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평단을 견인한 비평가, 김교선
글. 최명표(문학평론가)
Ⅰ. 박복한 세대, 다복한 제자
김교선(金敎善, 1912~2006)은 함남 함흥 출신의 비평가이다. 그는 1932년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1938년 호세이대학 문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학교를 마치고 나서 '구문사'라는 출판사에 다니던 중 귀향하여 집안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동향의 규수 최정희(崔正姬)와 혼례를 올렸다. 그녀는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나온 재원(才媛)으로, 졸업 후 낙향하여 가사를 돌보다가 28세의 그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마침 김교선이 사립중동학교에 교원으로 취직하자, 둘은 서울에 신접살림을 차린 뒤 슬하에 1남 3녀를 낳고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나 그의 생은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는 고향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38선을 넘어오는 도중에 어머니를 여의고, 동란의 와중에는 아버지마저 잃고 말았다. 태어나서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고, 커서는 식민지 종주국으로 유학하여 신지식을 학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가 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부모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 전주에 정착하게 된 배경이다.
김교선은 일본에 유학하러 가기 전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그가 발표한 시 「람프에 불을 켤가요」(『신인문학』, 1936. 1)가 증거이다. 1939년 9월부터 1954년 8월까지 서울 중동학교, 고창고보, 전북고등학교 등을 거치며 교사와 교장 등을 지낸 그는 일찍부터 유능한 국어 교사로 도내 중등학교에서 정평이 난 터라, 문학 활동을 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조성되어 있었다. 1951년 그는 서정주 등과 〈남풍〉 동인회를 결성하여 전란 중에도 전북 문단이 활기를 잃지 않도록 힘을 보탰다. 동인은 둘 외에 김종빈, 하희주, 김범삼, 이철균, 서정태, 은안기 등이었다. 또 그는 전북대학교 초대 인문대학장으로 봉직하던 이병기를 도와 〈가람〉동인회를 만들었다. 1977년 10월에는 전라문학회(회장 이상비)와 전북문인협회 고문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김교선이 문학평론에 진력하게 된 시기는 1954년 9월 전북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부임한 뒤였다. 그는 전북대에서 1978년 정년퇴임하였고, 1987년까지 전주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재임하였다. 그는 전후의 혼란기를 맞은 국어국문학과의 교육과정은 물론,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적용할 비평의 방법론까지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4년 봄 그가 전국 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단 이사 등을 맡아서 국어국문학과의 학문적 정체성을 체계화하는 과제를 수행한 것이 그에 해당한다. 이 시절에 그가 학생들을 위해 노력한 정도는 제자 이운룡이 쓴 감사의 글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군 제대 직후 1962∼63년 국문학과 주임 교수이셨던 김교선 교수께서는 학생들의 향학열을 고무시키고 장래 한국문단의 밑거름이 될 인재 육성을 위하여 서울에서 가장 유능하고 명성이 높았던 교수 세 분을 초빙, 국문학과 2학년 학생들로 하여금 2년 동안 집중 강의를 받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그 은혜로 말하면 필자를 비롯하여 대학 국문학과 2학년 학생들에게는 최고 최선의 행운이었다.
초빙된 교수가 담당한 전공 강의는 시론, 시창작론 두 과목을 맡으신 김현승(숭실대) 시인, 문학개론을 맡으신 조연현(동국대) 문학평론가, 언어학을 맡으신 이숭녕(서울대) 교수께서 집중적으로 강의하셨다. 세 분 교수의 영향은 두 말할 여지없이 크나큰 자극이고 감동이었다. 필자는 김현승 교수의 강의를 빠짐없이 100% 흡수하면서 열심히, 참으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때 비로소 시창작과 문학 이론의 개안을 스스로 의식할 수 있었다.(「나의 문학적 인생, 그 이면사」)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원근을 마다하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여 유명 교수를 청빙하여 온 것만 보더라도, 김교선이 전북대 국문과의 기초를 다지는데 힘쓴 공로를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는 학생들의 창작 활동을 격려하는 한편, 스스로 비평가로 이름을 올려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1962년 주위의 권고로 평론을 시작한 김교선은 1972년 1월 월간 『현대문학』 제18회 평론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또 전북 지역의 평단을 구축한 공으로 ‘전라북도 문화상’과 1992년 ‘제1회 목정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와 같은 경력은 그가 전북 비평계에 끼친 영향력을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사실 김교선의 작품량은 많지 않다. 그는 등단 10주년과 회갑을 맞아 『소설의 이해와 평가』(형설출판사, 1972)를 출간했고, 말년에 『관념과 생리』(신아출판사, 1996)를 출판했을 뿐이다. 두 권의 평론집조차 제자와 후학들의 강권을 못 이겨 낸 것이고, 다수의 작품이 중복 수록되어 있다. 그런 탓인지 지금까지 그의 비평에 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그의 비평이 논쟁적이거나 이론적이지 않아 사계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또 문단의 권력이나 세력을 형성하는 일에 무관심했던 그의 성품도 연구자들의 무관심을 방조했다. 덧붙여 상기도 연구자들이 지역에서 활약한 비평가들에게 소홀시하는 풍조가 온존하여 김교선과 같은 비평가들의 연구를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김교선의 비평은 높이 현양되어야 마땅하다. 첫째, 그는 전후의 혼란한 틈에 전라북도의 평단을 수복하느라 헌신하였다. 대일항쟁기에 이익상으로부터 기원한 전북의 근대문예비평은 해방 후 상당 기간에 걸쳐 공백 상태를 맞았다. 전쟁이 그친 뒤, 전북대학교에 자리를 잡은 김교선은 현대문학을 가르치는 국문과 교수라는 이유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도내의 평단을 복원시켜야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도내의 평단을 정지하고 회복하기 위해 헌신한 그의 공과를 엄정히 평가할 시점이다. 둘째, 김교선은 비평적 방법론으로서의 뉴크리티시즘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이식하고 치밀한 독해를 강조했다. 그가 심어 둔 방법론은 지금까지 학풍으로 남아 연면히 계속되고 있다. 그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천이두가 텍스트에 대한 정치한 독해를 강조하고, 오하근이 김소월 시의 원전비평에 헌신한 것을 보면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정도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처럼 전북대 출신의 비평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검출되는 뉴크리티시즘의 중개자란 점에서 그의 비평적 영향력은 간과할 게 아니다. 셋째, 김교선의 비평적 업적에 대한 검토 없이는 전북의 현대문학비평사가 제대로 기술될 수 없다. 이것은 위 둘과 관련된 것으로, 그는 이익상의 졸서와 전쟁으로 중단된 전북 지역의 비평사적 맥락을 채워주는 과도기적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였다.
Ⅱ. 따뜻한 중용의 비평
1. 감상의 중시
남북전쟁의 후유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전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의 단절된 부위를 원 상태로 되돌리려고 매달렸다. 그것은 시대의 명령으로, 그들에게는 그로부터 회피할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처럼 1960년대에 등단한 비평가들은 전대의 공백, 즉 해방을 기점으로 갈라지고 전쟁으로 공백이 된 평단의 복구와 선배들의 부재 상태를 메꾸는 일에 동원되었다. 김교선은 자신이 처한 현실 상황을 엄정히 인식하고 비평의 체계화에 진력하는 한편, 전쟁으로 위축된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 실천비평도 경시하지 않았다.
김교선은 강단비평가답게 감상의 과정을 중시하였다. 그는 감상을 “어떤 전문적인 지식이나 특수한 목적의식을 전제로 하여 작품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겸허한 자세로 작품을 읽고 그 느낀 바를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문제의식만 앞세우는 비평문학」)이라고 정의하였다. 작품의 평가에 앞서 ‘느낀 바를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은 문학교실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벼리이다. 김교선은 당대의 비평가들이 김소월의 시 「산유화」에서 저항의식을 발견하여 억견을 제출하거나, 외국에서 들여온 신식 이론의 적용에 급급하여 제대로 된 감상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설익은 문제의식만을 앞세워 한국의 평단을 폄하하는 풍조를 마냥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상은 김환태의 인상비평에서 보듯, 논자들로부터 주관적 비평이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김교선도 감상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감상의 주관적 요소를 제척하고 그 자리에 객관성을 입히려고 골몰하였다. 그의 노력은 감상에 대한 심화된 논리와 그것을 작품의 분석에 적용한 실천비평의 단행으로 나타났다. 이 점은 그가 감상의 주관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극복하려고 힘쓴 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감상 과정이 개인적이 주관적인 것이라는 주장을 필자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감상 과정에서는 보편적인, 객관적인 요소도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적 정서적 반응은 아무리 단순하고 순간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는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거기에는 한 인간이 그 성장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밥은 윤리적, 문화적, 사회적…… 등등의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인 체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정감은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객관성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같은 복합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성립된 직관적인 대상의 인식에서는 메마른 논리주의자들의 분석에 의한 인식 이상의 깊이와 정확성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 이유는 직관적인 파악은 대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대상이 유기적인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작품인 경우에는 그렇다. 사실 문학작품을 지적인 분석에 의하여 여러 갈래의 부분으로 해체한 다음, 플롯은 어떻고 배경은 어떻고, 무엇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관찰한다고 하여 그 작품에서 유발되는 감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는 없다. 작품에서 유발되는 감동은 작품을 총체적으로 직관에 의하여 파악할 때에 비로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리 탁월한 이론을 원용하여 작품을 분석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일종의 관념유희로 끝나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다.(「문제의식만 앞세우는 비평문학」)
김교선이 강조하는 ‘감상’의 비평이 내포한 바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인용문에서 간취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가 과거의 감상비평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어떤 비평이건 간에 감상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으면 문예비평으로서의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본질적 차원에서 감상의 주관성과 객관성을 동시에 지적할 뿐이다. 그의 직관을 중시하는 관점은 문학작품의 온전한 이해를 위해 채택한 것에 불과하다. 작품의 감동을 미체험한 채 이론적 분석에 매달리게 되면 관념유희에 머물게 된다는 그의 주장은 문학교사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는 경험의 첫 인상으로서 직관을 중시했다. 예컨대,‘직관적인 파악은 대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거나 ‘작품에서 유발되는 감동은 작품을 총체적으로 직관에 의하여 파악할 때에 비로소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발언하여 작품의 객관적 분석보다는 직관을 통한 총체적 감상을 강조한 것이 그 보기이다. 이 지점에서 김교선과 심미주의의 공통점이 발생한다.
낭만주의에서 발원한 문학유기체설을 신봉하는 비평가는 심미적 태도에 입각하여 문학작품의 ‘감상’을 우선시한다. 그의 태도는 자칫 인상을 강조하는 듯 오해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김교선은 ‘인식 이상의 깊이와 정확성을 발견’하려는 자세로 “이미지의 조직에 의하여 표현된 사상”(「작가와 작가정신), 곧 ‘작가정신’을 찾아내는 일에 골몰할 따름이다. 이런 자세는 필연적으로 영도비평을 싫어한다. 그의 비평관을 가리켜 제자 천이두가 “평생을 대학 강단에 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속물적 현학 취미 내지 속류 아카데미즘이라는 것을 싫어한 데에 선생의 한 아이러니가 있고 또 선생의 진면목이 있다고 하겠거니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모든 문학을 일도양단식으로 재단하는 비평 혹은 생경한 어떤 외래의 이론적 도식을 앞세워서 작품을 그런 각도에서만 바라보는 비평이 허다하였던 우리 문단이나 학계의 그 동안의 환경 속에서 대상과 따뜻한 심정으로 만남으로써 그것을 심도 있게 이해하면서도 그 대상 속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법 없이 그 대상을 그 자체의 자리에 되돌려 놓고 바라보는 자세를 아울러 견지하여 온 선생의 그동안의 업적은 오늘에 볼 때 참으로 빛나 보인다”(「고독과 그 안팎」)고 평가하게 된 배경이다.
이와 같이 김교선은 강단비평가답지 않게 문학이론을 동원하여 작품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보고, 비평행위에 앞선 감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의 지적처럼 외국의 첨단 이론이 문학작품의 완전한 이해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에, 전적으로 이론에 근거하여 작품을 재단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김교선은 “외국문학의 새로운 사조나 방법을 도입하여 한국문학의 차원을 높이기 위하여서는 그 바탕에 한국문학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문학과 전통」)고 주장하며, 해방 후 이른바 ‘의식의 흐름’을 적용한 소설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라고 권한다. 그의 권유는 한국의 작가들이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문학 외의 현실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실정을 고려한 것이다. 당시 문단에는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으로 인한 폐해와 자본주의적 모순이 돌출하면서 인간의 내면의식에 대한 탐구보다는 리얼리즘에 기반한 소위 참여문학과 고발문학 등이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형편을 감안한 김교선은 한국문학의 과제를 “새로운 방법론의 도입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리얼리즘의 방법에 대한 재검토를 통하여 그 질적 차원을 높이는 데에 있다”(「한국문학의 방법」)고 제시하였다. 그처럼 그는 한국문학의 특수한 환경을 도외시하는 ‘메마른 논리주의자’이기를 거부하고, 직관에 의한 작품의 총체적 감상을 중요시한 비평가였다.
2. 불안문학의 계보화
해방은 비평계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했다. 정국은 이념에 좌우되던 판이어서 평단도 상위체제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좌우로 나뉜 평단의 양파는 자웅을 겨루어 평단의 권력을 선점하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평단은 이미 정치판의 종용에 따라 이념의 잣대를 비평적 심급으로 설정한지라, 광복을 맞은 환경에 어울릴 법한 문학의 본질적 국면이 거론되기는 난망했다. 곧이어 발발한 남북 간의 내전은 정치적 이념으로 사회의 전 국면을 포박해버렸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온전히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온몸에 각인한 채 전후의 고난을 이겨내고자 몸부림쳤다. 그들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일을 찾아 고민했다. 1960년대의 평단에 실존주의가 위세를 부렸던 저간의 사정이다.
김교선은 이런 비평적 환경 속에서 평단에 나왔다. 그의 등장은 자의 반 타의 반에 가까웠다. 국문과 교수라는 직업적 속성이 평단으로 그의 등을 떠밀었고, 황폐화된 평단의 사정을 마냥 외면할 수 없었던 식자로서의 책무감도 발동되었다. 그가 평단에 데뷔한 시대는 불법적으로 정권을 탈취한 군사독재정권이 반공을 빌미로 국민을 가르고 형벌하며 폭력을 행사하던 시기였다. 그에 따라 사회의 전 부문에서 숱한 갈등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양단으로 갈라져 다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와 같이 불안한 시국 상황으로부터 문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교선은 그 판국에서 이념적 논조를 멀리하고 작품 중심의 비평에 나섰다. 그것은 평생 동안 남 앞에 나서기를 삼갔던 성품과 함께, 앞서 언급했던 가족사적 비극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그의 비평세계를 조감할 적마다 기억할 일이다.
이런 요인들은 김교선으로 하여금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적 조건을 배후 장치로 에두르는 불안문학에 호의를 갖도록 이끌었다. 그가 데뷔작으로 「불안문학의 계보와 이상」(『현대문학』 1962. 2)을 썼다는 사실이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그는 이 평문에서 국내의 신진작가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던 서구의 불안문학을 계보학적으로 논구하였다. 먼저 그는 르네상스로부터 불안문학의 근원을 탐구하기 시작하여 대전 후의 전위적 문학운동까지 조감하고, 그 바탕 위에 이상을 한국 불안문학의 선구자로 위치시켰다. 구체적으로 김교선은 이상의 시 「거울」에 나타난 자아분열의 징후들을 찾아낸 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울 속의 나’를 모파상이 배우이기도 하고 관객이기도 한 ‘제이의 시각’과 결부시켰다. 계속하여 그는 이상이 「오감도」라는 시제를 지으면서 고의적으로 ‘조감도’의 ‘조(鳥)’ 대신에 ‘오(烏)’를 골라 사전적 의미를 우롱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 다다의 세계를 향한 야유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이상의 시편과 소설 등을 자세히 읽어서 자아의 끊임없는 불안한 증상을 찾아낸 결과, 이상이 ‘허탈의 세계’를 염원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서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결국 이상은 끝끝내 니힐을 초극하지도 정착시키지도 못한 채 이율배반적인 다각도의 분열, 갈등, 모순 속에서 ‘헤어날’ ‘길’ 없는 절망적인 ‘질주’의 고뇌를 못 이겨 전통과 양식을 또는 스스로를 야유, 우롱의 날카로운 비수로써 ‘상채기를 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작가였다. 그의 기존 질서에 대한 가치의 전도나 파괴가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날’ 곳(신 현실)도 제시하지 못한 채 끝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작가로서의 현대적 의의에는 자못 중요한 일면이 있지 않을까?(「불안문학의 계보와 이상」)
이상의 작가 생활은 4, 5년간에 불과했다. 단기간은 그가 작가로서 특기할 만한 전신 과정을 보여주기에는 미흡하다. 그러나 그가 활동한 기간은 일제의 군국주의화가 악화되던 무렵이었다. 이런 정치적 환경이 그의 사유체계와 행동방식을 옭죄어 문학적 다양성을 추구하기 힘들도록 억압했다. 그러다 보니 이상의 작품에는 김교선이 묘파한 대로 ‘끝끝내 니힐을 초극하지도 정착시키지도 못한 채 이율배반적인 다각도의 분열, 갈등, 모순 속에서 ‘헤어날’ ‘길’ 없는 절망적인 ‘질주’의 고뇌를 못 이겨 전통과 양식을 또는 스스로를 야유, 우롱의 날카로운 비수로써 ‘상채기를 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작가’로서의 한계가 배어 있다. 김교선은 이 점을 지적하여 ‘초기의 작품에서도 이미 말기의 작품에서와 다름없는 허탈의 세계, 삶에의 향수 또는 그 외의 온갖 그의 특징이 자아 해체의 작가답게 동거 상태로 동시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미완의 작가로서의 이상 문학이 함유한 특징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실 김교선이 실존주의를 숙주로 삼아 세력을 키운 불안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학창 시절부터였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읽은 안톤 체홉의 소설 「6호실」을 읽고 난 감동을 30년이 지난 후 평론 「현대적 배리의식의 원형」(『현대문학』, 1963. 7)에서 재론한 바 있다. 이 단편의 줄거리는 생의 의욕을 잃어버린 채 독서를 통하여 지적 위안을 받던 시립 정신병원장이 정신병자 청년과 지적 대화를 나누며 무료한 일상을 영위하던 중, 무지한 주변인들에 의해 정신병자로 낙인되어 6호실에 감금된다는 내용이다. 겉으로 보면 이 작품은 러시아 소설의 특장인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종횡한 듯하나, 병원장의 모습에서 인간의 천부적인 고독이 전경화되어 있다. 이것을 김교선은 독자들의 기대감을 배반한 ‘배리의식’으로 포착하고 “체홉의 「6호실」의 세계가 실존주의를 비롯한 20세기 불안문학 계열의 여러 가지 요소들의 원형으로서 이루어진 것”(「현대적 배리의식의 원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에 따라 김교선의 불안문학은 체홉, 사르트르, 이상 등을 아우르면서 하나의 계보로 정리된다.
나아가 김교선은 ‘자의식의 과잉’ 현상도 불안한 인간 심리가 표출된 징후로 받아들이고 최명익의 「장삼이사」를 논하였다. 그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근대문학의 제일의적인 정신이 인간성의 구명, 즉 자아의 모색에 있었다고 본다면, 자아 모색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자의식 과잉의 문학을 근대문학의 정통적인 계승에서 이루어진 결실로 생각할 수 있고, 따라서 현대문학의 주류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자의식 과잉의 표현」)고 말한 속에는 근대문학과 현대문학의 연결고리가 노출되어 있다. 그것의 중심은 ‘자아’이고, 근대문학에서 추구되기 시작한 ‘자아의 모색’이 ‘자의식 과잉의 문학’으로 계승되는 가교역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을 따라가노라면, 김교선이 근대 이후에 대두된 ‘자아’의 변주 양상에 비평적 노력을 쏟고 있는 줄 알 수 있고, 불안문학의 계보학적 고찰에 힘을 쏟은 동기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김교선이 역설하는 소설의 ‘현대성’은 임명진이 적절하게 지적했듯 “내용상으로 현대인의 불안‧소외‧절망의식에 관련되는 것이며, 형식상으로는 다양한 형식 요소의 복합을 통해 지성과 감성, 구상과 추상, 심상과 정경 등이 자연스레 융합하고, 또 거기서 형성된 이미지와 상징이 전체 구성 속에서 성층적으로 배열되어 구현되는 예술적 효과”(「소설의 현대성 탐구」)와 관련된다.
3. 관념소설의 옹호와 비판
나도향은 김교선이 관심을 기울인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나도향에 관한 최초의 논의 「자기증명의 소설—나도향의 작품세계」(『현대문학』, 1972. 5)의 첫 문장을 ‘1920년대 작가들 중에서 필자가 가장 매력을 느끼는 이는 나도향이다’고 적었다. 그가 주관적 언사로 시작할 정도로 나도향에게 매력을 느낀 까닭은 신문학 60년간에 걸쳐 생동하는 여인의 초상화를 그려 보인 작가는 그다지 흔한 것 같지 않다는 판단으로부터 기원하였다. 구체적으로 김교선은 나도향의 초기작에 출연한 여인들이 지닌 평면적 성격에 착목하여 「젊은이의 시절」의 ‘찬애’는 ‘마음씨는 부드럽고 학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만 표현되어 있다’고 비판하고, 「환희」의 ‘혜숙’은 ‘원근법이 없는 그림’이라고 혹평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에 비하여 「뽕」의 ‘안현집’이 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복녀’와 다르지 않은 창녀형 인물인 것이 사실이나, 둘은 따로 논의되어야 할 정도로 이질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교선은 복녀가 식욕과 성욕의 노예로 행동하는 피동적 인물인데 비해, 안현집이 타락하게 된 배경에는 환경적 요인만이 아니라 자발적 심리 상태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입체적 인물이라고 보았다. 또 그는 「물레방아」의 ‘방원의 계집’이 ‘안현집’에서 나아가 ‘싫은 것은 가슴에 칼날이 꽂혀도 싫을 따름으로 그 저항의 자세에서 낭만적인 영웅의 이미지 비슷한 것마저 풍겨지게 되어졌다’고 높이 평가하고, 그녀를 나도향이 완성한 여인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김교선은 나도향의 작품 속에 나오는 여성들에게 매혹되었던지 「나도향론—도향의 소설에서 표현된 여인상」(『광복 30년 문학전집』, 1975. 4)에서도 재론하였다. 그는 나도향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을 ‘그믐달’로 빗대어 표현한 자리에서 “그믐달은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므로 그믐달이야말로 “나도향의 미의식의 표상이자 그의 이상적인 여인상의 상징”(「그믐달」)이라고 뜻매김하기도 했다. 그는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그믐달에서 ‘미의식’과 ‘이상적인 여인상’의 모습을 찾아낸 나도향을 일러 “내성적인 지적인 성격의 작가”(「자기증명의 소설」)라고 단언하였다. 이처럼 그는 나도향에 대한 그의 평가는 일관되게 긍정적이다.
위의 여성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함께, 김교선은 나도향의 가작 「벙어리 삼룡이」를 1920년대의 대표적 관념소설로 높이 친다. 김교선이 일찍부터 찾아낸 ‘도향 문학의 진수’가 함의한 비평사적 의미는 참신하고 진보적이었다. 그는 후기에 발표한 평문에서도 「벙어리 삼룡이」를 애정소설보다는 관념소설로 분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되풀이하였다.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 가장자리에 엷게 나타났을 뿐이다”라는 구절에서 작자가 이 소설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그것은 현세적인 이욕도 타산도 초월한 절대적인 순수한 사랑이다. 그리고 죽음과 맞바꾼 순간에서 얻어진 영원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는 가능할 성싶지 않은 초현실적인 꿈이다. 말하자면 작자가 여기에서 표현하려고 한 것은 현실 자체의 실상이 아니고 세속적인 현실의 추악성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그것을 초극한 이상적인 세계를 갈망하고 그 꿈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시적인 세계가 아니고 작자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불가시적인 세계다. 이처럼 불가시적인 관념을 표현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필자는 이 작품을 관념소설이라고 한 것이다.(「관념소설로서의 『벙어리 삼룡이』」)
김교선은 나도향이 장치한 서술 기법들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관념소설의 성격을 규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작가가 ‘그 집에는 삼룡이라는 벙어리 하인 하나이 있으니 키가 본시 크지 못하여 땅딸보로 되었고 고개가 빼지 못하여 몸뚱이에 대강 이를 갖다가 붙인 것 같다’고 삼룡이의 외양을 묘사한 대목과 새아씨의 남편에게 철없고 포악한 성격을 부여한 인물 설정 방식이 주제의 드러남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새아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삭제된 이유인즉, 그녀에 대한 삼룡의 동정은 남편의 박해로 파생된 것이므로 굳이 외면의 묘사에 비중을 두지 않아도 무방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현세적인 이욕도 타산도 초월한 절대적인 순수한 사랑’이라는 관념적 주제를 오달지게 형상화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김교선의 나도향에 대한 재평가는 소설사적 측면에서도 괄목할 만하다.
그와 함께 김교선은 ‘불가시적인 관념을 표현’하는 관념소설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을 전후 유행하기 시작한 관념소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작품을 높이 산 이유에 대하여 그는 ‘소록도가 지니고 있는 의미’, ‘작중인물들이 지니고 있는 의미’, ‘복합적 작중 현실이 지니고 있는 의미’, ‘물음에 물음을 거듭하는 형식’의 네 가지를 들었다. 이 가운데에서 김교선은 특히 ‘물음’에 관심을 표명하고, 그것을 관념소설의 성공 여부와 관련지었다. 그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관념의 대변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현실의 인간으로서의 요소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물들끼리 심리적 갈등과 변화를 거듭하면서 현실성을 획득한 점을 높이 쳤다. 그에 힘입어 그들이 제기하는 각종 ‘물음’들이 현실과 유리된 추상적 관념의 놀이가 아니라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뇌를 담보하여 진실성을 제고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있어서의 ‘물음’의 형식이 이 같은 성격의 것이므로 독자들도 던져지는 ‘물음’을 추적하면서 스스로 그 해답을 모색하여 보는 형태로 이 소설을 읽게 되는 것”이고 “이 같은 모색의 흥미가 ‘물음’의 형식이 지니고 있는 소설적 흥미이며, 또 이 소설에 있어서의 흥미의 핵심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이 같은 흥미는 소설이 지녀야 할 가장 본질적인 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관념소설론」)이다. 그와 달리 한국의 관념소설은 아래와 같은 네 가지의 병증을 거느리고 있어서 문제이다.
(1) 관념을 구상화하기 위한 작중 현실을 우화적인 성격의 것으로 구성하고 있다. 손쉬운 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같은 경우 작중 현실이 지니고 있는 리얼리티는 희박한 것으로 되어버리기 쉽다.
(2) 등장인물들이 관념의 모형 노릇을 하고 있다. 살아 있는 현실적인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이나 발언에서는 진실감보다는 부자연한 것을 느끼게 된다.
(3) 작중 현실 자체 속에서 결과적으로 관념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등장인물의 진술에 의하여 그것이 표현된다. 이 같은 경우 소설이 아니라 웅변이나 세미나의 형식에 가까운 것이 된다.
(4) 표현된 관념이 심리적인 굴절을 통하여 얻어진 체험적인 진실이 아니고 어떤 지식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념은 독자의 감정에 침투될 수 있는 힘이 없다. 지식은 감정에 침투될 수 있는 속성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지식으로서의 형태는 곧 상식적인 것으로 되버린다. 지식은 일반적인 통념 형태이기 때문이다.(「관념소설론」)
김교선은 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각각에 대응하는 작품들을 예시하였다. (1)과 (2)의 해당 작품은 장용학의 소설 「미인 탄생」이다. (3)의 예작으로는 최인훈의 「주석의 소리」, 「총독의 소리」, 장용학의 「요한시집」 등이다. (4)에는 김성한의 「오분간」과 (3)에서 든 최인훈의 작품들이 해당한다. 이런 논의는 김교선이 관념소설의 추이에 대하여 면밀하게 관찰하고 주밀하게 조감하고 있었던 줄 알려준다. 그가 이청준의 소설에 누적적으로 관심을 표한 것은 바로 위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관념의 지나친 노출을 자제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관념이 체험적 진실을 육화하지 못하게 되면 인물 상호간에 발생하는 심리적 역학관계를 제대로 구현하기 힘들다. 김교선이 이청준의 소설을 논하는 자리에서 굳이 관념소설의 문제점을 거론한 이유인즉, 작품 속의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사회적 갈등 사태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관념의 실체를 적확히 드러내고 싶은 의도였다.
4. 지역 작가에 대한 애정
김교선은 전북 출신 작가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자세는 지역의 대학에 봉직하는 비평가-교수라면 마땅히 지녀야 할 윤리적 자세이다. 그는 거주하는 지역의 문학 담론을 선도하여야 할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부여받았다. 의무는 식자로서 가져야 할 도리이고, 권리는 비평가가 행사해야 할 선택의 논리이다. 그의 활발한 비평 활동이 지역 작가들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고 격려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김교선이 지역 작가들에게 소홀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런 차원에서 가볍게 평가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비평적 도움은 윤흥길, 박상륭, 이정환, 최명희, 신석상, 서정인 등에 집중되었다. 면면을 보면, 모두 문단에 갓 나타난 신인급 작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이정환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지, 그는 작가론 1편과 작품론 2편을 남겼다.
이정환은 전주 출신의 소설가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전주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느 소년들과 다를 바 없이 자라던 그는 1950년에 전쟁이 터지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면서 인생사에 사달이 나기 시작했다. 포항에서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그는 이듬해 임시휴가를 얻어 집에 들렀다가 위중한 모친을 간병하느라고 귀대일을 넘겨 탈영병으로 전락하였다. 12월에 무기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에 1952년 2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1958년 재심으로 7년형으로 형기가 줄어들자 그는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년간의 군대 생활과 7년의 영어 생활은 그의 행동거지를 평생 동안 구속하였다.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부모의 서점을 이어받아 경영하는 한편, 소설 습작에 전력하여 1969년 대표작 「영기」로 『월간문학』에 입선되었다. 이정환은 계속하여 소설을 쓰며 1970년대의 문단에 문명을 알렸다.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간 현실을 다양한 복합적인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은 작자의 성격이나 교양과도 관계되는 것이겠지만, 그의 현실적인 생활 체험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는 서재 속에서 인생을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반생은 옥중에서 또는 서민층의 살기 위한 아우성 속에서 그들의 일원으로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방관적인 자리에서 인간 현실을 관조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현실의 생태를 그 자체대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상한 바와 같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나 복합적인 이해가 성립된 것이다.(「이정환론」)
인용문은 김교선이 발표한 세 편의 이정환론 가운데 소설 「독보꿈」을 다룬 대목이다. 이 작품은 무기수로 독방에 갇혀 있는 소년수의 옥중기이다. 소년은 최소한의 자유조차 차압당한 공간에서 변기통을 디딤돌로 삼아 창문 밖의 팽나무, 까치둥우리, 하늘, 구름 등과 대화를 시도한다. 그는 두꺼비를 발견하고 자신의 방으로 ‘기어와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가 미물의 출현에도 감격에 겨운 것은 전적으로 죄수의 신분으로부터 온 것이다. 김교선은 이런 감동적 장면을 재현해 낸 작가의 체험에 주목하였다. 이처럼 그는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 수준에 만족을 나타내면서 “이 소설의 작중 현실은 독자들의 예측을 불허하는 사건 전개와 고조된 긴장감을 얻을 수 있게 되”(「이정환의 소설」)었다는 평을 이어간다. 더하여 이정환의 장편소설 『샛강』을 일러 “인간 생활에 있어서의 착잡하고 모순된 양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전체적 현실의 표현」)고 높이 평가하는 등, 김교선은 이정환에 대한 긍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시선은 윤흥길을 향해서도 여일(如一)하였다.
소설은 그 표현 기술로서 축조적인 서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입체적인 구성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독자들은 동시적 파악 형태로 그 전모를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축조적인 향수 형태에 의하여 얻어진 이미지를 차례로 쌓아 올려 끝맺음에 이르렀을 때 그 총체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문장력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 귀절 한 귀절의 표현에서 조잡한 것을 느끼게 되면 그 이상 읽어 나갈 흥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 있어서의 디테일의 표현은 한 귀절 한 귀절에서 밀도감이 풍겨지는 좋은 것이었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사물을 보는 눈, 감상이나 관념의 장막으로 가리워지지 않은 냉철한 심리 파악, 어둡고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풍요한 상상력…… 이런 요소들에 의하여 이 작품의 디테일은 이루어지고 있었다.(「기대되는 신진의 작품」)
윤흥길의 소설 「황혼의 집」을 논한 월평의 한 대목이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동족상쟁으로 말미암아 파생된 비극사의 한 단면을 취급하였다. 작품의 배경은 공비가 출몰하는 정읍이다. 작가는 미치광이 엄마, 목맨 언니, 빨치산이 된 오빠 등을 둔 비정상적 가정에서 자란 표독한 ‘경주’를 내세워 전란의 포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김교선은 이 작품의 의미를 ‘축조적인 향수 형태에 의하여 얻어진 이미지를 차례로 쌓아 올려 끝맺음에 이르렀을 때 그 총체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는 것’에서 찾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작가가 소년을 서술자로 설정한 전략이 비참한 이야기를 기괴한 양상으로 얽어냄으로써 전쟁으로 인한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교선은 틈 날 적마다 지역 작가에 대한 관심을 표백했다. 그의 평문들은 전북 출신 작가라는 지연을 초월하여 당대의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바로 매겨준 것이라서 값지다. 그것은 비평적 지원을 입은 작가들이 하나같이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한 것만 보더라도, 그의 비평적 혜안이 탁월했던 줄 알 수 있다. 김교선의 비평적 행로는 지역 작가들을 소홀히 취급하는 비평가와 연구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Ⅲ. 글과 인품의 일치
김교선은 1954년 전북대학교에 부임한 뒤로 줄곧 전라북도의 평단을 견인한 선구자였다. 그는 해방 이후에 국어국문학과의 교수 내용을 체계화하는 일에 앞장섰을 뿐더러, 천이두를 비롯한 비평가들을 길러내는 일에도 팔을 걷어붙었다. 그의 헌신은 앞장서 공치사하기를 거부하고 뒷자리에서 묵묵히 도와주어서 더 빛났다. 그는 이론 중심의 ‘메마른 논리주의자’를 지양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실천비평에 치중하면서도 한국문학사적 전통이 훼손되지 않도록 세심했다. 이런 자세는 그의 인품에서 남상한 것이라서 글과 인격의 일치를 보는 듯하다. 그에 관해서는 그의 중등학교 재직 시절부터 직장 동료였던 송준호의 회고담이 제격이다.
야천 선생이 국문학과에서 20여 년 동안이나 과의 기둥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과의 어른으로서 지극한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그 연유는 어디까지나 선생의 인격과 학문의 차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선생은 범사에 사리가 분명하고 비리 앞에 의연하며 속된 타협을 모르고 사는 분이다. 그러나 선생은 또 언제나 조용하고 원만하며 그 누구와의 사이에도 모가 나지 않는다. 국문학과는 대학교 내에서도 특히 교수간의 분위기가 좋고 가족적이며 그러면서도 매사에 원칙과 질서가 존중되는 학과로서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와 같은 과풍의 토착이 야천 김 선생의 존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들 주위 사람들은 다 잘 알고 있다.(「야천 김교선 선생과 나」)
Ⅳ. 김교선(金敎善) 연보
1912. 10. 26 함남 함흥시 황금정 3정목 131번지에서 아버지 김돈희(金暾熙)와 어머니 주홍자(朱弘子)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32. 3 함흥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1937. 3. 5 함흥 출신 최두선(崔斗先)과 정국신(鄭國神)의 3남 1녀 중 장녀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최정희(崔正姬)와 결혼
1938. 3 일본 호세이 대학 문과 졸업
1940. 4. 23 장녀 춘이(春伊) 출생
1948. 4. 6 차녀 진이(辰伊) 출생
1950. 10. 1 부친 별세
1951. 7. 4 3녀 남이(南伊) 출생
1951. 11 남풍동인회 결성
1954. 2 가람동인회 결성
1954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부임
1957. 9. 16 장남 정민(正珉) 출생
1959. 12 ‘전북문인의 집’ 대표간사, 전북문인협회 고문
1962 문학평론 시작
1972. 1 월간 『현대문학』 제18회 평론 부문 신인상 수상
1972. 5. 1 국민훈장 목련장 수장
1972. 11. 25 등단 10주년 및 회갑 기념 비평집 『소설의 이해와 평가』(형설출판사) 출간
1977. 10 전라문학회 고문
1978. 2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정년퇴임
1978. 3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부임
1987. 2 전주대학교 객원교수 퇴임
1989. 12. 27 전라북도 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전라북도지사)
1992 제1회 목정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
1996. 9. 20 『관념과 생리』(신아출판사) 출간
1997. 9. 29 모악문학상 수상
2006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