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서정과 신앙의 조화로운 시세계를 개척한 시인, 이기반
이동희 시인, 前 전북문인협회장
월촌 이기반(李基班 1931.5.25.~2015.11.18.) 선생은 우선 외모에서 범상치 않은 선비 기질이랄까, 지사다운 풍모를 지닌 분이다. 훤칠한 키와 늠름한 자태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길을 걷는 모습을 보노라면 저절로 존경의 염이 들게 하는 풍모를 지녔다.
월촌 선생을 생각하면 먼저 그 훤칠한 풍채가 떠오른다. 육 척 장신의 키, 올백으로 단정하게 넘긴 머릿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동문거리를 걸어 출퇴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출근할 때의 눈길은 저 멀리 ‘기린봉麒麟峰(완산팔경의 하나)’을 향하고, 퇴근할 때의 눈길은 저 멀리 ‘유연대油然臺(완산팔경의 하나)’를 향한 채 당당한 보무步武는 보는 이를 우러르게 하였다. 이런 모습을 뵐 때마다 선생에 대한 인상에서 기린麒麟의 자태를 연상하곤 하였다.
월촌 선생은 젊어서부터 풍채와 자세에서 우러나온 인상과 함께 시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일찍이 기린아麒麟兒로 촉망받았을 것이다. 기린아는 ‘지혜와 재주가 썩 뛰어난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동양 고전에서는 상상 속의 신령한 동물로 여겨 신수神獸로 치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훤칠한 풍채와 뛰어난 재주를 지닌 사람을 비유할 때 기린을 떠올리곤 하였으니, 그 모습이 월촌 선생과 겹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시인의 삶에 있어 교사로서의 일면을 빼놓을 수 없다. 고등학교 국어/문학 교사로서의 자상한 교육자상은 월촌 선생의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교육자상은 전주대학교까지 이어져서 수많은 제자의 가슴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월촌 선생은 필자가 고등학생일 당시 국어 선생님었다. 필자가 당시 교지에 시를 한 편 투고하자 까까머리 제자인 필자를 교무실로 불러 어깨를 토닥이며 칭찬해 주셨던 일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선생은 그 자상한 교육자상을 평생토록 유지했다.
또 하나는 시인으로서의 열정이다. 월촌 선생은 자유시와 시조의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많은 작품과 시집을 남겼다. 시문학에 기울인 선생의 열정은 끝내 그를 ‘시인’의 반열에 세워두셨다. 정년퇴직 후에는 ‘기린문학회’를 통해서 시조시인 배출에 힘을 쏟으셨으며, 문학동인회 ‘전라시조’를 조직, 창간하여 우리 고장이 시조 문학의 텃밭이라는 긍지를 이어가도록 후학들을 격려하셨다. 지금도 그때의 제자들과 동인들이 활발하게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전북문단을 떠받치는 기둥 역할을 자처한 월촌 선생은 한국예술인단체총연합회 전북지회장과, 전북문인협회장은 물론 중앙의 ‘현대시조문학회’와 여러 문학단체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일했다. 이런 점은 단순히 문학에 대한 열정이나 정신력만으로는 온전히 수행할 수 없다. 업무에 대한 헌신과 문화예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월촌 선생님의 능력이 발휘되어 원만한 성과를 일구어낸 것이다.
또 월촌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교회의 장로 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신앙 시집을 여러 권 꾸려 내신 것으로 입증된다. 문학이 종교를 압도할 수는 없겠으나, 종교 또한 문학적 정신력을 외면하고서는 설 자리가 없다. 월촌 선생은 문학과 종교가 슬기롭게 만나는 길을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시심이 승화되어 신앙심을 돈독히 하고, 신앙심이 깊어져 시심의 심연을 깊게 하는 등, 시문학과 신앙이 선순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월촌 선생의 모습을 뵐 때마다 한 마리 ‘청학靑鶴’이 연상되곤 하였다. 청학 역시 ‘날개가 여덟이고 다리가 하나이며 사람의 얼굴에 새의 부리를 한 상상의 새’로서, ‘이 새가 울 때는 천하가 태평하다‘고 하는 상상의 길조吉鳥다.
우리는 청학을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보고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찾으려면 찾지 못할 것도 없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우리의 전통적인 인문학적 정서는 현실 세계에 결핍된 ‘청학’을 시인의 모습에서 찾곤 하였다. 시인만은 범부 필부의 차원을 뛰어넘어 시대의 아픔을 풀어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존재, 절망의 고통을 변용시켜 희망의 세계를 그려 보여주는 존재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시인이 부르는 노래와 시인이 그려 보이는 그림이 ‘천하를 태평’하게 하기를 꿈꾸었다. 이 땅의 시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런 시인의 모습을 우리는 ‘청학’으로 그려보며 현실의 결핍을 극복하고자 했다.
한 인생을 단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는 없다. 누구의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교육)학자로서, (문학)시인으로서, (문화예술)행정가로서, 그리고 (종교)신앙인으로서 보여주었던 월촌 선생님의 일생은 ‘기린의 자태와 청학의 시심’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필자는 월촌 선생이 ‘기린아적 풍모’와 시인으로서 지녔음 직한 ‘청학의 시심’을 어떻게 펼쳐 보이며 문학 인생을 살다 가셨는지, 그분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며 밝혀보려 한다.
월촌 선생의 출생지는 완주군 조촌면 반월리(현재 조촌면이 전주시 반월동으로 편입)이다. 이후 월촌 선생은 자신의 저서나 이력서 등에 출생을 ‘전주’로 밝혔는데, 이는 행정 사무의 편의를 위해서 그렇게 적기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의 아호 ‘월촌月村’은 출생지인 ‘반월리’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월촌 선생은 ‘전주영생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야간에는 ‘전주영생대학’에도 출강하였으며, ‘영생대학’이 그 후 ‘전주대학교’로 바뀌면서 전주대학에서 정년을 맞았다.
월촌 선생은 대학에 재직하는 동안 ‘대학신문·방송 주간’, ‘전국대학신문주간 협의회 부회장’, ‘이과대학, 2부대학, 사범대학장’, ‘교육연구소장’, ‘출판부장’, ‘비교문화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퇴임 후 전주대학교 명예교수로 ‘전주대학교’와 ‘백제대학’ 등에 출강하였다.
월촌 선생은 전주대학교에서 정년퇴직 후, 명예교수로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기린문학회’ 등을 통해 후배 시인들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2015년 11월 18일에 별세한 월촌月村 이기반 시인의 장례가 ‘전북문인장’으로 거행되었다. (사)한국예총 전북연합회(회장 선기현)와 전북문인협회(회장 안도)는 전북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사 고인의 장례를 전북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전북문인장’으로 치렀다. 이날 장례식에는 선기현 전북예총 회장과 안도 문인협회장, 김남곤 전 전북일보 사장, 이운룡 전북문학관장, 서재균 전북문인협회 고문 등 전북지역 문화예술인 5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소재호 시인은 조사를 통해 “톨스토이는 사람에게 죽음이란 단지 육체에서 영혼을 떼어 놓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했다”며, “이기반 박사님께서는 비록 육체는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영혼은 언제나 우리 곁에서 함께하실 것”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전북 임실군 관촌면 부활동산에 모셔졌다.
월촌 이기반 선생은 평생 다수의 저작물을 생산하였다. 시선집 한 권을 포함하여 23권의 시집과 한 권의 수필집, 한 편의 희곡집 그리고 10권의 논저가 그것이다. 매우 다작의 시인이요 학자라 할 수 있다. 일생 동안 30권이 넘는 창작과 저술 활동의 업적으로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시인으로서의 시작詩作 활동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짐작하기에 부족하지 않다. 또한 대학교수로서의 저술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여기에 시조작가로서의 창작 활동에 더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신앙시 또한 괄목할 만하다.
월촌 선생의 작품론은 ①논저에 관하여 ②신앙시에 관하여 ③시조에 관하여 ④자유시에 관하여 등 네 꼭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논저 10권은 학자로서, 대학교수로서, 시인으로서 연구와 창작 활동 과정 중에 생산된 저술들이다. 그중에서도 『문학개론』, 『현대시론』, 『한국 현대시 연구』, 『한국 현대문학사 개설』 등은 국어국문학과나 국어교육과 학생들의 필수 교양과목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저술하였다.
월촌 선생의 저서 『문학개론』에는 저자의 이런 의도를 피력한 대목이 보인다.
“길잡이로서의 문학개론은 문학을 전공하는 문학생(文學生)과 함께
모든 문학도(文學徒)들 앞에 비춰주는 유일한 등대가 된다.
그 친절한 안내로 문학의 모든 분야에 대한 근본적인 이론을 성취하게 되며 창작의 능력도 기르게 된다.”
- 『문학개론』 머리말의 일부
『문예 창작론』, 『언어 예술의 시간과 공간』, 『신석정 대표시 평설』 등은 시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저서다. 필자도 문학 소년의 꿈을 청년 시절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던 터라 의미 있는 참고서로 여겼다. 『문예 창작론』은 필자 같은 문학 지망생에게는 매우 뜻깊은 저서였으며, 문학예술의 기초적인 상식에서부터 전문적인 이론까지 인문학과 대학생들에게는 유익한 저서였다. 특히 『신석정 대표시 평설』은 월촌 시인의 대학 시절 스승이자, 시문학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로 보일 만큼 정성을 들인 평설집이다. 필자 역시 이들 창작론을 통해서 시 읽기와 시 쓰기의 정수를 하나하나 가꾸어 갔던 기억이 새롭다.
월촌 선생은 1971년에 수필집 『은하의 모래알들』을 상재한다. 대학에서도 더러 ‘수필론’을 강의한 적도 있다. 한국문학 초창기에는 수필이 독립적인 문학 장르이기보다는 문인이라면 당연히 쓸 수 있는 글이며, 써야 하는 글로 여기기도 하였다. 월촌 선생의 수필에 대한 견해나 이론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정립한 것으로 보인다.
월촌 선생이 ‘한국수필작가회’에서 개최한 세미나(1988.6.11.~12. 전북예술회관)에서 발제한 강연 원고를 보면 월촌 선생의 ‘수필관隨筆觀’을 엿볼 수 있다.
“수필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그에 따라 수필 문학의 인구가 급증해 가는 실정이며, 또한 학문적 연구로도 수필 문학이 자리를 굳혀, 그동안 훌륭한 업적들이 나오고 있음은 매우 다행한 일이다. 이 시점에서 ‘수필은 수필이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의 글도 그 이하의 글도 아니다’라는 평범한 이론은 어찌 보면 안이한 표현인 것 같다. 왜냐하면, 수필이 지니고 있는 문학적 특성이 없어서는 아니 되거니와 그것을 모르고서는 수필을 수필답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필은 본디 지성적인 글이다. 즉 학문하는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 교양이 있는 사람(누구나 다 쓸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글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글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인간의 깊은 사색의 세계를 이지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문학의 일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따라서 수필은 문학의 다양한 영역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이런 문학성 속에서 태어나는 향기 높은 문학작품이요, 예술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수필은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소재보다도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의 방법의 문제가 주요과제로 등장하게 된다. 이때, ‘어떻게’라는 문제가 곧 ‘문학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 문학성이 결여될 경우 수필은 문학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는 잡문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수필은 강한 문학성의 표현이어야 함을 강조한다.”(한국수필작가회 세미나 발제 원고에서)
월촌 시인의 신앙심은 매우 돈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23권의 시집 도처에 그런 시심이 농후하다. 그러나 이런 신앙 시심은 23번째 시집 『생명의 불기둥』에 집약되어 있다. 월촌 시인의 시심의 근저가 무엇인지 우선 이 시집의 머리말을 보면 명확하다.
“신앙을 주제로 한 시이니만큼 기도의 시, 신앙 고백의 시, 사랑 실천의 시, 믿음의 시, 감사의 시 등을 함께 엮었다.
평소에도 신앙시를 발표해 왔으나, 뒤늦게나마 신앙시집을 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를 계기로 더욱 믿음을 돈독히 하나님께 충성하는 장로(長老)의 직분에 충실하면서
보다 의미 있는 신앙시를 쓰려고 다짐한다.”
- 제 23 시집 『생명의 불기둥으로』 ‘시인의 말’에서)
이 시집에서 주목되는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솔바람 피리소리 곱게 물든
어느 황혼에
못다 한 사랑 남기고
떠나간 그 임
전화번호 하나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아무리 그 번호를 눌러도 응답이 없으니,
어느 산기슭 잔디밭에 외로 누워
살았던 이야기를
시로 쓰고 있을까.
비가 내리고
꽃샘바람 불어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에
나 홀로 목이 메이고
기억 속의 전화번호만 눌러 본다.
“아닌데요, 잘못 걸렸습니다.”
그래도 다시 또 한 번
내 가슴의 전화전호를 누른다
하늘나라에 갔는지
대답 없는 그 번호를……
- 이기반의 시 「주인 없는 전화번호」 전문
월촌 시문학이 지니고 있는 종교성-신앙시 세계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다른 평자들에서도 일치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기반 시인은 이제 기독교의 본향으로 귀의하는 시세계를 지성과 서정과 신앙의 조화에 의하여 개척한 시인이다. 그러므로 그 시의 위상이 높은 자리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종교문학(신앙시)이 무엇을 어떻게 견지하고 지향해 나아가야 하는가를 짚은 대목으로 보인다. 월촌 시인의 신앙시가 지닌 높은 가치와 위상은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월촌 시인은 시조 문학에 깊은 사랑을 피력한 것을 그의 작품들에서 찾을 수 있다. 월촌 선생은 가람 이병기 시인과 신석정 시인을 평생의 스승으로 섬겼다. 이런 사정으로 본다면 가람으로부터는 ’시조 문학의 정수를 물려받았으며, 석정으로부터는 ‘자유시’의 정수를 사숙한 것으로 보인다.
1985년에 한춘섭, 박병순, 이태극의 편저로 발행된 『한국시조 큰사전』(을지출판공사. 2020쪽)에는 월촌 시인이 자선한 시조 대표작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월촌 선생의 전북대학교 은사이자, 시조 문학의 스승이신 가람 이병기 시인을 추모하는 연작시조가 있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월촌 선생이 가람으로부터 받은 시조 문학의 정맥이 어떻게 펼쳐지고 있으며,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월촌 선생의 23권의 시집에는 시조와 자유시, 애향시와 신앙시, 순수시와 목적시(신년 축시, 행사 축시 등) 등이 혼재되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정형시(시조)와 현대시(자유시)의 경계를 쉽게 넘나들면서 자유로운 시의 영혼을 전개하는 데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있다.
- 꽃
천리 길 멀다 않고 사랑인 듯 옮겨 가꾸신
난초 매화 연꽃들은 이 밤도 피고 지는데
당신은 꽃송이 속에서나 홀로 웃고 계실까
서재에 가득하던 화분 하나하나에
담은 솜씨 부은 숨결 천년을 피우고도
오히려 못다 한 정은 저승에서 나누시리
봄 가을 철철이 보람진 기쁨 안고
그 웃음 띄워 마신 꽃내음 은은한데
책 읽다 잠드신 수유재는 붓 벼루만 외로워라
- 술
잔 주고 받으시며 털어놓은 너털웃음
스승님 가신 곳마다 아직도 쟁쟁한데
지금은 어디 계신지 부르다가 애타오
구수한 말씀말씀 주흥 돋는 멋진 풍채
닮고 싶어 모셨건만 술맛 알자 가셨으니
그린 정 어느 날에야 다시 뵙고 사뢰리
양사재 찾아들면 인사보다 빠른 술상
손수 재어 주시던 알젓이랑 마른 안주를
두시고 어이 못 잊어 가셨는고 우리 임
- 제자
세상에 배운 사람 그 누구 제자 아니랴
새 시조 닦은 학문 스승님 넋을 이어
저마다 이룬 터전에 좋은 인재 하 많으오
바다보다 넓은 학덕 꽃보다 짙은 향기
넓고 깊은 슬기슬기를 제자 위해 베푼 정성
받들지 못하였을망정 하늘보다 더 높으오.
- 이기반의 시조 「부르다가 애타오 - 가람 스승님 추모의 밤에」 전문
월촌 시인의 시조 작품은 작품량이 풍부하다. 그리고 그런 시조 작품들이 한결같이 시조의 정통성을 지켜가면서도 현대적 감성으로 풀어내거나, 표현의 의장에 변화를 주면서 시대의 성정에 걸맞도록 끊임없이 시도한다. 지면 관계로 더 많은 시조 작품들을 소개할 수 없지만, 시조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고, 시조 문학 발전을 위해 다양한 문단 활동을 전개했던 전력 등이 ‘월촌 시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월촌 이기반 시인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자신의 23권 시집의 머리말이나 후기 등 도처에서 자신이 시의 인생을 살았음을 매우 긍지 높게 생각한다는 말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더불어 살아왔음을 ‘광영光榮’이라고 여기며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러면서 자신이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그만큼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도, 중등학교 교사로서도, 대학교 교수로서도, 교회의 장로로서도 그 심결의 바탕에는 항상 시심-시정신이 온전히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에 월촌 시인에게서 ‘청학靑鶴의 시인상’을 찾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청학의 시심으로 월촌 시인은 매우 다양한 시의 세계를 보였다. 월촌 시인이 보인 시의 세계를 그 형식이나 제재, 그리고 목적하는 바에 따라 나누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시세계: 신앙심의 발로로 여길 만큼 종교문학적 성격이 강한 작품들이 있다. 월촌 시인은 기독교에 귀의하여 평생 동안 신심 깊은 장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당연히 신앙시가 23권의 시집 도처에 짙게 자리 잡고 있다.
둘째, 정형시로서 시조 문학의 세계: 월촌 시인의 문학의 첫걸음은 전국백일장에서 시조 부문에 입상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대학에서 가람 이병기 시조작가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시조 문학에 대한 애정이 깊어 갔고, 시조 작품도 비례하여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셋째, 사제동행의 시세계: 월촌 시인은 시문학의 스승으로 가람과 석정을 꼽고 있다. 두 분으로부터 정형시인 시조와 자유시인 서정시의 세계를 익혔음을 고백하고 있다. 당연히 두 분의 문학적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인 측면에서도 깊은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넷째, 전북을 사랑하는 애향의 시세계: 월촌 시인은 유별나게 고향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시인이다. 애향심은 어찌 보면 인문학적 식견이 싹트는 모성 같은 것이다. 고향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다.
다섯째, 자연 지향의 시세계: 월촌 시인은 『흙의 미학』과 『흙을 위한 서시』 등, 자연 소재를 직접 시집의 제목으로 삼을 만큼 자연 지향성이 강한 시인이었다. 다른 시집에서도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시적 정서를 펼쳐낸 작품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여섯째, 서정성 짙은 자유시의 세계: 위에서 언급한 분류에 해당하지 않은 작품들은 형식과 소재의 제한에서 풀린 진짜 서정시의 세계다. 월촌 시인은 ‘기린麒麟의 자태’와 ‘청학靑鶴의 시심’을 지닌 시인이지만, 그 심결은 매우 소녀적이다 싶을 만큼 여린 감성이 풍부했다.
필자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월촌 시인을 ‘기린麒麟의 자태’와 ‘청학靑鶴의 시심’을 지녔다고 했다. 한 인간의 전 생애를 어찌 짧은 필설로 다 그려낼 수 있으랴만, 그래도 그분이 살았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 그분이 걸었던 삶의 자취를 더듬어 보며, 그분이 남긴 작품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니, 앞에서 언급했던 표현이 과히 과장된 미화나 지나친 수식은 아니라고 안도하는 심정이다.
스물세 권의 시집, 십여 권의 전공 저서, 치열한 문화예술 활동, 그리고 독실한 신앙인의 삶 등을 통해 볼 때, 현실에는 없으나 반드시 현실이 갖추어야 할 이상적 세계를 노래하는 존재로서 ‘청학靑鶴’의 모습을 월촌 시인에게서 찾는 일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월촌 선생이 현역으로 활약할 때, 그분의 참여만으로 행사의 위상이 격상되는 감을 가지곤 했던 것은 나만의 심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문학계는 물론이요, 문화예술계의 폭넓은 활약은 우리 지역사회의 커다란 자산이었다.
이렇게 치열하게 한 생을 살았던 월촌 시인에게는 5남 2녀의 자녀들이 있다. 이들 자녀들이 이제는 주어진 자리에서 아버지가 남긴 문학 인생의 여운을 호흡하고 있다. 맏이 경덕은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뒤에 아버지의 유업을 기린다. 이번 예술사를 집필하면서 맏이 경덕의 도움이 컸다.
월촌 이기반 시인 연보
1931. 출생(전북 완주군 조촌면 반월리에서 이신묵(父), 이선례(母)의 1남 2녀 중 맏이)
1953. 황규억과 결혼. 이후 슬하에 5남 2녀(경덕, 승덕, 산덕, 정덕, 양덕, 혜선, 춘선)를 둠
1954.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55. 삼례여고 교사로 부임(~1959)
1956. 전북대학교 대학원(국문학 전공) 졸업(문학석사)
1957. 첫 사화집詞華集 『두 날개』 출간
1958. 개천절 경축 제2회 전국백일장 시조 부문 입선
1959. 문화연필공업(주) 총무과장, 『자유문학』에 ‘설화’ 등을 발표하며 문단 데뷔
1960. 한국문인협회 회원, <신연대>, <백인문학회> 동인
1961. <삼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62. 남성여고 교사로 부임(~1965)
1965. 영생고등학교 교사로 부임(~1976)
1965. 시집 『불멸의 항변』 출간
1968. 시집 『대합실의 얼굴들』 출간
1969. 시집 『내 마음밭의 꽃말』 출간
1971. 수필집 『은하의 모래알들』 출간
1971. 제9대 한국문인협회 전북지부장(~1972)
1973. 시집 『겨울 나그네』 출간
1975. 시집 『모국어母國語』, 단막 희곡 『그 안경 속에는』 출간
1976. 전주공업전문대학 조교수(∼1977)
1976. 시집 『그 안경 속에는』 출간
1977.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1996)
1980. 시집 『아침 눈망울』 출간
1981. 논저 『한국 현대시 연구』, 시집 『어둠에 묻힌 빛』 출간
1982. 시집 『흙의 미학』, 『문예 창작론』 출간
1983. 미국 골든스테이드대학교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음
1983. 『문학개론』(김남석 공저) 출간
1984. 시집 『고향에의 기도』 출간
1984. 전주대학교 이과대학 학장(~1985)
1984. 전국대학신문주간교수협의회 부회장(∼1985)
1985. 『한국 현대문학사 개설』 출간
1985. 전주대학교 이부대학 학장(∼1986)
1985. 전주대학교 출판부장(∼1993)
1985. 완주군 <8품·8미·8경> 선정위원회 위원장
1986. 전주대학교 교육연구소 소장(∼1988)
1986.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학장(∼1989)
1986. 시집 『가을 항아리』, 『신석정 대표시 평설』(공저) 출간
1987. 시집 『가슴에서 우는 새』 출간
1988. 전국사범대학장협의회 이사(∼1989)
1988. 『언어 예술의 시간과 공간』 출간
1989. 시집 『내가 그리는 그림은』 출간
1990. 전라북도 도정자문위원(∼1991)
1990. 제16대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 전북지회장(~1993)
1991. 시집 『전북찬가』, 『그대 만나는 날엔』 출간
1993. 전주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소장(∼1994)
1993. 시집 『강물로 흐르려네』 출간
1994. 시집 『점 하나 찍어 놓고』 출간
1995. 시집 『흙을 위한 서시』 출간
1996.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정년퇴직
1996. 전주대학교 명예교수 추대
1996. 시선집 『한 포기 들풀로』, 『현대시론』 출간
1996. 한국시조시인협회 제6대 부회장
1996. <기린문학회> 등 문예교실에서 문인 양성
1997. 『시창작론』, 『국창 권삼득 평전』(공저) 출간
1998. 시집 『빛과 사랑』 출간
1999. 『문학의 이해』 출간
2000. 시집 『학이여, 날아라』 출간
2001. 시집 『생명의 불기둥으로』 출간
2015. 영면
이기반 시인의 수상 이력
1969. 전라북도문화상 문화본상(전라북도청)
1975. 학습우수공로 전북의별(전북교육청)
1982. 전북대상 학술본상(전라북도)
1983. 한국예총회장상(한국예술인단체 총연합회)
1985. 노산문화상 창작 부문(노산문학회)
1989. 학농시가문학상(학농시가문학상 위원회)
1990. 백양촌문학상(백양촌문학상 위원회)
1991. 풍남문학상 대상(전주시청)
1992. 한국시 문학상 대상(월간 한국시)
1993. 제1회 목정문화상(문학 부문) 수상(목정문화재단)
1996. 국민훈장 동백장(대한민국)
1997. 한국자유시인상(시 전문지 자유문학)
1998. 모악문학상(모악문학상 운영위원회)
2003. 기독교문학상(한국기독교문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