명들은 ‘남촌’, ‘이석’, ‘윤영’, ‘무장공자’, ‘비청춘생’, ‘세탄부’, ‘MMM生’, ‘MMMM’, ‘김가고파’, ‘배고파’, ‘야인’, ‘일기자’ 등등 PC통신과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아이디로 불리는 필명을 쓰는 우리네와 비슷하다. 그래서 대부분 누가 쓴 글인지 파악하기 힘들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필명 중 하나는 김철진의 ‘철진생’과 배치문의 ‘김가고파’ 등이다. 박동화의 필명으로 짐작되는 것 중 하나는 ‘DK생’이다. 소설을 연재하면서 박덕상이란 이름과 ‘DK생’을 함께 썼던 흔적 때문이다.

필명을 사용한 것은 연극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박한구는 ‘박학’ 또는 ‘동영부(東英夫)’라 했으며, 오정민은 ‘오철영’, 박민천은 ‘박태흠’, 윤북양은 ‘윤해덕’, 장주원은 ‘장숙녀’ 등의 예명으로 활동했다. ‘박동화’는 박덕상의 예명이다. 그가 왜 박동화란 예명을 사용했는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당시 배우들도 예명에 특별한 의미를 언급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특이한 것은 연극무대에 서거나 희곡을 발표할 때만 박동화란 예명을 썼다는 것이다.

1941년 3월 <청춘좌> 소속이던 배우 강노석의 글에서는 ‘박동’이란 예명을 썼던 박동화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목포라는 지역과 이화삼과의 인연을 고려할 때, ‘박동’이란 사람 역시 연극인 박동화의 또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여기는 목포다. 언제나 와 봐도 실치 않고, 올 적마닥 깊은 인상을 주는 데는 이 목포다. 잠이 채 깨기 전에 뜻허지 않는 동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바루 이화삼군과 박동군이다. 우리들은 장소를 백궁다방으로 정하고 오후 2시경에 만났다. 오래간만에 뜻허지 않은 장소에서 동무를 만나게 되여 지나간 이약이를 하면서 단시간을 그대로 보냈다. 본래 이군과 박군의 고향이 목포이면서도 객지생활만 하는 그들을 목포에서 만나게 된 것을 참 우연에 가까운 일이다. 다방에서 간단한 말로 끗치고 연극을 끗친 담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여젓다. 연극을 맟인 담에 한일송군과 같이 만나 주석을 베푸럿다. 이군에 말이 좀 더 엑소틱한 곳으로 가자고 해서 목포에서 유명한 강경옥으로 갔다. 여기서 오고 가는 말이 매우 유익하고 우리에 압날에 업지 못할 논설이였다. 이군이 금후로는 연극행동에 있어서 우리를 매우 정신적으로 후원하며 실천에 있어서도 조력하겠다고 했으며 금후 우리 청춘좌에 연극행동에 있어서 일송군이 역설한 후 이 자리를 유쾌한 그대로 끗치고 말었다.


강노석의 글 「배우수기, 조선대표극단 종합판」(『삼천리』 제13권 제3호) 중에서. 원문을 그대로 수록함.

 

 

 

 

 

 

국민연극시대, 연극을 놓다


‘국민연극의 시대’라던 1940년대를 ‘연극의 암흑기’라고 다시 부르는 것은 일제의 철저한 통제와 어용화로 희곡 창작과 연극 공연의 자유가 상실됐기 때문이다. 유치진·함세덕 등 극작가를 비롯해 대부분의 연극인들은 친일연극을 했고, 일본어 연극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공식적으로 공연이 취소되거나 무대극으로 인해 투옥된 사례가 없는 것을 보면 조선의 공연예술가들이 얼마나 친일에 적극적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모국어도, 생존권도 빼앗겨 버렸던 그 길고 어두운 밤, 변절자와 비겁자와 위선자들이 자기 얼굴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그 암흑에 몸을 묻었을 때 박동화는 당당하게 역사에 저항했다.

1938년 목포를 떠나 다시 서울로 온 박동화는 <중앙무대>와 <협동예술좌> 등을 통해 연극무대를 이어나갔다. 동아일보 1938년 6월 20일자에는 <중앙무대>의 연기부 남자반 단원으로 소개되었고, 1939년 2월에는 연극 <이상향>에 배우로 출연, 동아일보 주최 제2회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했다. 『삼천리』 제12권 제5호(1940년 5월 1일) <조선 주요 연극 단체와 배우 인명> 기사에도 박동화가 소개되었으며, 동아일보 1940년 2월 4일자에는 협동예술좌의 작가이자 배우로 그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는 자신의 희곡 「황금광상곡」을 무대에 올리며, 인천·춘천·개성 등에서 순회 공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42년 봄, 박동화는 사상극을 썼다는 이유로 좌익으로 몰리고,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했던 과거와 『호남평론』에 글을 쓴 이력 때문에 일본경찰에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일기와 문예 작품들은 일본 경찰에 압수당했고, 혹독한 고문과 연극 활동 탄압은 그에게 일제에 대한 치가 떨리는 증오심을 갖게 했다. 더불어 친일세력에게 증오의 눈길을 버리지 않고 살 수 밖에 없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감정의 한 모습은 그의 노년기 일기에서도 찾아진다.

 

 

내 분노가 살아있는 이상 아직도 나는 살아있다. 나는 너희들을 증오한다. 너희들을 저주한다. 오늘 이 시각 몸이 아파 쓰러질 듯 하면서 걸어서 집에 왔다. 고급 택시, 자가용들이 내 옆을 지날 때, 내 심정은? 너희들 중에는 내가 형무소 생활을 할 때, 왜경들에게 고문을 당할 때, 일인들의 충복이 되어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너희들이 사장이 되고 대학 총장이 되어 고급차를 타고 병든 내 옆을 지나가다니…….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니 나는 증오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다.


박동화의 일기(1974년 2월 28일) 중에서

 

 

수감생활에서 풀려난 박동화는 김소선과 함께 신의주로 떠난다. 배화여고를 갓 졸업한 김소선은 연극인 박동화를 공연장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고, 엄격한 집안의 극렬한 반대에도 13세 연상인 그를 따라 과감히 신의주로 사랑의 도피 행각을 떠났다. 그녀는 이후 평생 박동화를 그림자처럼 지켜보며 헌신적으로 내조하는 아내가 되었다.

신의주에서 박동화는 압강일보 기자직을 얻었고, 김소선은 국민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첫 아이도 낳았다. 압록강 인도교를 건너 깊은 밤중에 만주 안동과 신의주를 오가며 말술을 마셔대던 박동화도 아내의 해산준비를 위해 평양까지 미역을 구하러 다닐 정도로 어린 아내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았다.

 

 

 

 

 

 

신문예 창간과 폐간, 한국전쟁의 통한


신의주 생활 3년 만에 광복을 맞았지만, 신문통폐합 정책으로 압강일보가 폐간되었다. 박동화는 곧 서울로 옮겨 <시민극단>을 창단하고 연극 활동 재개에 나섰다. 그러나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 변변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박동화는 경상도가 고향인 동명의 박동화(朴東華·?-1947)와 순수문예지인 「신문예」을 창간했지만, 박동화(朴東華)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3호까지 발행하고 만다.

1947년 박동화는 경향신문 염상섭 편집국장의 권유로 군산에서 경향신문 지사장을 맡으면서 전라북도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미군정청 통역관이었던 친형 박영상의 권유로 군산민보의 기자 겸 편집국장을 맡기도 했는데, 군산의 기자단과 2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시련과 상처를 남겼다. 군산에서 인민군에게 체포된 그는 군산형무소에서 3개월간 수감됐다가 사형의 고비까지 맞았다. 다행히 평소 안면이 있던 교도관의 도움으로 자신은 구사일생 했으나, 그는 형과 형수, 조카, 그리고 그의 셋째아들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훗날 그는 ‘군산 근처를 지날 때마다 잊지 못할 아들의 기억을 떠올린다.’ 라고 일기에 적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생생히 되살아날 만큼 어린 아들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내가 몇 년 동안 살던 군산, 내 아들의 뼈가 묻혀있는 군산, 6.25때 내 아들 의양은 운명하는 순간까지 내 손을 잡아다가 제 가슴 언저리에 놓고 죽었다.


박동화의 일기(1974년 11월 15일) 중에서

 

 

그는 남은 가족들과 잠시 상경했다가 9·28 수복 이후 목포로 낙향해 몇 년 동안 목포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단편적인 몇몇 기록으로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격정적인 한 편의 극이다.

 

 

연극은 아버지의 신앙이었고 삶, 그 자체였다. 평생 한 목적을 위해 어찌 그토록 끊임없는 열정과 집착을 보일 수 있었는지, 이제 나 또한 아버지의 세대가 되어 그분을 바라보면 경이로움을 금할 길 없다. 무엇이 그분으로 하여금 그토록 끊임없는 열정과 집착을 갖게 만들었을까? 우리 부모의 세대가 그렇듯 내 아버지 또한 참으로 많은 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아버지 세대가 가졌던 시대적 한 뿐만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아버지처럼 큰 한을 가진 이가 또 있을까?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고 누나의 손에서 키워진 설움, 공부해야겠다는 이념으로 상경하여 겪었던 가난과 외로움, 해방 후 혼란 통에 믿고 의지하던 정신적 지주인 형의 정적에 의한 암살, 그 와중에 뿔뿔이 흩어진 조카들의 실종……. 아마도 내 아버지의 연극은 그 분의 가슴속에 있던 한풀이 한마당이었는지도 모른다. (중략)

인간은 의로워야한다, 정스러워야한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우리 가족에게 내리신 가훈이자 당신의 좌우명이기도 했다. 불의를 보면 바른 소리를 면전에서 하고 타협을 모르시는 분이었기에 그분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돌아서면 모든 걸 잊고 참으로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어린애 같이 단순한 분이셨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본을 연기하듯 불러주시던 아버지와 밥상에 원고지를 올려놓고 바쁘게 받아 적던 엄마의 모습이 바로 어제인 듯 생생하기만 한데 그분이 가신지 벌써 이십여 년이 흘렀다니 아버지 당신 딸은 당신을 사랑하기까지 참 먼 길을 걸어온 것 같습니다.


박의원(박동화의 딸)의 수필 「연극쟁이 나의 아버지」 중에서

 

 

 

 

 

 

전주에서의 시작된 중진극작가로의 삶


박동화는 1956년 전북대학교 대학신문 편집국장으로 오면서 전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를 전주로 불러들인 것은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사제관계로 인연을 맺었던 당시 김두헌(1903-1981) 전북대 총장이었다. 전주시 중노송동 1가 292번지. 다세대가 사는 전셋집에서 여섯 식구를 거느린 중년 가장의 연극을 향한 꿈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1957년 박동화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당선됐지만, 신문사 사정으로 신춘문예 자체가 취소되는 불운을 겪는다. 또한 서울의 한 극단에서 작품을 의뢰해 보냈지만 이 역시 극단 사정으로 불가 통보를 받는다. 그러다가 2년 뒤인 1959년 한 기자의 권유로 마감 일자를 이틀이나 넘긴 국립극장 현상공모(국립극장과 서울신문 공동희곡현상공모)에 응모, 당선작으로 뽑히게 되었다. 3막 5장의 장막희곡인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는 무고한 어느 교사를 순간적인 감정으로 사형을 구형하고 난 후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리다 공직을 사퇴한 전직 검사의 도덕적 갈등과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한국전쟁으로 아내를 잃어버린 젊은 검사의 붉은색증후군을 모티브로 이에 희생된 교사의 딸을 등장시켰다. 이 작품의 특징은 권력과 부의 타락, 무기력한 지식인, 개인적 보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남용 등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풍자다.

논문 「박동화 연구」를 쓴 전주대 김정수 교수는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악에 대한 증오, 권력과 부에 비타협적인 태도는 이후 박동화 희곡의 일관된 주제로 등장한다.”면서, “박동화는 작품 속 독백을 통해 부패와 타락의 극을 달리는 시대 상황을 엄중히 경고함과 동시에 그 시대를 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중의적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 작품은 그해 국립극단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다. 당시 정치·사회 문제를 매섭게 고발한 희곡으로 정치계와 평단의 혹독한 평가가 있었지만, 객석의 반응은 뜨거웠고 그를 금세 중진희곡작가의 대열에 서게 할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북대 극예술연구회와 창작극회 창단


박동화는 이후 전북대 극예술연구회와 창작극회를 중심으로 전주·전북의 연극판을 일구면서 폭발하듯 작품을 발표했다.

 

 

나는 나를 아끼기 때문에 연극을 사랑한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한다. 재주 없는 나로서는 큰 부담이다. 그러나 나는 작품을 쓰고 연극을 하련다. 이것만이 오로지 내가 할 일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박동화의 1962년 연극 「차질」 팜플렛 중 「작가·연출의 말」 중에서

 

 

박동화가 전북 연극과 인연을 맺던 1960년대 전라북도 연극판은 전북대학교 극예술연구회가 주축을 이뤘다. 전북대학교 개교기념일과 전라예술제 기념공연 등 일 년에 두세 편이 고작이었지만, 숨고르기도 쉽지 않던 그때의 문화 환경에서 그만한 무대를 올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64년 핵심단원들의 졸업과 군 입대로 상당수의 단원이 빠져나간 전북대 극예술연구회는 극단의 존속마저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박동화가 던진 카드는 자신의 희곡 「두 주막」으로 전국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마침 「두 주막」이 공보부 주최, 예총 주관의 신인예술상 연극 부문에서 1등으로 당선되었고, 그 상금으로 전국연극경연대회 밑자금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박동화는 또한 연극계의 새로운 기틀 세우기를 결심하고, 무대미술을 담당했던 하반영과 방송드라마작가인 조인환·이봉섭·최호영 등 연극 동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전문민간극단인 <창작극회>를 탄생시켰다. 창단멤버는 대부분 극예술연구회출신 졸업생이었다. 승부수는 정확했다. 전북대 졸업생인 이종호·고영자와 성우인 박길추·손옥자, 배우인 권기홍 등이 출연한 <두 주막>은 1964년 5월 국립극장에서 열린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해 창작극회는 일약 전국적인 극단으로 부상했고, 전북은 연극을 ‘자랑스러운 예술의 한 분야’로 인정하게 된다.

박동화는 창작극회 대표와 극작, 연출 1인 3역의 고된 작업을 기꺼이 감수했다. 창작극회는 박동화 희곡을 무대화하는 산실로 그 생전 42회 공연을 기록하면서 각종 전국연극경연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현재까지 전북연극의 대들보로 인정받고 있다.

 

 

개교 축제 행사로 공연된 「외딴 주막」은 지방연극 중흥의 기수 역할을 했다. 연극이 오를 때까지의 연극부의 노력 그리고 이 연극부를 주도한 극작가 박동화 선생의 끈질긴 집념에 우선 머리가 숙여진다. 연극이란 작품으로 되는 게 아니며, 더욱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 오지 연극의 명맥을 지키며 끝까지 계승해 나가자는 집념으로만이 가능하다는 산 교훈을 또 한 번 보였다는 결론이다. (중략) 이번 공연된 연극은 개교 축제 행사의 하나였지만 공연장인 시민문화관을 꽉 메우고도 밖에서 서성거린 연극 인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힘으로 믿고 앞으로도 정기적인 공연을 통해 이 지방 연극 중흥에 선구평적 역군이 돼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연극부를 육성해오는 대학당국과 그 연극부를 주도해오는 극작가 박동화 선생 노고에 거듭 경의를 올려 마지않는다.


전북대신문 1970년 7월 4일자 제335호 2면 기사 <연극 공연 「용감한 사형수」> 중에서

 

 

전라북도 연극사에서 박동화의 존재는 보물과도 같다. 이 지역 연극의 시작과 중심에 그가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창작극회와 전북대 극예술연구회 이름으로 올려진 20여 편의 공연에 박동화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1961)로 시작한 그의 작품은 「여운」(1962), 「정직한 사기꾼」(1962), 「왜 싸워」(1963), 「두 주막」(1964), 「대춘향전」(1965), 「우리들의 뒷모습」(1967), 「용감한 사형수」(1969), 「망자석」(1970) 등으로 이어지면서 풍요로운 무대를 선사했다. 1960년대 연극은 3시간이 넘는 대작 「바다는 노하고 산은 울었다」(박동화 작·연출)를 시민문화관에 올리며 마감한다.

 

 

 

 

 

 

‘전북 연극의 아버지’로 남다


1970년대 들어 수전증이 심해진 박동화는 구술로 작품을 완성해야했지만 「공사장」(1971), 「느티나무골」(1972)부터 「등잔불」(1978)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이들을 통해 현대문명의 발달로 공동체 정서가 사라지는 안타까움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성 상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 등을 다뤘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연극인들은 강신문·강주순·김병희·문치상·박길추·박태웅·송연·손경자·손예선·손옥자·양희영·오수정·오태식·이동윤·이명수·이보상·이종호·이현·이훈태·정광자·정석주·최규상·최동욱·한난수 등이었다.

 

 

"내 목숨이 부지하는 한 난 연극을 계속할 거야. 연극을 내 인생 하나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공부에 미치고 정치에 미치고 돈에 미쳤는데, 나는 그만 연극에 미치고 말았어요. 왜 하필 배고픈 연극에 미친 줄 아나? 그것은 연극이 아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서 그런 거야!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인생의 멋을 봉사할 줄 아는 연극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자, 술 들어! 쭉- 딱 한잔만 더하세. 우리말고도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 배우들이 있지!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들. 이 우주는 무대예요. 이 좁은 무대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적은 권력을 남용하고, 재물이 없으면서도 있는 체, 있으면서도 없는 체, 모르면서도 아는 체하며 사는 인간들이야말로 가짜 배우가 아닌가? 그러나 짜인 무대에서 창조의 열을 내는 우리야말로 자랑스러운 배우일세. 자, 술 한 잔 쭉 들고. 이제 딱 한잔만 드세. 다음 공연은 「사는 연습」 후편이에요. 「등잔불」이라고 말이야. 갈수록 관객들의 호응도 높아지니까, 우리 연극인의 책임도 더욱 무거워졌어요. 다음에도 아주 멋있게 온 정렬을 쏟아 막을 열어보세. 자, 술 들고 또 한잔! 이번에도 딱 한잔일세. 여그 맛있는 홍어 국물 좀 줘."


1970년대 후반 문예진흥원과의 인터뷰를 재구성.

 

 

 

1970년대로 이어진 전북연극판도 박동화로 인해 더 활기를 얻었다. 특히 1973년은 그에게나 전북 연극인 모두에게 특별한 해였다. 박동화의 회갑기념공연을 위해 미술인들이 전시회를 열어 제작비를 지원했기 때문이다.

 

박동화의 회갑에 즈음하여 도내 화가들은 전주 신세계다방에서 박동화 회갑기념 전시회를 개최하여 지역 연극 발전을 위해 외길을 걸어온 박동화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원희의 논문 「전북연극사연구」 중에서

 

 

 

지방에서 꾸준히 연극을 계속해 온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노익장한 박동화 선생의 투지는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무대의 막을 올리고야마는 것이었다. 하기야 어느 시대에서나 예술가는 고독하였다. 특히 연극예술인은 더욱 외롭고 쓸쓸하였다. 그러면서도 줄기찬 자기 집념으로 위대한 정신의 유산을 남겨 놓는 것이 바로 우리의 박동화 선생과 같은 뛰어난 연극인이었다. 무대와 더불어 생애를 마치겠다는 박동화 선생의 굳은 의지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은 물론이지만 더욱 많은 분들의 성원을 기대할 뿐이다.


이해랑(1916-1989·배우·연출가·당시 국회의원). 1973년 박동화 회갑기념 전시회 축사의 글 중에서

 

 

 

불사조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박동화 선생은 바로 연극계에 있어서 불사조 같은 분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연세가 많다는데 대한 소박한 존경이 아니라 그분만큼 연극 하나에만 골몰한 분이 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누가 권장하지도 않는 이 외로운 길에서 지금까지 작품을 쓰시고 극단을 이끌며 지방 연극문화를 위해 힘 써오신 모습은 바로 불사조에 비유할 만하다고 봅니다. 박동화 선생의 머리가 희어지고 이마의 주름이 늘어가는 것은 곧 연극계의 한 모퉁이가 그만큼 다져간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차범석(1924-2006·당시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1973년 박동화 회갑기념 전시회 축사의 글 중에서

 

 

「산천」(박동화 작·연출)은 사흘 동안 무대에 올랐고, 도민들은 역대 최대의 관객 숫자로 화답했다. 이 공연에는 박길추·곽영희·김민철·송창진·신상만·문치상·이종호·김가현·전성복·박승구·이기수 등이 무대에 섰고, 최선무용단이 출연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강대승·강부상·권기홍·권태호·김송미·김성두·김성희·김인중·김의석·김종남·김중곤·김희숙·류영규·문치상·박길추·박상근·박승구·박승자·박의원·박환창·백용현·소진영·신상만·신정기·신정규·오현주·유영규·윤양현·이가영·이기수·이명선·이연수·이호범·장영숙·전성복·정종선·조연주·진봉희·한옥남·한혜영·허윤경·홍덕순·황규 등이 중심을 이루며 전북에서 활동했다. 1970년대를 마감하면서 전북의 연극은 여러 민간극단과 관립극단 탄생으로 이어지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날이 갈수록 마음이 초초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무대를 가질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번 공연은 어떻게든지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연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연극에 대한 정열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실 지방에 있어 연극이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연극을 하기 위한 여건이 하나도 갖춰 있지 않다. 극장도 없다. 사람도 없다. 돈도 없다. 있는 것이라곤 나뿐이다. 내가 없어도 연극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할 텐데 걱정이다.


박동화의 일기(1974년 6월 5일) 중에서

 

 

1960·70년대 박동화는 기행적 행동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모두 연극에 대한 열정에서 시작된 일들이다. 9평 시영아파트에 이사하면서도 ‘내 집이 생겼다.’하며 좋아했고, 월급날이면 외상값으로 이리저리 다 뜯기고 달랑 몇 푼만 남아도 큰 부자라 말하며 제자들과 후배들에게 술과 밥을 사던 호기가 있었다. ‘전북의 연극수준은 서울에서 더 알아준다.’하면서 지면에 인색한 어느 신문사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려 돌진했던 일과 시민문화관 무대 천장을 막은 도지사를 찾다가 결국 도지사를 화장실로 피신토록 한 일, ‘배가 너무 고프면 소리를 낼 수 없다.’하면서 단원들을 초상집으로 끌고 가서 곡을 시키고 배불리 먹게 했던 일 등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사는 집이 없어도 잠 잘 곳을 걱정하지 않으셨고, 오직 연극 연습장 마련이 더 급했으며, 끼니보다는 한 잔 술이면 그것으로 족했고, 수전증은 구술로 보충했으며, 비틀대는 불편함은 호기로 버텼습니다. 연극에 관한한 고집불통이셨고, 시작이 반이라는 믿음으로 천하무적 돌격대장이셨으며, 시종일관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연극을 폄하하거나 무시했을 경우는 어느 누가 됐건, 어느 기관·단체가 됐건 물불 가리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으며, 불의는 결코 용납지 못하셨습니다.


문치상의 글 「연극으로 향한 집념, 배워야 할 유산이다」 중에서

 

 

박동화는 늘 가난했다. 쥐꼬리만 한 그의 월급은 같이 연극하는 젊은이들의 밥값과 술값 대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잡지에 희곡을 발표하거나 상으로 받은 원고료는 다음 번 공연을 먼저 떠올릴 뿐이었다. 박동화의 머릿속은 늘 마음에 드는 희곡, 마음에 드는 연극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말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글을 쓰기 힘들어졌을 때에도 그는 구술을 통해 희곡을 썼다. 때로는 그의 아내와 딸이, 때로는 연극 제자들이 그 구술을 받아 적을 정도로 그의 연극을 향한 집념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김정수의 논문 「박동화 연구」 중에서

 

 

박동화 선생님께서 생전에 걸어오신 길은 어쩌면 작품을 통해서나마 해탈을 추구하셨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연극공연이 성공적으로 오르고 관객들로부터 호응을 받았을 그 어느 날 밤, 배우와 스태프들과 대포 한 잔 하시면서 힘들었던 연습 때의 고통은 잊고 잠시 연극인으로서 행복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취기 서린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걸음걸음에 느껴지는 삶의 무게에서 무상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한 판 놀다가는 배우로서, 그 어려웠던 시절에 세상을 향해 한번 호령하고 사시다 훨훨, 털고 떠나고 싶었던 그런 분이셨을 것입니다.


장성식(연출가·백제예술대 뮤지컬과 교수)

 

 

후배들은 지금도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 당시를 회상한다. 풍남백화점 옆길 딱잔 정읍집과 후문집 막걸리. 2차, 3차에는 정종을 즐기시면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곤 했다. 제작비가 없을 때는 화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래도 막은 오른다.” 하시면서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과 고등학교 교무실을 티켓과 팸플릿을 들고 자주 찾았다. 선생님은 늘 “이 나라가 교육의 가치를 높이려면 학생들한테 연극을 가르쳐야 한다.”면서 교육위원회 교육감을 찾아가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쳐줄테니 연극학교로 지정해 달라며 그렇게 열성적으로 외치곤 했다.


류영규(연극인·제17대 전북연극협회장)

 

 

내 나름으로는 ‘전북 연극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것이 보다 적확하고 정감이 가지 않을까? 선생이야말로 불모의 전북 전주 땅에 처음으로 현대 연극예술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열매 맺게 길러낸 연극거인이다. 선생님은 당신 혼자서 희곡작가이자 연극연출가, 연극제작자로서 일인 다역의 진솔하고도 학같이 고고하며 열정적이고 폭 넓은 연극운동가이다.


노경식(극작가)의 칼럼 「연극인 박동화선생을 기리는 계절」(전북일보 2007년 5월 31일자) 중에서

 

 

어느 무더운 여름 오후 4시. 시청 공간을 빌려 연극을 지도한 후 창백한 얼굴. 설다방. 다방에 들어서자 커피 한 잔을 들이키더니, “작촌, 따끔한 한 잔 어때” 투로 다그쳤다. 단골술집 동락. 정종 술 한 잔 마시는 것. 그는 술을 마시면 의기충천하여 세상 되어가는 일이나 체통 없이 놀아대는 사람에게 통침을 놓아대기도 했다.


작촌 조병희(서예가·향토연구가)

 

 

여배우를 확보치 못해 방송국, 육군병원, 고등학교, 여자들의 모임 장소를 전전하면서 꼬이던(?) 일도 어제 같고, 그나마도 구하지 못하면 밤새워 여자 배역을 남자로 바꾸어 각본을 수정했었지요.

각본 얘기가 나오니까 어둠침침한 여관이 생각나네요. 선생님은 회갑을 넘기면서부터 수전증으로 더 이상 직접 집필할 수가 없었지요. 그때부터 글을 쓰시기 위해서는 제가 필요했었는데요. 기억나시죠?

여관방(여관보다는 여인숙이 더 많았지만) 이불에 비스듬히 누우셔서 감정까지 가미시키시면서 청산유수 불러 제키시면 정신없이 받아쓰고, 다시 읽어 드리고, 수정 보완하는 가운데 작품이 완성되었지요.

너무 빠르다는 제 불평에 "신문쟁이가 그것도 못하느냐?"는 일갈이 끝이었고, 어쩌다 약속시간을 여겼다는 이유로 불문곡직 문전에서 베개 세례를 받은 게 어디 한 두 번입니까. 그렇게 탄생된 작품을 철필로 긁어 등사한 후 마무리되어 배우들의 손에 쥐어지지만 연습과정에서 빠지고 덧대지는 대목이 더 많아 사실 등사본 작품은 무대에 올려진 원본이 아닌 경우가 많았답니다.


연극 <가인 박동화>의 팸플릿에 실린 문치상의 글 중에서

 

 

박동화는 1970년대 말까지 20여 년 넘게 오직 연극만을 위해 삶을 바쳤다. 대학에서 극예술을 익힌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문극단인 창작극회를 발족시킨 이도 그이다. 연극인 양성에도 각별한 애정을 쏟았고, 창작극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연극판의 성격도 정립시켰다. 희곡작가가 넉넉하지 않은 현실에서도 창작극이 유달리 많은 전북 연극의 특징이다. 한국연극협회 전북지부장은 초대에서 7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자리였으며, 전북예총의 수장을 겸하기도 했다.

죽음에 임박한 시간, 박동화는 후배이자 제자인 문치상에게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는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며 후배들을 부탁했다.

 

 

“자네는 후배들을 위해 길 닦음 노릇만 해. 먹고살지 못하니까 쓸 만하면 다 서울로, 서울로 떠나지 않는가? 그들이 이 고장을 지킬 수 있도록 도립극단이나 시립극단도 만들고, 소극장도 있어야 돼. 나는 행복한 게야. 연극인이 무대에서 살다 무대에서 죽은 것 아닌가. 후회는 없네. 다만 연극을 맘 편히 할 수 있도록 그 터전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참 나 말이야 죽거든 절대 화장하지 못하게 하게나? 난 죽어서도 연극을 해야 되니까.”

 

 

그 쓸쓸한 울림이 귓가에도 맴도는 듯하다.

 

온 몸이 퉁퉁 부어 신발을 신지 못하면서도 그는 무대 위에서 끝까지 연기자들을 지켜보았다. 안락의자에 푹 기댄 채인 그는 중환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왜! 내가 환자냐’면서 끝까지 무대를 지켰다. 공연이 끝나던 날 그는 병원을 찾았고 응급실의 병명은 간경화! 과로로 회생불능이라는 것이었다.

 

‘난 죽어서도 연극을 해야 돼, 그러니까 날 화장하면 안 돼.’

 

연극을 향한 그의 집념은 생과 사를 초월했다.

 

‘공연비도 없고 사람도 없고 시설도 황량할 뿐이다. 누가 말하기를 예술이란 무에서 유를 건지는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는가 보다. 그래도 동심만이 간직할 수 있는 순수성 때문에 연극을 하고 또 한다. 내 나이 내일 모레면 70인데도 연극을 하게 되니 나는 어린이인가 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박동화 작고 당시 문치상의 추도사(전북신문 1978년 6월 23일자) 중에서

 

 

 

 

 

 

 

박동화의 1960·70년대 작품세계


 

박동화는 탁월한 풍자작가였다. 그의 풍자는 정치적 억압이나 사회적 모순 등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본능적이며 기본적인 척도인 양심이 허락하는 범주를 벗어난 것이면 무엇이든 그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희곡은 그 시대나 사회상, 혹은 그가 속한 집단이거나 환경 안에서 그에게 포착된 가장 절실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김정수의 논문 「박동화 연구」 중에서

 

 

김정수는 ‘박동화는 자신의 작품 주제를 빈번하게 풍자의 대상으로부터 발견했다.’며 ‘박동화의 희곡 중 상당수는 세태풍자 희곡의 범주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풍자를 사회현상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과 인간이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양면성·부조리성을 포함하는 대자아적 풍자로 구분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작품은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1959), 「여운」(1962), 「이유있다」(1971), 「孔사장」(1973) 등을,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은 「상실」(1963), 「상쇠」(1975), 「사는 연습」(1977), 「등잔불」(1978) 등을 꼽는다.

박동화의 사회적 현상에 대한 비판은 정치·경제·교육 등 폭이 넓다. 「여운」은 독재자의 고위 하수인 ‘이철수’ 일가의 몰락을 그린 장막희곡으로 자유당 시절 세도를 떨쳤던 ‘이기붕’을 소재로 4·19를 간접적으로 평가한다. 「이유있다」는 1971년 전주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전주고등학교 화재사건을 소재로 방황하는 청소년의 심리적 갈등을 압축시켜 놓은 단막희곡이다. 또한 「孔사장」을 통해 힘 있는 자와 내통해 부를 축적하면서 퇴폐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부류들을 희화화시켜 보여준다. 고도성장 우선주의의 경제정책 아래 권력과 결탁해 혜택을 독점했던 일부 졸부 층의 무지와 타락상에 칼날 같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 화살을 박동화 자신에게 향하게 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문제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상실」에서 보여주는 자아 분열적 혼돈은 박동화가 겪고 있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일곱 명의 환자들이 대화·독백·방백의 형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사는 연습」에서는 그들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곧 박동화의 대사회적 발언이다. 정신병자들의 분망한 대화는 박동화가 그의 희곡에서 빠뜨리지 않는 돈, 권력, 비굴한 삶에 대한 풍자를 행하는 통로다.

 

 

이상수: 그래 돌아와야지. 돌아와서 이 아비의 상쇠 자리를 물려받아 줘야해. 여보! 꽹과리를 칠 테니 들어 보오(꽹과리를 멋있게 치며 돌아간다) 여보, 당신도 춤을 추어, 구성지게 어서(꽹과리의 리듬에 맞춰 춤을 춘다. 라이트가 두 사람을 쫒는다. 사이를 두고 좋아, 좋아, 연발한다)

이상수: (도취하여) 좋아 좋다. 내 젊음이 되살아난다. 당신도 옛날 멋이 그대로 남았군.(꽹과리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고 돌아가는 금란주의 자태를 황홀히 바라보며) 역시 당신은 아직도 젊어서 아름다워. 당신은 아직도….

(중략)

이상수: (반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해도 좋아! (허공을 멍청히 쳐다보다가 꽹과리를 친다) 이 소리가 나는 좋아… 좋아서 일생을 이 소리와 같이 살아 왔단 말이야. 제쟁쟁쟁 제쟁쟁쟁 이 소리에는 내 살과 피가 흐르고 있어. 아니, 먼 조상들의 피가 흐르고 있어. 아니, 먼 조상들의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이다. 태성아 이 소리를 천시하고 천대하면 안 된다. 자! 들어봐 얼마나 좋은 소리야! (꽹과리를 치고 돌아간다) 이 멋. 나는, 이 멋 때문에 살아왔다.

김태성: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춤을 추면서 장고를 든다. 금란주도 소고를 든다. 세 사람 한참동안 흥겨워 춤을 추고 돌아간다)


박동화의 희곡 「상쇠」 중에서

 

 

「상쇠」에서는 박동화의 인생관과 예술관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상쇠」는 박동화의 희곡 중에서 가장 적은 3명의 등장인물을 가진 단막극이며 기다림을 주조로 한 서정극이다. 주인공 ‘이상수’는 바다가 보이는 어느 외딴집에서 나이 차이가 많은 기생출신 부인과 살고 있는 꽹과리 명인이다. 죽음이 가까운 그의 유일한 소원은 십 년 전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와 대를 이어 상쇠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늙은 상쇠는 곧 박동화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단순한 형식에 전통의 계승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소화하고 있지만, 작품 속 ‘이상수’가 꽹과리에 갖는 강한 집념과 자부심은 박동화가 연극을 향해 불태우는 열정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박동화의 마지막 작품인 「등잔불」은 그런 의미에서 훨씬 더 절실하다. ‘황태일’의 입을 통해 박동화는 전북연극의 미래를 담당할 후배 연극인들에게 자신의 유언을 실어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수는 “꺼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전북연극’이라는 등잔불은 절대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주는 모습이며, ‘안구(眼球)’로 상징된 ‘의식(意識)’의 전수가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상쇠」의 ‘이상수’와 「등잔불」에서 ‘황태일’이라는 인물을 박동화로 환치시키면 그들의 대사 하나 하나가 바로 박동화의 목소리다. 박동화는 그의 말년에 대표적인 이 두 작품을 통해 그의 생을 정리하면서 그가 갖고 있던 연극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우리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권력과 부’라는, 그가 생애를 통해 가장 경계하고 증오했던 대상과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자세와 소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으로 그는 그 자신의 연극이 왜곡된 권력과 금력에 항거하는 치열한 싸움이었으며, 그로부터 핍박받는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박동화의 연극은 일관된 주제의식 아래 그가 집요하게 추구했던 권력과 부의 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한 시대를 성실하게 살아온 인간으로서 겪어야 했던 갈등과 고통은 일면 그의 작품을 한의 문학이나 나약한 패배주의자의 냉소적 문학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그의 삶이 뒷받침하고 있는 건겅한 도덕성은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고 그의 희곡문학의 단단한 기둥이 되고 있다.


김정수의 논문 「박동화 연구」 중에서

 

 

 

 

 

 

박동화 추모연극 <가인 박동화>와 <독백>


한국연극협회 전북지회가 박동화의 28주기와 29주기를 추모하며 기획·제작한 창작극 <가인, 박동화>(극 최기우 연출 류경호·2006)와 <독백>(극 김정수 연출 류경호·2007)은 올곧게 연극만을 위해 희생한 박동화의 삶과 예술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를 통해 박동화의 삶과 내면세계뿐 아니라 한국연극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으며,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전라북도 연극사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박동화라는 개인의 일대기에 숨어 있던 파란만장한 현대사의 질곡. 전북연극의 태동과 발전, 나아가 전북 문화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펼쳐졌다. 이 연극은 오늘을 사는 예술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한 연극인의 목소리로 다가왔다.

 

 

(조명 한쪽에 켜지면, 밝은 표정의 박동화.)

박동화: (흥에 겹다) 사실 말이지, 내 목숨이 부지하는 한 난 연극을 할 거야. 연극을 내 인생 하나의 사업으로 생각하고 말이지. 다른 사람들은 공부에 미치고 정치에 미치고 돈에 미쳤는데, 나는 그만 연극에 미치고 말았어. 왜 하필 배고픈 연극에 미친 줄 아나? 그것은 연극이 아주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아서 그런 거야! 관객을 울리고 웃기는 인생의 멋을 봉사할 줄 아는 연극인!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그러나 이내 처량해 진다.)

박동화: 그런데 말이야. 공연비도 없고 사람도 없고 시설도 황량하지. (탄식하듯) 누가 말하기를 예술이란 무에서 유를 건지는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도가 있는가! 그래도 동심만이 간직할 수 있는 순수성 때문에 나는 연극을 하고 또 하지. 그래서 내 마누라는 늘 이렇게 말을 해. 당신은 늘 어린아이인가보다, 하고 말이야. 하하하

(박동화 무대 뒤로 걸어간다. 뒤를 돌아 다시 앞으로 오며.)

박동화: (힘차게) 이현, 이종호, 강주순, 최동욱, 고영자, 전성순 이동윤, 정병강, 이진수, 유영규, 김기홍, 박길추, 유시명, 정순권, 최선자, 문치상, 문치상? 치상이 어딧어? 연극 안 할 거야?

(빠르게 암전.)


최기우의 희곡 「가인 박동화」 중에서

 

 

2006년 작품은 그가 발표한 작품의 사상적 성숙기인 1930-50년대 활동을 중심으로 다뤘다.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과 인간의 양면성·부조리성에 대한 풍자가 중심을 이루는 그의 작품의 기저가 그 시대에 형성된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작품을 통해 그의 삶과 내면세계를, 한국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질곡의 한국사의 단면을 엿볼 수 있으며, 박동화라는 개인의 일대기에 숨겨져 있던 파란만장한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이야기인 비주류 연극인들의 애틋한 삶을 짐작할 수 있다. 2007년 작품은 60·70년대 이야기다. 두 편 모두 오늘을 사는 예술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한 연극인의 목소리다.

 

 

 

 

 

 

 

참고문헌


곽병창·김정수·이원희·최기우, 『전북연극사』, 전북연극협회, 2008

김성희, 「국립극단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한국극예술학회, 2000

김정수, 「박동화 연구」, 우석대 대학원, 석사논문, 1990

김정수, 「박동화의 삶과 작품세계」, 『작가의 눈』, 전북작가회의, 2002

문치상, 「내가 아는 연극인 박동화」, 『작가의 눈』, 전북작가회의, 2002

박영정, 「해방기의 연극정책에 관한 연구」, 한국극예술연구, 한국극예술학회, 1997

박의원, 「연극쟁이 나의 아버지」, 『작가의 눈』, 전북작가회의, 2002

(사)동화기념사업회, 『끝나지 않은 독백』, 2008

이원희, 「박동화 희곡의 현실대응방식」, 국어국문학 119권, 국어국문학회, 1997

이원희, 「전북연극사 연구」, 경희대 대학원, 박사논문, 1997

전북대신문 통합본

전북일보(전북신문) 통합본

전진기, 「전북연극사 연구」,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석사논문, 1996

 

 

박동화 선생의 글 목록


선생은 본명인 "박덕상(朴德相)" 으로 글을 썼지만, 무대에 서거나, 희곡을 발표할 경우, "박동화"란 필명을 사용했다. 또 "DK生"을 필명으로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근현대잡지자료에 따르면 『호남평론』(3권 3호년)에 수록된 「어머니讀本. 二」란 소설을 "DK生"이란 필명에도 불구하고, 박덕상의 작품 「小說: 젊은 어머니」로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시 기고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필명을 사용했고, 소설의 맥락이나 문체 등을 살펴보았을 때에도 ‘DK生’이 필자로 된 글은 박덕상(박동화)의 글과 거의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DK生"을 박덕상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박동화 선생이 근무했던 전북대신문에는 그의 평론과 수필, 희곡 등이 꽤 많지만, 일부만 써 넣었다.

 

구분

제목

필명

수록매체

수록일시

수필

여중잡감旅中雜感 : 隨筆

DK生

호남평론 1권 3호년 p74

1935. 3

수필

「不孝」

DK生

호남평론 1권 4호년 p81

1935. 4

수필

우감우감(偶感愚感)

DK生

호남평론 1권 5호년 p53

1935. 5

수필

旅情數題(여정수제)

DK生

호남평론 1권 5호년 p60

1935. 5

수필

偶感愚感

DK生

호남평론 1권 6호년 p50

1935. 6

수필

秋冬夜話(추동야화) : 文藝

DK生

호남평론 1권 7호년 p63

1935. 7

수필

意志굳은사람이되자 : 신년수감

DK生

호남평론 2권 1호년 p78

1936. 1

수필

秋冬野話. 二 : 어버이 : 文藝

DK生

호남평론 2권 1호년 p104

1936. 1

수필

추동야화秋冬野話: 어버이 : 文藝

DK生

호남평론 2권 2호년 p58

1936. 2

수필

장학기관의 필요성(獎學機關의必要性)

DK生

호남평론 2권 3/4호년 p30

1936. 4

수필

아동에대한존어사용문제에대하야

DK生

호남평론 2권 6호년 p31

1936. 6

수필

偶感愚感

DK生

호남평론 2권 7호년 p74

1936. 7

수필

유달산 밑에서 이형에게

朴德相

호남평론 2권 7호년 p77

1936. 7

수필

『상초』讚美

DK生

호남평론 2권 8호년 p103

1936. 8

수필

木浦高普設立方途에對하야各士諸氏의意見:熱과誠의協力으로

DK生

호남평론 2권 8호년 p79

1936. 8

수필

한라산모험기漢拏山冒險記

DK生

호남평론 2권 10호년 p93

1936. 10

수필

한라산모험기漢拏山冒險記. 二

DK生

호남평론 2권 11호년 p65

1936. 11

수필

偶感-愚感(우감-우감)

DK生

호남평론 2권 12호년 p38

1936. 12

수필

오월신록보:추억·신록·그女人

朴德相

호남평론 3권 5호년 p52

1937. 5

수필

어느 하루날

朴德相

호남평론 3권 7호년 p52

1937. 7

수필

소하를 위한 인간의 태도

朴德相

호남평론 3권 8호년 p62

1937. 8

수필

국민 정신의 기반

박동화

백경

1961

수필

기독교의 두가지 반성

박동화

백경

1963

수필

이광래 선생의 생애와 그의 예술;이광래 형과나

박동화외

현대연극

1971

수필

연극과 설렁탕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74호

1971.10.8

수필

선물예찬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75호

1971.10.19

수필

표정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76호

1971.11.9

수필

가보고 싶은 곳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78호

1971.12.3

수필

공사장 공연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80호

1971.12.31

수필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81호

1972.2.22

수필

투자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83호

1972.3.21

수필

울음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85호

1972.4.7

수필

특종기사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86호

1972.4.14

수필

둔갑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88호

1972.5.5

수필

대학연극의 역할

박동화

전북대학신문 제376호 3면

1971. 11. 9

단편소설

동낭개(1편)

朴德相

호남평론 2권 7호년 p84

1936. 7

단편소설

동낭개. 게속(2편)

朴德相

호남평론 2권 9호년 p92

1936. 9

단편소설

젊은 어머니(미완)

박동화

호남평론 2권 11호년 p102

1936. 11

단편소설

어머니讀本

DK生

호남평론 3권 2호년 p50

1937. 2

단편소설

어머니讀本. 二

DK生·박덕상

호남평론 3권 3호년 p33

1937. 3

단편소설

어머니讀本. 四

DK生

호남평론 3권 6호년 p41

1937. 6

단편소설

『어머니讀本』. 五

DK生

호남평론 3권 7호년 p40

1937. 7

희곡

水害後. 二幕 : 戱曲

朴東和

호남평론 제3권 제8호

1937. 8

희곡

황금광상곡

박덕상

<협동예술좌> 공연

1940

희곡

창문을 닫아라

朴東和

현대문학

1961.1

희곡

낙엽

박동화

현대문학

1962.8

희곡

아버지의 뒷모습

박동화

현대문학

미상

희곡

이유있다

朴東和

월간문학

1971.5

희곡

공사장

박동화

월간문학

1973.7-9

희곡

상쇠

박동화

월간문학

1975.2

희곡

因果

朴東和

한국문학

1975.2

희곡

거름

박동화

월간문학

1976.2

희곡

돈역

박동화

한국제지

1960년대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박동화

서울신문

1959

희곡

응보

박동화

한국희곡집

 

희곡

바다가 보이는 마을

박동화

전북대신문

1962년

희곡

사양족

박동화

전북대신문

1960년대

희곡

넋두리

박동화

전북대신문

1970년대

희곡

박동화

전북대신문

106-109호

희곡

상실

박동화

전북대신문

129-133호

희곡

오릿골의 화제

박동화

전북대신문

 

희곡

사양족

박동화

전북대신문

1960년대

희곡

두주막

박동화

전북대신문

 

희곡

그날

박동화

전북대신문

1975년

희곡

독백

박동화

전북대신문

1975년

희곡

장가가던 날

박동화

한국연극

1976년

춘정

朴德相

호남평론 2권 8호년 p116

1936. 8

실제

朴德相

호남평론 2권 8호년 p116

1936. 8

검은우슴

朴德相

호남평론 2권 8호년 p116

1936. 8

알고나있는가

朴德相

신문예 제1권 3호년 p10

1946. 10

목가

朴德相

신문예 제1권 2호년 p21

1946. 7.

희망

朴德相

신문예 제1권 1호년 p37

1945. 12.


 


유고 희곡집

제목

필명

출판

수록일시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朴東和 戱曲集

朴東和

예총전라북도지회

1991

창문을 닫아라: 박동화 희곡집(이원희 편)

박동화

신아출판사

1997


 

 

박동화의 약력


1911년 - 전남 영암 출생(4.21)

1926년 - 목포영흥학교 졸업. 중학교 진학

1928년 - 광주학생운동 가담. 중학교 퇴학. 상경.

1931년 - 서울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서항석·이광래 등과 교류하며 신극운동 및 극예술연구회 참여.

1932년 - 극예술연구회의 직속극단 <실험무대> 창단멤버로 참여.

1934년 - 중앙불교전문학교 3년 수료.

1935년 - 서정주·오장환·함형수 등과 시 공부. 신문 악평으로 시 공부 포기.

1936년 -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학생예술좌 입단. 극작·연출 수업. 조선연극협회 창단공연 「수전노」 처녀 출현(10.24-25)

1937년 - 목포로 내려가 한글잡지 「목포호남평론」 편집국장. 시·소설·수필·평론·희곡 등 발표.

1940-41년 - 이광래와 <중앙무대> 창단. <협동예술좌>에서 희곡 「황금광상곡」 등 무대화. 인천·춘천 등 순회공연.

1942년 - 일본경찰에 체포 압수. 고문 및 탄압. 창작활동 중단. 일제에 증오심.

1943년 - 김소선(김수산) 여사와 신의주로 떠남. 첫 아이 출산. 신의주에서 「압강일보」기자.

1945년 - 광복 후 서울로 귀경. 「시민극단」 창단하며 연극 활동 재개, 12월 순수문예지 [신문예] 창간.

1946년 - 『신문예』 1권 2호, 3호 발간. 동업자의 죽음으로 이후 발간 포기.

1947년 - 군산에서 경향신문 지국장.

1949년 - 미군정청 통역관인 형 박영상의 권유로 「군산민보」 편집국장 역임

1950년 - 한국전쟁으로 공산당에 의해 피체, 군산 형무소 3개월 수감. 사형 고비 후 극적 탈출. 형과 형수, 조카, 셋째아들 박의양 죽음. 상경 후 곧 낙향.

1950년 - 목포로 낙향, 「목포일보」 편집국장 역임

1956년 - 전북대학교 대학신문 편집국장 취임.

1959년 - 국립극장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당선

1961년 - 전북대 극예술연구회 창단 및 정기공연.

1962년 - 희곡 「여운」 창작. 전북예총 전북지부 창립위원장.

1964년 - 창작극회 창단, <두주막> 신인예술상 및 전국대회 최우수상.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한국연극협회 전북지부장(1대-7대)

1965년 - 제4대 예총 전북지부장 취임.

1973년 - 희곡 「孔사장」 창작

1975년 - 희곡 「상쇠」 창작.

1978년 - <등잔불> 마지막 공연 날 관극 중 쓰러짐(5.28), 작고(6.22). 전북에서 최초로 문화예술인장 거행(6.24)

1991년 - 유고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발간

1997년 - 유고집 『창문을 닫아라』 발간

1999년 - 6월 22일 전주체련공원에 흉상 건립(작가 전병관·글씨 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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