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늙지 않는 소년, 천생 예인 김기홍
그러나 청년기에, 삶에 대한 회의와 고뇌의 시간이 찾아왔고 그 해결책이자 대안으로 여겨 전북대 기린극회에서 처음으로 연극을 접하고 졸업 후 73년부터 본격적으로 연극에 발을 디디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인생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받고 고락을 같이 할 선배를 만난다. 문치상선생이다. 이력 중 상당 부분이 그의 발자취를 좇아간 것이 이를 증빙해 준다 하겠다. 전북연극협회장, 전주예총회장, 동화기념사업회 이사장 등이 그 예이다. 그의 삶은 취업과 결혼을 기점으로 크게 변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시각과 귀가 열리면서 여자가 사랑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봄볕에 올라온 작은 노란 니숭개꽃 같이
또는 나비같이 한들거리는 사랑의 물체로 보여 옛날의 여자를 대하던 물건 ‘그저 물건’이라는
생각은 멀리멀리 사라져 가고 아름다움만이 보이기 시작 하더라’
그 주인공이 바로 박인숙 여사였다. 그는 연극으로 위로를 받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며 종교와 여인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
결혼 즈음 보다 많은 인연들이 생겨나고 그로인해 언제나 미소 지으며 사람 좋아하던 성품에 맞게 그를 찾는 사람들도, 자리도 많아졌다. 곁에는 늘 믿고 마음 통하는 선후배들이 득시글했고 공통된 관심사가 많은 예술계 전반에 걸친 술친구들이 넘쳐났다. 그들의 단골집은 허름한 막걸리 집들이었고 초저녁에 시작된 술자리는 밤이 이슥하도록 끝날 줄 모르기 일쑤였다. 성은여고 재직시 1975년에 ‘비사벌극회’를 창단해 대표와 지도교사를 역임했고 88년까지 이어지는 10여 년 동안 단지 사명감으로 전주시립극단 서형화 단원 등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으며, 문치상, 금파, 이기수, 서재균, 조규화, 안도, 김득남, 류영규 등 전북예술계의 대표적 인물과 더불어 전북연극계와 예술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이때의 예술인 사이의 조합과 협업이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것은 곤궁한 서로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고 조건 없이 서로를 도우려고 거의 무료봉사인 품앗이를 했다는 것이다.
이후 그의 행보는 1983년에 극단 갈채 대표, 전북연수회관 대표로 이어지고, 마침내 전북 연극을 대표하는 수장 직에 이르게 된다. 전북연극협회장직을 13대(1984~85)는 대행 체재로, 14대(1986~1988)는 온전하게 역임했고, 그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다시 16대(1992~1994)회장으로 부름을 받는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전북연극상 제정, 제5회 전국연극제 유치(1987), 대학연극제 제정(1997) 등의 굵직한 사업들을 성실하게 제정 및 수행하였고, 전국연극제에서 두 차례나 대통령상을 수상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16대 회장 시절이기도 한 93년에는 전주예총의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전주예총 태동에 산파역을 맡았으며, 이후 전주예총회장(1996~2000)에 취임해 전주 덕진예술회관 지하에 예총사무실 마련, 전주예총의 정관과 규정 정비, 한지공예대전, 종이축제, 완산벌 축제의 확고한 기반 조성으로 이어진다. 96년에는 아동문학평론 신인 문학상 당선을 계기로 문단에 등단해 그야말로 당시 전북예술계의 핵이라 할 만한 활동을 하였다. 거기에 더해 전주일보 문화사업국장,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니 언론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호인에, 예인에, 언론인에, 리더로서의 역할을 다한 문화예술 행정가이자 경영인이었던 것이다.
그의 청년기는 방황과 고뇌의 연속이었다.신문에 기고했던 그의 글에서 그 정도를 유추해 볼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가의 시각은 세밀한 관찰력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식물과 동물의 상태를 자주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또 작가는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고 했다.
또 별짓을 다 해보았다.
솔직히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보았는데 한 가지 해보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지노릇이었다.
어떤 해괴망측한 일을 했어도 왜 거지노릇은 못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생배(억지로 굶는 일)를 곯아 본 일이 있어 이것으로 그 일을 대신했다고
자위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형색만 거지가 아니었지 몰골과 정신은 거지였다.
정말 배가 고파서 일어나지 못한 때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때의 설탕물 한 사발은 마치 구세주 같았다.
찬물 한 모금이 목구멍에서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순간의 느낌은 맨살에
생채기를 내는 아픔에 따라 그 맛이 더할 나위 없다.
위에서 출렁거리는 물소리는 어떤 멜로디보다 경이스러워 스스로 놀라면서
저절로 신이나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명상에 잠기는 시간으로 들어가곤 했다.
이 방황기에는 생호밀을 비벼 알호밀에 피라미를 섞어 입속에서 우물우물 씹어
삼켜 보기도 했다. 이것을 씹어 삼키고 나면 입속은 그야말로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 냄새를 없애기 위해 모래로 입속을 문질러 보고 쑬을 뜯어 닦아 보기도 하고
별별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그 역겨운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소금이라는
것을 사용해 소금의 신비함을 느낄 때쯤 되니 나의 청년시절은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스스로 터득해 본 것이 지금은 큰 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시절이 나에게 없었다면 청년시절은 술과 여자 그리고 친구 이렇게 무의미하게
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연극인들은 역할과 집중을 위해 수많은 관찰의 시간을 토대로 모방을 꾀하고 거기에 자기만의 특색을 덧입히곤 한다. 직접경험이 없을 때는 간접경험이라도 차용하여 맡은 바 역할에 부여한다. 그는 어릴 적 주변 환경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었고, 이내 동화되어 아직 무언지는 모를 표현 욕구를 잠재워왔고 이를 이질적인 타인의 삶에 투영해 보려고 청년초기에 연극이라는 장르에 노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증폭되어갔고 마침내 중년에 이르러 문단의 두터운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이후 직접 가르치거나 연극 작업에 참여하는 것보다 예술 행정가로 리더로 자리를 매겨가고 그의 마음을 올곧이 표현할 수 있는 창구인 동화가 교육의 수단으로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는 믿음 하에 정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륜이 쌓이면서 아동문단에 등극하고 동극과 동시까지 잰 걸음으로 영역을 넓혔던 것이다. 86년에 한국아동문학평론 동극 부문에 당선되며 시계들의 합창, 사랑의 종소리,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봄이 오는 소리 등의 작품들을 쏟아낸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다. 날개를 단 것이다. 그의 말을 다시 빌리면 ‘김기홍은 연극이나 교육에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음악적 감성에도 남다른 데가 있고, 만약 동극을 쓰게 된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음악적, 미술적 재질을 한껏 발휘해 다양한 모습의 문학예술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작가 김기홍은 내재되어 있던 기질로 수많은 동극을 거침없이 써 내려갔고 그 결과 어린이들에게 많은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을 남겼고, 그 작품 일부를 교육자들이 교육 자료로 쓰는 결실을 맺었다.
조금 늦었지만 그 재능을 알아보고 길을 이끌어준 타인의 객관적이고 따뜻한 시선과 격려가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이고 무엇을 해도 늘 목말라했던 영혼에 단비를 내려준 고마운 분이었을 것이다. 세상사가 다 그렇겠지만 특히 예술계는 잠재되어 있는 재능을 발견해 주고 제대로 된 길을 열어주는 참된 선생이 중요한데 이 경우가 그것에 해당한다 하겠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김기홍 동화집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중에서 책을 내며 한 그의 말을 인용해 그를 짐작해 본다.
-책을 내면서-
오염되지 않는 생수 같은 생각으로
지금 우리는 물질만능주의에 속해 살고 있다.
특히 이런 가운데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진부한 생활인지 다시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황금빛에 눈이 어두워 그곳으로만 쏠려있는 이때 장마철 5,6월.
책상머리에 앉아 원고지나 컴퓨터 자판기를 끼고 있다는 것 황금을 좇아 온 영혼을
팔러가고 있는 자들에게는 한심하고 요즈음 말로 아날로그시대보다도 더 오래된
진공관시대 사람이라고 비아냥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꿈을 꾸고 산다.
항상 철없는 청소년과 어린이들처럼 공상의 나래를 펴서 환상의 세계를 날고 있다.
그러나 한편 전 세계와 유럽을 강타하는 K-POP과 같은 그런 충격은 안 될지라도
나의 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벗는다. 나의 발가벗은 몸뚱어리를 보이는 것은
그런 몸매가 아니라 멋진 근육질과 섹시함을 보여주기 위해 조그만 멍석을 펼쳐
보이는 심정으로 전라북도의 지원을 받아 세상에 내보인다.
앞에서 밝힌바와 같이 K-POP이 뒤흔드는 시대에 이런 이야기가 먹힐 거라는
생각보다는 청소년들의 꿈과 도전을 위해 오염되지 않은 생수 같은 생각으로
써본 이야기들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어떤 한 대목이라도 공감되기를 원한다.
우둔한 나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 책을 낼 수 있는 힘을 주신 나의 주 하나님께
먼저 감사와 찬송 드리고 또 무더운 여름 목회하기도 바쁜데 졸작의 축하 글을
써주시기 위해 시간을 할애한 희년교회 강순홍목사님과 이 졸작을 평해준 나의
영원한 벗 안도 전북PEN회장님께 감사드리고 또 내 사랑하는 박인숙여사와
출간에 맞춰 태어날 나의 친손자(태명 다우와 캐나다에 사는 외손자 재현, 다현)
에게도 축복을 돌린다.
위의 글에서 보듯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그런 사람. 도의 지원이 있었음을 당당히 밝히고 하나님과 목사님께 감사드리고 큰 문인이자 친구인 안도 회장에게도 잊지 않고 고마움을 챙기는. 결국에는 사랑하는 처자와 손주들까지 축복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1991년에는 ‘인정모아 화합체전, 정성모아 알뜰체전’의 구호 하에 치러진 도민체전과 함께 한 전라예술제의 하이라이트였던 전라관찰사 행사에 금강문화원연구원장의 직책을 달고 연출자로 맡은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1993년에 처음으로 행사를 치른 전북소극장연극제 또한 그의 임기 중에 시작된다. 전라북도 연극제와 더불어 이 지역의 대표적인 연극 축전으로 자리잡아갔고, 8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연극단체의 출현은 소극장 연극제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회장 재임 시기에 많은 극단이 출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1992년 뮤지컬 전문극단을 표방하고 나선 「디딤예술단」은 「파랑새」를 창단공연작으로 하여 전주 연극무대의 다변화와 활성화를 촉진하였다. 1993년 9회 전북연극제에는 어려운 형편에도 연극제 실시 이후 가장 많은 극단들이 참가하여 주목을 받았다. 전주의 「디딤예술단」 「황토」 「창작극회」 익산의 「토지」가 참가하여 자유 경선을 실시한 결과 창작극회의 창작 초연극 「꼭두, 꼭두!」가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이 작품은 제11회 전국연극제에 참가하여 최우수상과 연출상을 수상함으로서 전북 연극계 사상 대통령상 3회의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임기인 1994년에는 전북 지역에서 30여 편의 공연을 올려 전북 연극계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었다. 사회적으로 혼란했던 1980년대 초반 이후 80년대 내내 줄곧 민주화 과정의 진통을 겪으면서 전북 연극계에는 수많은 극단들이 생성되어 활기를 띠었다. 이 시기에 줄잡아 30여 연극 단체가 생김으로써 양적으로 풍성한 연극 활동을 보였으며 연극인들의 의욕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왕성했다. 이처럼 수적으로 풍요로웠던 극단들의 태동은 1970년대 대학극의 활발한 전개를 그 배경으로 삼아 이루어졌다. 특히 1970년대 말엽에 발족된 대학연극협의회는 대학 연극인들이 졸업 후 일반극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학연극협의회의 발족에도 김기홍의 커다란 공헌이 있었음을 밝힌다.
한편, 1980년대 들어 주목할 일은 관립연극단체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역시 김기홍회장의 임기 중인 1985년 4월 19일 정단원 30명과 연간 1,500만 원의 예산을 가지고 창단한 전주 「시립극단」은 전주 시민의 날인 풍남제 때 마당놀이 「대춘향전」을 창단공연으로 올리며 처음으로 가시적인 활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극단들이 1, 2편의 공연으로 해체되곤 했던 시절에 창단된 「시립극단」은 세간의 연극인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전주 이외의 지역으로 익산, 군산, 남원 등의 연극 활동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전주 「월이소극장」에서 「푸른무대」라는 극단명으로 「오해」를 공연하며 출 발하였다가 1987년 익산 뉴타운 백화점 문화센터 상설극단으로 「토지」(土地)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다가 출발한 지 8년 만에 거듭나기 위한 자구책으로 극단명을 「솜리사람들」로 바꾸면서 새로운 의지를 다짐하였다.
군산 지역의 연극도 익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연극사적 맥락 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익산의 경우처럼 1920년대의 소인극과 해방 전후의 신극운동이 있었지만 6·25동란을 거치면서 오랜 시기 동안 소강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 군산 연극지부가 창립되면서 군산 지역의 연극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부의 산하 극단으로 1985년에 창단한 「동인무대」, 1985년 9월에 창단한 「탁류」, 「갯터」 등 3개 극단이 임기 중에 창단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남원은 1981년에 시로 승격했지만, 인구나 산업면에서 연극의 자생적인 활로를 개척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임에도 불구하고 1986년에 연극에 관심 있는 현직 교사들을 규합하여 극단 「둥지」를 결성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남원 연극을 발아시켰다. 극단「둥지」가 탄생되면서 한국연극협회 남원지부가 발족되어 연극 활동을 활성화시켜 나갔다. 그들은 「방황하는 별들」을 출발로 해서 적지 않은 공연을 하면서 연극의 불모지였던 남원 지역에서 연극예술의 싹을 틔우게 된다. 임기 중에 지부 설립을 도와주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임기 말년인 1994년에는 박동화연극상을 제정하여 제1회 수상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당연하였지만 1회 수상자는 문치상 선생이었다.
마지막으로 김기홍의 절친인 국제 펜클럽 전북위원장이자 전 문인협회회장, 전북대 평생교육원 교수 안도님의 그에 대한 평과 지지 글을 올려본다.
장로가 들려주는 동화
김기홍은 무주 괴목에서 일찍이 전주로 나오신 아버지 덕택에 촌뜨기를 면하고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전주에서만 생활했다.
김기홍은 일찍이 대학시절 박동화 선생님의 문하에서 연극수업을 쌓아오다가
비사벌예술학교부터 성은여고에 이르기까지 10여 년을 근무하면서 연극부를 창설하여 전북청소년연극제를 비롯하여 서울 동랑연극제 등에서 굵직한 상을 휩쓸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비사벌 연극반은 전라북도 고등학교 연극반의 효시로 알고 있다.
이후 전북연극협회지회장, 전주예총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아동문학평론에서 동화로 등단 하여 아동문학가로 활동하며 1996년 동극집‘사랑의 종소리’를 출간하였으며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금번에 동화집 ‘그래 나도 할 수 있어’를 상재하였다.
김기홍은 비교적 부유한 딸부자집에서 아들로 태어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유분방하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는 김기홍하면 술이 바로 떠오를 정도로 술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예술적 모태가 되었다.
여러분도 동의하겠지만 술과 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비주류들은 ‘술’을 유해물질로만 생각하며 ‘술 문화’할 때 으레 등장하는 왁자지껄하고 반윤리적인 그림을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술’은 곧바로 문학이요, 사람냄새가득하고 풋풋한 살가운 친구가 된다.
그리움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요 하늘의 뜻을 은밀하게 헤아리는 도반(道伴)이다.
이러한 속에서 연극과 문학이라는 예술의 세계를 넘나들더니 어린 시절부터 몸에 베어 흐르는 기독교로 귀의하여 현재 희년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다.
이번 출간하는 그의 동화집은 장로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태들을 글로써 엮어냈다.
교회의 장로로서 그려내는 신앙의 다양한 모양들에 대한 기대감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아동문학은 한 시대를 조망하고 다음 시대를 열어가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 서 그 무게 또한 가볍지 않고 관심을 가지게 한다.이 동화책은 할아버지가 새로 태어날 친손자(태명 다우)에게 들려줄 이야기다.마치 할아버지가 손자와 나란히 누워서 밤하늘 을 함께 바라다보며 가만가만 들려주는 얘기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김기홍 의 피 속에는 민족적 향토적인 숨결이 살아있다. 또한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모나 지 않고 둥글둥글한 원만한 성격이다. 남들과 사소한 일로 잘 다투거나 지나친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고립되기 쉽다. 물 흐르듯이 유연하고 원만한 성격이야말로 적을 만들지 않으며, 마음 맞는 동지를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는 원천이다. 이런 인간관계의 조건을 두루두루 갖춘 친구가 바로 인간 김기홍이라고 감히 일필한다.
김기홍 약력
-생애-
1946. 전주시 진북동 출생
2022. 작고
-학력 및 경력-
1972. 전북대학교 농업경제학과 졸업
1973-1988 전주성은여자고등학교 재직
1983-1988 극단‘갈채’ 대표 역임
1983 전북연수회관 대표 역임
1984-1985 제13대 전북연극협회장
1986-1988 제14대 전북연극협회장
1989-1991 전북예총 부설 편찬실 재직
1989-1993 (사)금강문화연구원장 재직
1992-1994 제16대 전북연극협회장
1996-1999 (사)한국예총 전주지부장
2014-2019 (사)동화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수상내역-
1986. 6 한국아동문학평론 동극 당선
1984. 12 전라북도문화상 수상
1985. 5 문교부장관 표창
1989. 8 한국연극예술상 수상
1996. 6 전주시민의장(문화장) 수상
2005. 6 박동화연극상 대상 수상
-저서-
1986. 시계들의 합창
1996. 사랑의 종소리
2011. 그래 나도 할 수 있어
-그 외.-
봄이 오는 길
로미오와 줄리엣 번안(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