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문화재단

검색
전주문화재단 전북 춤 뿌리를 찾아온 여정, 문정근 | 자화상
전주문화재단 전북 춤 뿌리를 찾아온 여정, 문정근 | 자화상
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제목

전북 춤 뿌리를 찾아온 여정, 문정근
  • 2023-04-20 17:18
  • 조회 910

본문 내용

 











전북 춤 뿌리를 찾아온 여정, 문정근





김미진(전북도민일보 문화교육부 부장)

 

 

 

 

춤을 인연이자 삶이라 생각하는 문정근 명무에게 승무를 추는 것은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는 일이다. 세상사 모든 번뇌와 욕심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없는 잔잔한 텅 빈 마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사소한 욕심을 내어보기도 했으나,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다독이고 수련시켜주며 참된 인간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주는 승무가 그냥 좋았다. 한국무용의 많은 선택지 중에서 왜 승무를 택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못난 얼굴을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그 누구보다 진지하게 승무를 공부하고 파고들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다.

 

 

승무는 인간의 삶 속 고뇌를 장삼이라는 옷을 빌려 입고 표현하는 춤이다.”


흰 장삼을 입으면 마치 학이 된 것처럼, 혹은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고깔은 쓰면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주변의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내면의 한에 빠져들게 된다.”


흰 장삼을 허공에 뻗으면 만들어지는 선, 곡선, 그리고 큰 원이 우주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마치 큰 기운이 만들어졌다가 흩어지는 느낌이다.”


장삼 안에서의 움직이는 내 모습은 무슨 베일에 싸여 수줍게 내 마음을 표현해주는 것만 같다.”

 

 

승무라는 두 단어만 들어도 설레는 듯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문정근 명무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일도 버거웠다. 그런데 그 표현력이 어쩌면 그렇게 찰떡인지 마치 그가 승무를 추고 있는 장면을 직관하고 있는 것만 같아 흥미로웠다. 확실하게 그는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았다.

 

문정근은 6.25전쟁 직후, 19527남매 중 다섯 번째 아이로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완주군 조촌면 용정리(현재는 전주시 용정동으로 편입).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지었고, 열대여섯 명이 한집에 모여 산 대가족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았다.

 

어린 시절 유독 노래 부르기와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동네에서 이미 알아주는 예술인이었다. 누나하고 세 살 터울인데 학교에 일찍 들어갔다. 누나의 책가방까지 빼앗아가며 학교에 보내 달라고 떼를 쓰는 아들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당시 친구 사이였던 학교 교장에게 특별히 부탁해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손에 쥐어 주고는 정식 입학도 하지 않은채 그가 등교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예회가 열렸다.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선생님께서는 여학생과 듀엣 무대를 시켰다. 도라지라는 민요에 맞춰서 율동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사실상 데뷔 무대였다. 문정근 명무 또한 그 학예발표회가 제 인생에 크게 작용해 지금까지 춤추고 있는 것 같다면서 그때부터 춤의 매력에 빠져서 운명처럼 이 길을 개척해 온 것 같다고 회고한다.

기억에도 없던 3~4살 무렵엔 할머니를 따라 동네 마실을 나가면 그렇게 춤을 추곤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는 여동생 또래의 동생들을 마을 어귀에 모아놓고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에 맞춰서 춤을 구성에 가르치기까지 했다. 예능 분야에 있어서는 타고났던 셈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족의 끼를 물려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부유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아들자식에 대한 교육열이 남다르셨던 아버지, 그리고 동네에서 농악을 하면서 상모를 돌리면서 소고춤을 추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형제들은 노래도 제법 잘 불렀는데 그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터다. 가수 현인과 똑같은 목소리로 작은아버지가 집 툇마루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모습이 선연하다. 작은아버지는 그를 앉혀놓고 자주 노래를 가르쳐주곤 했다. 종친회에서 집안 식구들이 버스를 타고 어디 멀리 가는 날이면 노래가 끝나지 않았다. 그 또한 가수 이미자와 가수 현미의 히트곡을 잘 불렀다.

 

 

꽃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앞에 넓게 펼쳐진 평야에 개천이 흐르고 송사리, 붕어가 많이 자라고 있었고,

뒷동산에는 소나무가 있어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났지요.

한마디로 목가적인 시심이 흐르는 조용하고 다정한 곳이었습니다.”

 

 

어릴 적 전원마을에서 뛰놀던 추억과 삶은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에 스며들었다. 서정성이 가득한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유겠다.

 

청소년기에도 춤을 향한 열정은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보리 한말 씩을 가져다 놓으며 장구를 치면서 한춤을 가르쳤던 곳이 있었는데, 못보게 하면 문틈으로 구경을 하곤 했다. 그 춤이 너무 좋아서, 추고 싶어서다. 그렇게 무용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세상 물정 모를 나이였다. 춤에 대한 그리움은 떨칠 수가 없었다. 부모님 몰래 무용학원에 등록해 최선 선생님을 만나게 된다. 처음 한 달 레슨비는 냈지만, 그 후에는 돈이 없었다. 연습실 청소 등 잡일을 맡아 하면서 레슨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가정 형편상 돈도 벌어야 했어요.

바로 취직해야 할 처지였는데 운명은 흘러가더라고요.

당시 최선 선생님한테 배웠던 춤 중에 검무가 있었어요.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전라예술제도 나갔었지요.

그땐 애들도 다 섞여서 그런 큰 축제에 나가곤 했어요.”



글쓰기도 좋아해서 학교 백일장에 나가서는 상도 곧잘 받았다. 그가 전주상고에 다니던 때 학교에 신석정 선생님이 계셨다. 전주상고 교지에 그의 시가 실리기도 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고, 시가 교지 맨 앞에 실리는 영광도 누렸다. 1972년에는 전북대신문사 중고등학교 문학상 현상공모에 시가 당선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지만 그가 원하는 무용과로 진학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서울로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던 그는 한번은 서울로 도망을 가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웨이터를 모집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서 말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려 결국은 포기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전주교대로 진학했다. 하지만 춤에 대한 열정은 그를 놔두지 않았다. 학업보다는 무용반에서의 활동에 집중했다. 황학제에서 춤을 추고, 최선 선생님의 연습실을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춤을 배우고자 의욕을 불태웠다. 부모님이 알게 되면서 극구 반대를 하시다 몸이 굉장이 아픈 아들을 보고는 죽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거 하게 놔두는 게 낫겠노라면서 눈감아 주셨단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시 같은 연습실에서 함께 춤을 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서울에 있는 대학교 무용과에 진학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면서 먼발치에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이란게 아예 무용과 진학을 포기하니 그게 그냥 또 견뎌지더란다.

 

전주교대를 졸업하고 전주동북초등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36개월을 이 학교에서 근무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무척 적성에 맞고 좋았다. 특히 무용반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날마다 무용연습을 했고, 옛 전주시민회관에서 무용발표회를 여는 등 성과도 냈다. 그 무렵 김광숙(전라북도무형문화재 예기무 보유자) 선생님을 만나 박금슬 선생님 기본을 배울 수 있었다. 주말에도 학교에 항상 학교에 나가서 무용을 열심히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웠다.

 

 

 

이후 춤을 향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전주초등학교에서 1년 근무하면서 한성대 무용학과 야간대학을 다니며 직장과 학업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저학년을 맡으면 4교시만 하고 일을 마칠 수 있기에 오후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1130분에 진주 가는 순환 기차를 타면 전주에 도착하는 시간이 새벽 4시쯤 되었다. 춤을 너무도 사랑했던 그에게 비록 몸은 피곤했을지 몰라고 그렇게 하고 싶던 무용공부를 하는 일은 너무도 신이 났다. 그러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되고, 한 달을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춤만큼 휴식시간이 좋았다. 제아무리 춤이 좋았다 하더라도 물리적 거리와 시간은 극복해야 할 과제였음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고향을 떠나 전주에서 경기도로 전근을 선택한다. 대학 가까운 곳으로 직장을 옮긴 것이다. 그러다가 경희대학원 무용학과의 주간 석사과정을 밟게 되면서 일과 병행이 불가능해져 결국 교사를 그만두었다. 드디어 그가 그토록 사랑한 춤의 길을 한평생 걷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처럼 해보라고 한다면 절대 못할 것 같아요.

무용과를 다니고 꿈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던 그 당시에는 정말 피곤한 줄도 몰랐던 거에요.

돌이켜 보면 그때가 진짜 열심히 했던 시절이지 않았나 생각해요.”

 

 

춤추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기웃거리며 춤을 추고 싶은 그 마음이, 어떠한 힘든 일도 무용을 위해서라면 인내하고, 연습하고, 자신을 만들어간 그 성실함이 그를 빛으로 이끌었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자를 신은 외면하지 않는다. 최고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젊은 날은 축복이었다. 그는 전주에서는 최선·김광숙 선생님께 기본을 배웠고, 서울 가서 박금슬, 조흥동, 이매방, 배정혜, 김진걸, 김천흥 등 국내 일류 선생님들을 만났다.

 

박금슬 선생님으로부터는 승무, 번뇌(煩惱)를 배웠다. 번뇌는 고성오광대의 문둥춤을 토대로 안무한 작품이다. 김진걸 선생님에게서는 기본무와 산조를 배웠다. 조흥동 선생님께는 시나위춤, 진쇠춤, 한량무 등 민속 작품을 학습했으며, 신로심불로도 배웠다. 배정혜 선생님으로부터는 Bar기본과 몸의 움직임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다.

 

이길주 명무의 춤을 안무해 주었던 배명균(배삼춘)도 만났다. 배명균 선생은 안무가이기 때문에 문정근에게 춤을 춰보라고 하고, 그것이 좋으면 선택을 해서 작품을 완성해 주었다. 바구니를 들고 하는 버들피리춤이라는 작품도 그렇게 완성했다. 배명균은 문정근의 춤사위에 코치할 게 없다면서, 장구춤은 남자들이 잘 안 추는데 문정근의 춤이 들어가면 너무 잘 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여성 무용가들이 추는 춤 6가지 정도 작품을 받게 되었다. 무당춤, 장구춤, 버들피리, 보리피리, 북춤, 승무 등으로 기억한다.

국립국악원에서 김천흥, 이흥구 선생님으로부터는 궁중정재를 학습했다. 김천흥 선생님으로부터는 4년여 동안 처용무를 배웠던 기억이 있다. 또 이매방 선생님에게서는 승무와 살풀이를 학습했다.

 

 

그땐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선생님들을 쫓아다녔는지 몰라요.

정말 우리나라 일류 선생님들을 다 섭렵했어요.

한영숙 선생님께 직접 승무를 배운 게 얼마나 큰 복인가 생각하곤 합니다.

아마도 이매방·한영숙·박금슬, 세 승무를 다 뗀 사람은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을 거예요.”

 

 

그는 춤가락 하나마다 혼을 넣어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이라며 스승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아로새겼다.

 

30대 후반에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에 입단을 했다. 좋아하는 무용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었으니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살이를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하지만 춤도 절대 포기할 수 없었으니 무용단에 입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이미 전두환 대통령 시기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펼친 개천절 행사에서 신시라는 작품에 객원으로 환웅 역을 맡아 춤을 춰 실력을 인정받고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었다. 그 이후에 남자 단원을 채용하게 되면서 입단하게 되었다.

국립국악원은 정부가 운영하기 때문에 예술가로 근무하기에는 정말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지역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춤만을 좇아 서울행을 택한 그에게는 특히 그랬다. 또한 궁중정재는 국립국악원에서만 배울 수 있는 춤이었으니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45개월 정도를 근무했다. 당시에는 국외로 공연도 참 많이 다니면서 문화사절단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후 서울시립무용단에서 18개월 정도 활동하다 전주로 다시 내려오게 됐다.

 

 

선생님과 갈등이 생겼어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 마음먹었죠.

그렇게 좋아하는 무용을 접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많았던 시기였어요.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야 작품활동을 할 수 있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든 것이니까.

경제적으로 이렇게 힘든데 이만큼 버텨왔다는 것 자체도, 어떻게 버텨왔지 싶더라고요.

무용하나 좋아서, 오로지 그것 때문에 견뎌왔던거죠.”

 

 

서울살이는 참 고단했다. 춤추는 것도 고단했다. 서울에서 활동하고 싶어서 발을 들였는데 서울 집값도 너무 비쌌고, 걸리는게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고향에 홀로 남으신 어머니를 뵈러 전주에 오곤 했다. 역시 고향이 최고다. 다시 교사를 시작한다면 정년까지 보장을 받을 수 있겠고, 아이들에게 무용도 가르칠 수 있으니까 고민이 되었다. 성인보다 순수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을 망설이고, 고민했지만 그를 붙잡아 준 것은 오로지 춤이다. 그가 서 있어야 할 곳은 무대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문정근 명무가 고향에 다시 돌아온 해는 전북도립국악원 무용단 상임안무자로 초빙됐던 1993년이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전주에 살고 있어 타향살이에서 늘 마음이 쓰였던 그는 2000년에는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추천돼 19개월 동안 잠시 고향을 떠나 있었는데, 2003년에 다시 전주로 와서 2013년까지 전북도립국악원 무용단장으로 재직했다. 춤 인생 40여 년 중 절반 가까운 16년을 도립국악원 무용단과 함께한 셈이다.

오랜기간 도립국악원에 몸 담으면서 그는 전라도 춤의 뿌리를 깊게 만들고, 향기를 짙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06년에는 대통령 문화사절단으로 중남미 3개국과 스페인·이탈리아에서 공연을 올려 호평을 받은 일이 기억에 남는다.

 

 

단장으로서 단원들을 아우르고 화합하는 일은 힘들지 않았는데, 작품 제작에 들어갈 때면 늘 벽에 부딪혔던 것 같아요. 무에서 유로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 것인가가 늘 문제였지요. 제가 춤추기를 좋아했던 사람이었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아닌가보다 생각했죠. 한 작품, 한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을 때마다 언제나 힘들었던 기억예요.”

 

 

문정근 명무는 이렇게 술회했으나 겸손의 이야기다. 그가 무용단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소품을 포함해 무대에 올린 창작무용만 50개 작품에 이른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2천석 규모의 모악당까지 들어섰으니, 그 흐름을 타고 대형작품을 욕심껏 만들어본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온 그의 열정은 전통춤의 복원과 재현을 통해 작품으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많은 작품 중에서도 그는 동학농민혁명 민초들의 삶을 그린 '파랑새(2006년 초연, 2013년 재공연)'와 모악산의 민속과 역사를 춤으로 담은 '모악(2010년 공연)', 그리고 전주 8경을 배경으로 삼은 ', 춤사위로 길을 묻다(2011년 공연)' 등의 작품을 손꼽았다.

 

 

 

제가 동학농민혁명 동학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유현종 씨가 쓴 새야새야라는 소설을 몇 번 읽었는지 몰라요.

전북 사람이니까 동학이라는 큰 사건을 무용으로, 형상으로 그려보자는 것은 일생의 목표가 되었죠.

이 소설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어서,

그 중에서 무용이 가능한 부분을 추려서 파랑새라는 작품을 만들었죠.”

 

 

 

역사적 대형 사건을 무대 형상화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파랑새2006년 초연에서 지역 무용 공연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대미술을 높인 작품으로도 평가됐다. 이후 동학농민혁명 120년 기념 총체 서사무용극으로 다시 선보인 2013년에는 영상과 첨단 무대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주제를 시각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모악은 지역의 명산, 모악산 주변의 민속과 역사를 춤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2007년도 작품인 2008년도 작품 풍요로운 땅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다. 3막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늘’, ‘’, ‘바다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천하의 어미산이라 불리는 모악산과 암계룡의 이미지 등 원시적 평화가 공존하는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 백미로 꼽힌 무용극이다.

 

 

 

', 춤사위로 길을 묻다'는 춤으로 그린 인생 여정을 자연에 빗대 안무한 작품이다. 전주 8경을 배경으로 우리네 인생을 하루의 여행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은 '한벽의 아침', '봉황골(봉황이 사는 계곡)', '만월(滿月)', '()의 미소' 8개 장이 옴니버스로 엮어지는 형태다. 그는 참 예쁘게 만든 작품이라고 떠올렸는데 한국화의 여백미를 강조하는 동선과 무대미술로 담백하고 세련된 무대 미학을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들 작품은 모두 전북의 뿌리를 춤사위로 찾으려는 작업들로, 평생 그의 연구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가 영감을 얻는 방식은 책이다. 다른 사람들의 공연을 관람하러 갔을 때도 작품을 만든 선생님이 책을 읽었구나, 현실적이구나, 현대적이구나 등을 파악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 그는 요즘도 책을 많이 읽는다. 주로 종교책을 많이 읽는 편이다. 한창 작품을 많이 올렸을 때는 소설을 많이 접했다.

 

 

결국 춤은 내 자신이 가는 끝없는 길기에 나 자체 그대로입니다.”

 

 

춤이란 곧 나다. 그의 명징한 한 마디에 더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어졌다. 이토록 춤을 사랑하는 사람을 내 평생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2013124일 문정근 춤 60년을 맞아 그는 자신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여정으로 한 점 새가 되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한 무용가의 삶을 조명하고 전통무용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작업이었다. 문정근의 어린시절 에피소드부터 청년기의 활동, 새로 안무된 세 개의 작품까지 피땀으로 이룬 한 개인의 춤 인생을 선보여 객석의 공감을 얻었다. 그가 작품을 대하는 기본정신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잘 모아낸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도라지 민요에 맞춰 췄던 것,

청년기에 무용했던 작품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또 정식으로 작품을 몇 개 했지요.

그때 제가 치마, 저고리를 입고 여자춤도 췄어요.

오페라의 유령처럼 반쪽 가면을 쓰고 말이죠.

어떤 여인이 화려한 모습으로 춤을 추다가 조그마한 주막에서 쓸쓸하게 가야금을 튕기는데

가야금이 떨어지니까 과거 속으로 돌아가는 설정이었죠.”

 

 

 


 

벌써 10년 전의 일인데 그는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며 신이나 이야기를 했다.

그런가 하면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준 부모님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을 표현한 작품도 있다

 

 

, 그리운 날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5년이 지나 201777일 선보인 작품이다. 못다 한 효도에 가슴 치며 구상에 들어간 작품이다. 당시 그는 공연을 소개하는 팸플릿에 어머니의 영혼을 무대에 모셔 노래도 불러 드리고, 못다 한 대화도 나누고, 춤도 추어 어머니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이 작품은 시작되었다는 인사의 글을 남겼다.

 

 

 

 




 

 

동작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은 대사를 사용하는 등 평소에 그가 해보고 싶었던 연극적 요소를 도입하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그해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의 무대공연작품 제작지원 우수작품으로 선정돼 1227일 재공연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선보였던 아버님 전상서는 우리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효의 의미와 가치를 조명해 가장 한국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효의 정신적 가치를 전하고자 전통제례를 형상화했는데, 3년상을 치르는 아들의 모습으로 불효를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이 작품으로 그는 1996년 제5회 전국무용제에 출전해 안무상을 받았다.

 

문정근과 춤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끊임없는 연구로 점철되어 진다. 그가 추는 춤은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바탕으로 완성되었다. 다시 말해 학구적인 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문난 춤이라면 관심을 갖고 실마리를 찾아가는 일을 즐겼다. 손에 잡히는 내용이 없다 하더라도 춤을 절대 외면하지 않았다. 다시 만들어 맥을 이어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는 철학을 늘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북전통춤연구원(옛 산조전통무용단)은 문정근 명인과 그의 제자들이 우리 전통춤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한국전통무용의 계승·발전 및 체계적 연구를 하고자 1996년 예향의 도시 전주에서 창단한 공연 전문예술단체다. 연구원은 예부터 내려오는 전주지역의 전통춤과 아울러 대한민국의 전통춤사위를 다듬고 재개발해 이를 무대화하는데 전력해다. ‘전북춤 뿌리 찾기라는 대명제 아래 지난 20여 년 동안 발굴해온 춤으로 전라삼현승무와 전라검무, 전주학무, 전주민살풀이가 있다.

 

전라삼현승무는 전북지방에서 행해지는 삼현음악에 맞춰 추는 승무를 말하며, 전주(전라)검무는 신광수 한벽당 12등 문헌 기록으로도 남아있는 검무의 동작을 고증, 재현한 춤이다. 전주학무는 전라관찰사로 내려온 허성을 맞이하기 위해 베푼 놀이패의 연희가 기록된 성소부부고에 나와 있는 내용을 근거로 2007년 조선시대 다른 학춤들과 같이 학 동작을 모방해 복, 재창조한 춤이다. 전주민살풀이는 전주지역에서 많은 공연 활동을 한 장록원의 민살풀이 춤으로 수건을 들지 않고 추는 멋과 흥의 춤이다.

이처럼 해를 거듭할수록 연구원의 사라져가는 민속무용의 재발굴과 복원을 위한 노력은 더욱 확대되고 깊어지고 있다. 2021년에는 별도의 기구인 비영리 사단법인 전라삼현승무보존회를 설립해 한국전통무용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해나가고 있다. 2022년에는 대한민국 검무의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전라검무의 원형을 찾아서복원공연과 학술세미나를 동시에 열어 주목받았다.

 

 

 


 


전라삼현승무는 전북지방에서 행해지는 삼현(피리2, 대금, 해금, 좌고, 장구)음악에 맞춰 추는 승무를 말해요.

전라삼현이 갖는 음악적 특징을 바탕으로 파계승 내면에 감춰진 심리적 갈등을

투박하면서도, 치밀하고, 당차면서도 단순한 미로 승화시킨 춤이죠.”

 

 

1972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마지막으로 공연된 이후 단절된 것으로 알려진 전라삼현승무. 문정근 명무는 이 춤을 꼭 찾고 싶었다. 갖고 싶었다. 그런데 전주 농고에서 전라삼현승무를 췄다는 이야기는 전해지는데, 춤을 췄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지역의 이름난 명무들도 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모른다. 자신이 아니면 이 춤을 복원할 사람이 없겠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어 왔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전라삼현승무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전주 농고 시절의 전태준, 이정렬이 음악과 동작을 고증해 주었고, 서울에 살고 있던 전광옥(정자선-정형인의 계보 속 고증자)이란 인물을 네 번씩이나 전주에 모셔 동작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지난 탓에 동작도 온전하지 못하고 뼈대만 간신히 남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계승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점은 분명했다는 점에서 그에겐 희망이 되었다. 그리고 정형인을 사사한 박금슬의 승무를 기반으로 전라삼현승무를 재구성해 재현하기에 이르렀다. 2001년부터 시도한 전라삼현승무 복원 작업이 마무리돼 첫 공연이 이뤄진 것은 2005년의 일이었다.

 

 



 

 

다시 정리해보면, 그가 추고 있는 전라삼현승무의 계보는 크게 세 갈래로 구분되기는 하나 정자선-박금슬-문정근으로 이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박금슬은 생전 문정근에게 정형인으로부터 직접 승무를 배웠다는 이야기를 전했다고 그는 밝히고 있으며, 무대예술가로 기록되어 있기에 그렇다. 물론, 이대조-이매방-문정근으로 이어지는 이매방류 승무, 그리고 한영숙-배정혜-문정근으로 이어지는 한영숙류 승무 등 우리나라 승무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각종 승무를 거의 대부분 공부했다는 점도 전라삼현승무를 복원 재현해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가 정립한 전라삼현승무는 전주를 중심으로 전승된 전라삼현육각 중 농삼현에 맞추어 승무를 추는 전통춤이다. 전라삼현승무는 다른 승무와 마찬가지로 염불, 반염불, 굿거리, 북놀음, 자진굿거리로 짜여져 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부분의 승무 반주 음악은 경기삼현 음악을 쓰고 있지만, 전북의 승무는 전라삼현음악을 사용해 전북만의 미학을 간직한 춤을 복원하고 무대화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어떤 춤판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춤이란 이야기다. 덧붙여 기존 승무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내용적인 면으로는 파계승 내면에 감춰진 연모의 정과 심리적 갈등을 어떻게 춤으로 묘사해 가는지가 핵심이다.

 

 


 

 

이에 대해 문 명무는 번뇌를 끊지 못하는 스님의 고통을 표현한 민속춤으로, 마지막에 북을 두드리는 것도 해탈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나만의 참된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마치 춤을 추고 있는 자기 자신을 현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의 움직임을 통해 몸에서 나오는 바람이 그의 몸을 감싸면 춤은 더 입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문 명무는 전라삼현승무가 갖는 매력에 대해 역동성, 비장미, 조화미, 여백미라고 정리해주었다.

 

문정근 명무는 20108전라삼현승무 복원의 의의 및 미학적 특성을 주제로 담은 논문으로 전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논문은 2005년 전라삼현승무를 공연물로 복원한 지 6년 만에 학술적으로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기 충분했다.

그는 논문에서 전라삼현승무의 음악적 구조를 재조명하는 한편, 무보를 통해 복원한 춤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또한 전북 최고의 명무로 손꼽혔던 정자선, 정형인의 이름을 세상에 불러냈다는 점에서도 눈여겨 봐야 했다. 그는 역사적인 뿌리를 찾기 위해 후손을 찾아 현장답사를 진행해 인터뷰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예로부터 호남지방은 판소리에 묻혀 무용이 크게 대접받지 못했다면서 호남 승무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이매방류 승무가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전승되었다면 전라삼현승무는 전북을 중심으로 전승된 승무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그렇게 목을 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현존하는 획일화된 승무의 모습에서 지방색을 띤 전라삼현승무의 복원은 전통춤이 갖는 다양성 확보라는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지난 2014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전라삼현승무 보유자가 됐다.

 

 

전주에는 권번이 있었고 검무를 가르쳤던게 분명한데

왜 다른 지역에는 살아있는 검무를 전주에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지가 늘 의문이었습니다.

이를 찾아낸다면 예향의 도시 전주의 콘텐츠를 더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었지만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던 것 같아요.”

 

 

문정근 명무는 또 하나의 도전을 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문헌 기록으로 남아있는 전주검무를 복원을 위한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전라삼현승무에 이어 또 다시 명맥이 끊인 춤을 찾고 있는 모습에서 문정근 명무는 춤을 위해 태어난 천상 춤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전주지방에는 교방청이 존재해 검무가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그는 1970년대 초 최선 명무로부터 꺾여진 칼과 긴 칼을 가지고 추는 검무를 배워 공연한 적이 있다. 이에 당시 춤을 기반으로 전주의 민삼현 음악과 정경태가 쓴 국악보에 나오는 검무의 동작과 법무의 동작,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쌍검 동작을 기반으로 검무를 구성해 2021년 덕진예술회관에서 공연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2630일에는 전주(전라)검무 공연과 세미나까지 개최하면서 원형찾기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무대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이날 공연은 마치 1700년대 한벽당에서 펼쳐졌던 검무인 듯 보였고, 신광수(1712~1775)와 남공철(1760~1840)이 지은 시 안의 춤을 추는 여인들이 살아난 듯, 의상부터 음악, 동작까지 깔끔하고 완벽했다. 문정근 명무가 안무하고 이윤경, 김연실, 김나연, 문지윤 씨 등 총 4명의 무용수가 선보인 전주(전라)검무는 씩씩했고 아름다웠다. 타 지역 검무와 다르게 여자 무용수의 남장과 전라삼현음악 반주가 특징이었고, 치마에 비해 비교적 활동적인 바지를 활용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무예와 춤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주 춤의 원형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무대였다.

 

 

동작을 구성하고 만드는 것보다는 옛날 선생님을 찾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전주(전라)검무를 찾아가는 일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검이 지닌 본질적인 것을 놓치지 않고 전통의 힘이 느껴지는 검무를 반드시 복원해내고 싶습니다.”


반드시에서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시작이 반이다.

 

 

이처럼 평생 연구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문정근 명무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 있어 전라북도에 굴지의 춤 명인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북은 그 인구나 도세에 비해 큰 규모도 아닌데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 여러 장르에 걸쳐서 춤 명인들이 참 많은 도시다. 이에 대해 문정근 명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거친 산이 많이 없고 산세가 예쁘고, 넓은 평야가 있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서 과거부터 먹고 살기가 풍족했고, 사람들의 삶에 여유가 있어 가((()이 발달하지 않았겠느냐고 해석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단절되고 없어진 것들이 너무 많다.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는 교방청이 있어 검무가 성행했다는 것은 일찌감치 문헌 등을 통해 확인이 되었으나 유교적 근대성과 사회적 차별에 대한 우려 속에 당시 연행됐던 검무의 구심점이 될만한 인물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말한다.

잃어버렸다고 해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전라북도 지역 전통춤의 뿌리를 찾기 위해 문정근이 들인 노력은 이루말 할 수 없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과 전통춤에 대한 열정, 전통춤이 갖는 다양성을 보여주겠다는 각오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의지로 전라삼현승무는 발굴돼 현재의 모습으로 보전될 수 있게 되었고, 전주검무의 발굴은 현재 진행형 중이다. 우리는 30년 이상 맥이 끊겨 있었던 상태의 전라삼현승무도 복원해는 그를 이미 학습했으니, 전주(전라)검무 발굴도 역시도 시간문제일 뿐임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열심히 해야죠. 열심히 하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전 아직도 한국무용을 어떻게 추고, 어떠한 길을 가야 하는지를 늘 붙잡고 연구해요. 세상살이가 그래요. 많은 시행착오가 있어야만, 땀이 있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요.”

오늘도 무대 위에서 우리 춤의 깊은 호흡과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는 사람을 혹시 만났다면, 바로 문정근 명무가 확실하다.

 

<문정근 프로필>

 

전주교대, 한성대 무용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무용학과 졸업 논문 연출법 연구

전북대 대학원 체육학 박사 졸업 논문 전라삼현승무 복원의의의 및 미학적 연구

국립국악원 무용단과 서울시립무용단원 역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역임

전북대 무용과 겸임교수 역임

전라북도립국악원 무용단장 역임

전라북도무형문화재 전라삼현승무 보유자

 

주요 안무

 

순혈에 핀꽃

아버님 전상서

사계-수레바퀴

전통무의 향기

스페인동계 U대회 안무

춤사위로 길을 묻다

파랑새

모악

미스 콩

한 점 새가 되어

 

수상

 

1회 대한민국 무용제 연기상 수상

6회 대한민국 무용제 안무상 수상

1회 전북예술인상 수상

2008 전주시 예술인상 수상

2008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수상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첨부파일
Life  where  art  becomes  everyday   life  where  art  brings  happ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