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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수필 문단의 거목, 김학
  • 2024-06-19 15:40
  • 조회 493

본문 내용

 














전북 수필 문단의 거목, 김학

 

 

장세진 평론가

 

1. 잊을 수 없는 멘토

 

 

장세진 선생, 방금 국영화 톺아보잘 받았습니다. 고맙소이다

이 원고를 언제 다 썼단 말이오? 대단합니다. 문운창성을 빕니다. 김학.”

 

 

 

이는 2020년 11월 27일 김학 수필가가 내게 보내온 문자 메시지다. 그 무렵 나의 책 『미국영화 톺아보기』 를 받아본 문인과 지인 41명이 문자·전화·편지 등으로 발간을 축하해 주었다. 가장 먼저 김학 수필가가 축하 문자를 보내왔다. 그만큼 반가워했던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김학 수필가는 나의 고교 13년 선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1983년 여름이다. ‘TV문학관의 허실’이란 드라마 평으로 
서울신문사 ‘TV가이드’가 주최한 제2회방송평론공모에 당선된 직후였다. 김학 수필가는 “방송평론가로 데뷔한 걸 신문에서 보았다. 고교 후배가 자랑스럽다”며 내게 연락을 해왔다. 당장 ‘전북수필문학회’며 ‘전북문인협회’ 가입을 권유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전북수필’ 제13호(1983.11.30.)에 수필을 처음 싣는 등 동인 활동에 들어갔지만, 그러나 나는 이듬해 전남 강진군으로 신규교사 발령을 받고, 전주를 떠났다. 1987년엔 구례여자고등학교로 발령받아 남원으로 이사해 버스 통근을 했다. 
마침 김학 수필가는 KBS 남원방송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남원지역 문인 모임에 나가게된 이유다.
김학 수필가는, 이를테면 나를 지역문단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길을 열어준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은사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경기도 평택기계공업고등학교 근무할 때인 1992년 5월 30일 나는 토요일 수업이며 학급 종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필집 『호호부인』 출판기념회 시간에 맞춰 내려오기까지 했다. 나는 이후 약 9년을 객지에서 근무하다 1993년 3월 고향인 전북으로 학교를 옮겼다.
1995년 가을 라대곤(1940~2013) 소설가 겸 수필가를 만나게 해주는 등 그런 교유로 김학 수필가는 1999년 나의 책 『한국영화를 위함』 출판기념회에서 축사를 해주기도 했다. 무릇 교유란 오고 가는 것이어서 김학 수필가의 3남매 결혼식(2002~2005)은 물론 모친·장인상(2007) 등 애경사를 빠짐없이 챙기는 그런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뿐이 아니다. 김학 수필가는 내가 1983년 방송평론가에 이어 1985년 영화평론가, 1989년과 1990년 문학평론가 등 신인상 수상 이후 처음으로 번듯한 문학상을 받게 앞장서 주기도 했다. 1998년 제2회 전북예술상 (2010년부터 ‘전북예총하림예술상’으로 바뀜)이 그것이다. 

당시 전북문인협회장이었던 김학 수필가가 내게 공적서를 내라 했고, 그 추천으로 문학부문 수상자가 된 것이다.
물론 그 한 해에만 5권의 저서를 펴내는 등 나는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터다. 
그럴망정 아무리 열심히 저술활동을 해도 상 줄 곳에서 알아주지 않으면 그만이 아니던가? 김학 수필가를 잊을 수 없는 
멘토로 기억하는 이유다.​​

 

 

 

2. 독보적인 수필인생

 

김학이 남긴 저서는 수필집 14권(방송수필집 2권 포함), 수필선집 3권, 수필평론집 2권 등 총 19권이다. 

방송수필집이라 명명한 『밤의 여로 1, 2』(1978~1979)를 비롯 『철부지의 사랑연습』(1982)·『춘향골 이야기』(1986)·

『호호부인』(1992)·『오수땅 오수사람들』(1999)·『아름다운 도전』(2003)·『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2006)·

『수필아, 고맙다』(2010)·『나는 행복합니다』(2012)·『하여가&단심가』(2015)·『쌈지에서 지갑까지』(2017)·『하루살이의 꿈』·『지구촌 여행기』(2019)  등 14권이다. 이 밖에 수필선집 『가슴앓이』(2001)·『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2008)·『손가락이 바쁜 시대』(2020) 3권과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2007),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2012) 2권이 있다.

그 19권이 모두 수필 관련 책이다. 수필가이면서 시인도 하는 문인들이 많은 문단에서 다른 장르로의 ‘외도’ 없이 오로지 수필에만 매진해 온 문력(文曆)임을 알 수 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누가 뭐라 해도 김학은 수필문단의 거목(巨木)이다. ‘수필문단의 거목(巨木)’은 2022년 1월 28일 책의 엮은이가 되어 펴낸 1주기추모문집 『김학수필문학론』의 ‘책을 엮으며’의 제목이기도 하다. 쉼 없이 이어온 수필 창작은 물론 수필문학 저변 확대에 누구보다도 앞장서 온 수필가 김학이라 그렇다. 

그가 어떻게 수필문단의 거목이 되었는지 생전에 남긴 글들과 추모문집 『김학수필문학론』을 다시 읽고 참고 삼아 김학의 독보적인 수필인생 을 살펴보자.

 

 

 

1) 박사고을 고향과 63년간 전주 토박이


김학은 1943년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에서 태어났다. 김학의 고향 임실군 삼계면은 인구 2천 명도 되지 않는 조그만 시골인데 이곳에서 배출한 박사가 무려 200여 명에 이른다. 그래서 삼계는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이름난 박사고을이다. 

이에 대해 김학은 “그것은 연면히 이어져 온 내 고향의 오랜 전통이다. 마을끼리, 성씨끼리, 집안끼리 경쟁하다시피 자녀들을 박사로 키우려 노력한다. 고향의 분위기가 그러하니 나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회고한다. 

김학 수필가는 실제로 둘째 아들을 박사로 길러냈다. 김학은 삼계초등학교와 오수중학교를 거쳐 1961년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전북대학교 사학과 졸업과 함께 ROTC 4기로 임관, 전역(육군 중위)한다. 1968년 6월의 일이다. 그 이듬해 봄 김학은 전주해성고등학교 교사가 되지만, 6개월 만인 1969년 9월 군산서해방송 프로듀서로 전직한다. 

김학의 수필과의 인연이 시작되는 방송국 입사라 할 수 있지만, 먼저 살펴볼 것은 전주로의 정착이다. 

김학이 고향인 박사고을 삼계를 떠나 전주로 이사한 것은 전주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1958년 봄이다. 가령 그의 수필 「다시 이사를 하고 나서」(『전북수필』 17호, 1986.7.20. 수필집 『춘향골 이야기』 수록)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이 수필은 1985년 9월 20일 2층 양옥을 지어 이사한 이야기인데, 그때 이미 “27년 동안을 줄곧 노송동(老松洞)에서만 맴돌며 살아왔다. 서노송동·남노송동·중노송동을 오락가락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아예 ‘내 고장 전주 만세’(수필집 『철부지의 사랑연습』 수록), ‘용비어천가와 전주’(수필집 『오수땅 오수사람들』 수록)라는 제목의 수필이 있는가 하면 『주말 아빠』(수필집 『철부지의 사랑연습』 수록)에선 “전주의 봄은 안다”며 전주를 예찬하고 있다.

김학은 그 이후에도 제목에 전주가 들어가거나 소재로 한 수필을 여러 편 썼다. 내가 김학 수필집들을 일별하여 찾아낸 작품은 「용비어천가를 전주의 문화유산으로」(「용비어천가와 전주」를 개작)·「시민의 사랑방,(전주)시립도서관」(이상 수필집 『아름다운 도전』 수록)·「콩나물도시 전주를 교육도시 전주로」(수필집 『하여가&단심가』 수록)·「온고을 전주에 사는 행복」(수필집 『쌈지에서 지갑까지』 수록)·「우리 동네 안골 풍경」·「우리 동네 아우동 이야기」·「전주할아버지」(이상 수필집 『하루살이의 꿈』 수록) 등이다.

이런 전주 사랑과 함께 특기할 것이 있다. 다른 가정처럼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내린 결정인지 김학은 자신의 고교 진학과 함께 전주로 이사온 이후 다른 지역으로 집을 옮겨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수필 「우리 동네 안골 풍경」을 보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전주로 보금자리를 옮긴 뒤 열네 번째 이사”했음을 

알 수 있는데, 타지(他地)로 옮겨간 적은 한 번도 없다. 열네 번 전부 전주시 안에서 이사를 다녔다. 이를테면 그만큼 지극했던 전주 사랑인 셈이다.

방송국 프로듀서 김학의 근무지가 군산이거나 남원이었을 때도 하숙 또는 통근을 했고, 거주지는 전주였다. 1990년 2월 KBS전주방송총국 제작부장으로 부임해 2001년 12월 정년퇴직(단, 1992년 6월 KBS군산 방송국으로 옮겼다가 10개월 후인 1993년 4월 KBS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으로 복귀한 바 있다.)하고, 이후 2021년 1월 별세할 때까지 무려 63년을 김학은 그렇게 전주 토박이로 살았던 전주 사람이었다.

 

 

 

2) 1970~1990년대 ‘밤의 여로’와 전북수필문학회


김학의 본격적인 독서활동은 전주상업고등학교 시절부터다. 전주로 이사한 고교생 김학이 문학서적을 읽기 시작한 건 시인인 최승범(1931~2023) 교수 집에 드나들면서부터다. 그때 최승범 교수 집에는 고하 선생의 사촌동생이자 김학의 내종사촌형이 하숙을 하고 있었다. 고교생 김학이 비교적 자유롭게 그 집에 드나들 수 있었던 배경이다. 김학은 “고하 선생님 댁에는 읽고 싶은 책들이 아주 많았다. 책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고, 서점에 가서 책을 사지 않고도 얼마든지 시집이며 수필집·소설집 등을 읽을 수 있었다. 

고하 선생님 댁은 나를 위한 사립도서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고 회고한다.

김학이 처음 수필을 써서 발표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인 1962년이다. 전북대학신문에 실린 ‘아웃사이더 의 사랑이야기’다. 

“그 신문에 내 수필이 게재되었던 그때의 그 기쁨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던 대학생 김학에게 대학신문은 자주 작품 발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가선 ‘전우신문’과 ‘월간 육군’이 작품 발표의 장이었다. 제대한 뒤 방송국 프로듀서가 된 다음에는 전북일보가 자주 지면을 제공 해 주었다. 이를테면 김학의 글쓰기가 중단 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군산서해방송 프로듀서였던 김학으로 하여금 본격적인 수필가의 길을 걷게 만든 건 1972년 10월 부터 신설된 ‘밤의 여로’란 프로그램이다. ‘밤의 여로’는 매일 방송되는 15분짜리 에세이 프로그램이었다. 

200자 원고지 8장 정도의 짧은 수필에 감미로운 음악 3곡을 섞어서 방송했다. 아직 수필가가 아닌 김학은 2년 반 동안 매일 한 편의 방송용 수필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대해 김학은“지나고 보니 그때가 나에겐 수필창작의 지옥훈련 기간이었던 셈이다.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내일은 어떤 내용의 글을 쓸 것인가에 관심을 쏟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술을 마시면서도 오로지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쓸까 하는 게 나의 관 심사였다”고 회고한다.

2년 반을 그렇게 보낸 뒤 김학은 마침내 전북의 문인들 중에서 요일별로 필진을 정하여 원고 청탁을 하는 묘책을 낸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정덕룡(1937~2001)·정주환(1942~2016)·김동필(1939~2006) 수필가, 최승범·이기반(1931~2015)·허소라(1936~2020)·박만기(1936~2016) 시인 등이 필진이었다. 김학은 방송국 프로듀서로서의 원고 쓰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필진을 전국으로 넓혀 나가기도 했다. 그때 필진으로 참여한 전북 지역 외 수필가들은 대전의 김영배(1931~2009)·오승영(1938~2020), 청주의 이재인, 대구의 정재호 등이다.

또한 ‘밤의 여로’를 진행했던 서해방송 재직 때 김학은 ‘서해문단’이란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 방송하기도 했다. 청취자들로부터 수필과 시를 공모하여 허소라·이기반 시인이 교체 출연하며 작품을 평해 주었고, 금상·은상·동상을 선정하여 시상도 했다. “그때 ‘서해문단’을 통해 얼굴을 내민 청소년들 가운데 상당수가 등단의 관문을 통과하여 문인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게 수필가 김학의 회고다. 문학을 사랑했던 김학은 ‘밤의 여로’를 맡게 되면서부터 시보다는 수필에 더 끌렸다. 김학은 문학의 여러 갈래 가운데서 유독 수필을 선호하게 된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수필은 방송에서의 활용도가 높기 때문이다. 

일선 프로듀서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스스로 원고를 써서 시청자에게 의도하던 메시지를 전하려면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얘기다. “때때로 직장에서 축사나 조사 또는 기념사를 부탁받아 곤혹스러웠던 적도 많았지만, 프로듀서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됐던 것도 또한 사실”이라 수필을 선호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김학이 유독 수필을 선호하게 된 또 하나 이유는 조선시대 선비를 본받고 싶어서다. “이 역시 나로서는 망외(望外)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는 그의 고백에 따르면 조선시대 학문을 했던 선비들이 문집을 남겼듯이, 김학도 후손들에게 문집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가 가고 없는 지금 김학은 셀 수 없이 많은 수필을 통해 그런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 김학이 남긴 수필은 선집과 평론집을 빼고도 14권에 이른다.

아무튼 1978년 12월 전북에 사는 ‘밤의 여로’ 필진들이 모여 망년회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전북수필문학회’를 창립하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드디어 1979년 여름 정덕룡·김학·정주환 세 사람이 주도하여 전영래·김동필·김희선·송영상·한대석을 발기인으로 선정하고 사리문다방에서 그 모임을 가졌다. 마침내 9월 8일 고려회관에서 전북수필문학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2023년 기준 44년 역사를 맞는 전북수필문학회 닻이 오른 것이다.

수필가 김학 회고에 따르면 1979년 10월에 발간된 ‘전북수필’ 창간호에는 25명의 회원들이 2편씩의 작품을 게재했다. 

그 ‘전북수필’이 어느새 44주년을 맞았다. 김학은 “지방신문이나 ‘전북문학’에서 셋방살이를 하던 전북의 수필 애호가들이 드디어 ‘전북수필’이라는 자기 집을 마련하게 된 셈이다. 내가 지금도 유난히 ‘전북수필’에 애정을 쏟는 이유도 이런 연유가 있기에 그런 것”이라며 전북수필문학회 출범 및 동인지 ‘전북수필’ 창간호 발간 당시 감회를 회고한 바 있다.

 


 

김학은 “전북수필문학회가 발족될 때만 해도 수필가로서 중앙문단에 정식 등단한 이는 없었다. 수필집을 한두 권 펴낸 이는 있어도 모두가 등단의 과정을 밟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 8월, 내가 ‘월간문학’에서 수필부문 신인작품상에 당선하여 중앙문단에 얼굴을 내밀자, 전북의 수필문단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고, 줄을 이어 등단의 대열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등단이 기폭제가 되었다고나 할까? 등단 수필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수준 높은 작품을 빚고자 노력하고 있는 전북수필의 미래는 밝다고 본다”고 회고한다. 

창립을 주도한 김학 수필가는 전북을 한국수필의 메카로 키우고 싶은 것이 전북수필문학회의 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꿈이 실현되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전북수필문학회가 44년 동안 명맥을 이어온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족적의 성과라 해도 틀리지 않다. 출범 44주년을 맞은 전북수필문학회는 김학이 회장이던 1987년 제정, 1988년 1회 수상자를 낸 전북수필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매년 2권의 동인지를 발간하고 있다. 동인지 ‘전북수필’은 2023년 상반기 현재 제96호를 발간했다.

한편 그때에는 오늘날처럼 여기저기서 수필을 공부할 수도 없었기에 김학은 어깨너머로 선배들의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 글쓰기 요령을 터득해야 했다. 1978년에 이미 방송수필집 ‘밤의 여로’를 출간했던 김학은 마침내 1980년 ‘월간문학’ 8월호에서 ‘전화번호’란 작품으로 신인상에 당선(심사위원 조경희·원형갑)된다. 공식 경로를 거친 수필가 등단이다. 이로써 김학은 전북 최초로 중앙문단에 등단한 수필가란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그 뒤 전북의 수필가들은 우후죽순 격으로 중앙문단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수필가 김학은 “나는 수필가이면서 문학행정가라고 자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북수필문학회·임실문인협회·대표에세이문학회·전북문인협회·전북펜클럽 등 크고 작은 문학단체의 회장을 맡아 운영했던 경험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김학은 방송국 프로듀서로 근무할 때도 방송과 문학을 접목 시키는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제작해 수필문학의 저변 확대에 나섰다. 가령 “방송 일에서도 그는 두각을 나타냈다. ‘처음’·‘최초’·‘시작’·‘제1​회’라는 접두사가 필요한 행사를 기획한 것만도 한두 개가 아니다”(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 수록)라는 인터뷰 기사(새전북신문 이란우 기자) 를 볼 수 있을 정도다.

김학은 1980년 방송 통폐합으로 군산 서해방송에서 KBS남원방송국으로 옮 겨가서도 방송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례행사로 해 마다 새봄이면 ‘KBS 신춘문학의 밤’이란 행사를 열었다. 석정문학회·청녹두시동인회·표현문학회와 서울의 대표에세이문학회 등을 초청해 1부에서는 시와 수필 낭송, 2부에서는 문학 강연, 3부에서는 문인과 독자와의 대화로 꾸몄었다. 

이러한 문학 행사를 통해 중앙의 문인과 지방의 문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이루어졌다. 김학은 “남원 문인들 

의 문학 열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름대로 보람과 긍지를 느꼈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김학은 ‘신춘문학의 밤’ 외에 ‘오작교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청소년들의 시와 수필을 투고받아 방송함으로써 그들에게 발표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문학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했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김학은 자신이 꼭 해야 될 의무라고 여기며 즐겁게 수행했다. 이에 대해 김학은 “문학이 인쇄매체의 전유물인 양 여겨 온 문인들의 편견을 깨뜨리고 싶은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전파매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문학임을 실증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라고 자평한 바 있다.

문학과 좀 다른 얘기지만, 이때 김학이 해낸 또 하나는 춘향선발대회를 전국화시킨 일이다. 그뿐이 아니다. 

‘춘향골 남원을 생각하면’(수필집 ‘하루살이의 꿈’ 수록)을 보면 KBS남원방송국 방송부장이던 김학은 춘향제 3대 행사를 추진했다. ‘전국춘향선발대회’·‘전국명창대회’·‘전국남녀궁도대회’가 그것이다. 수필가김학은 이 수필에서 “이 3대 행사는 KBS가 예산과 방송을 지원하면서 조촐한 지역행사가 전국전인 축제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이 기간, 1978년 ‘밤의 여로’, 1979년 ‘밤의 여로 2’ 방송수필집을 이미 출간했던 김학은 연달아 수필집을 펴낸다. 

1980~1990년대 세상에 나온 김학 수필집은 ‘철부지의 사랑연습’·‘춘향골 이야기’·‘호호부인’·‘오수땅 오수사람들’ 등이다. 

또 하나 1990년대 특기할 김학의 활동은 전북문인협회장 재임이다. 1998년 2월 7일 선거에서 단독으로 출마해 당선된 김학 회장은 임기 첫해 동인지 ‘전북문단’ 발간과 전북문학상 시상 외에도 ‘전북문인협회보’(타블로이드판 4면) 창간, KBS와 함께한 ‘제3회전북애송시낭송대회’, 제1회한 글사랑 전북어린이 백일장대회, 이듬해엔 전북시인 자선대표시선집 ‘달하높이곰 도다샤’ 발간, 금강산문학기행, 전북문인협회의 컴퓨터와 팩시밀리 시대를 여는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김학 회장은 ‘전북문단’ 26호(1998. 12.1.) ‘책머리에’서 “특히 자랑스러운 것은 올해에 처음으로 진동규 시인이 ‘자랑스러운 전북인대상’을, 장세진 평론가가 ‘전북예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요, 전북문협의 자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기회를 빌려 컴퓨터를 기증해주시고 어린이백일장대 회 경비 3백만 원을 쾌척해주신 라대곤 수석부회장님을 비롯, 회원 여러분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한다. 회원들에 대한 수상 축하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전북문인 수장으로서의 자상하면서도 따뜻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3) 2000~2010년대 수필 전도사의 길


수필가 김학은 2001년 12월 KBS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한다. 퇴직 전 ‘전북의 어른상’ 제정과 국제펜클럽전북위원회(전북펜클럽) 발족과 함께 초대 회장을 맡았던 김학에게 정년퇴직은 본격적인 수필 전도사의 길을 걷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된다. 

김학은 “내가 수필과 더 가깝게 된 것은 2001년 9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과정을 신설하여 강의를 맡게 되면서부터”라고 회고한 바 있다.

직 직전인 그해 9월부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김학이 오래 전부터 꿈꿔온 수필 전도사로서의 길이기도 하다. 수필창작반 교수 김학이 어떻게 수업에 임했는지 잠깐 들춰보자.

 

 

20대부터 80대까지의 수강생들이 열심히 수필공부를 하고, 열정적으로 창작연습을 하는 걸 보면 

절로 힘이 솟는다. 나는 그들이 올바른 수필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여 안내하려 한다. 

컴퓨터의 e-mail은 그들 수강생들과 나를 이어주는 통로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어떤 수강생 

이 새로운 습작품을 보냈는지 확인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세월이 가면서 수강생들이 불어나 지금 

은 기초반·중급반·고급반·야간반 등 4개 반에 110명이 등록하여 열심히 습작을 하기도 했다.



 

김학 수필가로부터 수필 쓰기를 지도받은 학생의 글에서도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주기 추모문집 ‘김학수필문학론’에 수록된 제자들과 직장 동료였던 수필가들의 글을 짧게나마 몇 편 옮겨본다.

 

 

김학 선생님의 수필 지도방식은 좀 특이하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수강생들이 쭉 돌아가며 한 가 

지씩 칭찬하는 칭찬릴레이 시간을 갖는다. 칭찬의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온갖 세상만물이다. 주변 

의 일상을 예사로 보지 않는 일종의 ‘낯설게하기’ 훈련이다. 그는 수필 하나로 참 많은 제자를 길러

냈다. 전라북도 수필문단에서 활동하는 등단 작가들 중에 선생님의 제자 아닌 사람이 드물 정도로. 

선생님의 수필은 참 쉽다. 사전을 들춰봐야 할 만큼 어려운 단어도 없고 문장도 평이하다. 소재는 

누구나 흔히 겪는 일상이다. 밥상 위의 반찬, 수저와 젓가락이 수필이 된다. 길가에서 만난 돌멩이, 

농기구 창고에 들어앉아 있는 괭이나 낫 같은 무생물조차 수필이란 호흡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던 

작품을 700편 가까이 남겼다. 


- 윤철 ‘그립습니다 선생님’



그때 본교(삼계초등학교-인용자) 출신인 김학 교수님을 처음 알게 됐다. 인터넷을 검색해보았다. 

교수님은 수필가로서 명망(名望)이 높고 영향력이 큰 분이셨다. 다음 해 가을이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목요일 수필창작반에 등록했다.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글쓰기의 불씨를 지피고 싶어 

서였다. 김학 교수님의 야간 강의를 들으며 수필 쓰기 첫발을 내디뎠다. 첫 시간에 들은 두 가지 말, 

‘불광불급(不狂不及)’과 ‘십년법칙(十年法則)’은 내 맘에 꽂혀 지금도 살아 있다.

정년퇴임을 하고는 교수님이 같은 강의를 하신 안골노인복지관으로 옮겼다. 수필 강의를 들은 지 

강산이 한 번 변한다는 10년이 넘었다. 강의실 내 자리는 교수님 바로 앞 오른쪽이었다. 그래서 

인지 수필에 대한 이해와 수필 쓰기 전략이 머리에 얼추 입력이 되었다. 수필 습작은 힘들었지만 

220편 가까이 교수님의 첨삭지도를 받으며 명색이 수필가로서 길을 걸어왔다.


- 정석곤 ‘하늘나라로 가신 김학 교수님'



김학 선배님은 수필이 있어 행복했던 분이셨다. ‘수필아, 고맙다!’는 수필집도 냈지만 수필을 너무 

사랑해 만나는 사람마다 수필을 쓰라고 권유했었다. 또한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을 수필의 

소재로 삼아 금방 글 한 편씩을 완성했던 분이셨다.

글 또한 누에가 명주실을 뽑아내듯 쉽고 읽기 좋게 글을 쓰셨다. 말하듯이 쓰는 것이 방송원고의 

특징이고, 그렇게 오랫동안 글을 써온 체험에서 나온 글이 아니었나 싶다. 평생을 수필과 함께 살 

았고, 수많은 문하생을 등단시킨 분이셨기에 선배님이 가신 자리가 너무 커 보이는 것 같다.


- 백봉기 ‘수필이 있어 행복했던 김학 선배님’

 

 

수필가 김학은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20015년 2월까지 강의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강의를 시작한 이듬해인 2002년 수강생들이 행촌수필문학회(杏邨隋筆文學會)란 동인회를 만들어 

행촌수필문학상 시상식과 함께 1년에 두 권씩 어김없이 동인지를 펴내고 있다. 

동인지 ‘행촌수필’은 2023년 8월 현재 42호까지 발간(상반기 나왔어야 할 43호는 보조금을 받지 못해 연말 발간으로 미뤄진 상태다.)했다. 지도교수 김학은 “나는 그 수강생들에게 시범을 보여 주어야 하기에 더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진 바 있다.

약 15년 동안 이어진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을 정년퇴직으로 물러난 직후인 2015년 3월부터 김학은 신아문예대학(전주신아출판사 2층)에서 수필을 지도했다. 2021년 1월 갑작스럽게 별세하던 그때까지다. 그 외 2008년 1월부터는 전주안골노인복지관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했다. 

또 2011년 2월부터는 전주꽃밭정 이노인복지관에 수필창작반을 개설하여 7년 반 동안 수필을 지도했다. 우리 고장 전북을 한국수필의 메카로 만들고 싶다는 간절한 꿈을 이루기 위한 김학의 독보적인 수필인생이라 할 만하다.

이 시기에 김학이 펴낸 수필집은 ‘아름다운 도전’·‘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수필아, 고맙다’·‘나는 행복합니다’·‘하여가&단심가’·‘쌈지에서 지갑까지’·‘하루살이의 꿈’·‘지구촌 여행기’ 등이다. 이 밖에 수필 선집 ‘가슴앓이’·‘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손가락이 바쁜 시대’ 3권과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2권이 있다. 김학의 수필세계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두 권의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자.

두 권의 수필평론집은 사실은 발문을 모아 놓은 것이다. 저자 스스로 “책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이나 또한 그에 관계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일컫는 발문을 모아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수필평론집이라고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라고 밝힌 바 있지만, 수필가 김학 아니면 낼 수 없는 저서라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발문이 저자의 청탁을 받아 쓴 글이라서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평론집은 아니다. 본격 평론에서처럼 비판 기능을 거의 볼 수 없는, 이른바 주례사비평처럼 그야말로 미사여구적 성격이 강한 발문이어서다.

 


 

두 권에 실린 발문의 주인공들을 ‘차례’ 순서로 살펴보면 김동필·김영곤·김용관·김재희·김정길·백송룡·손경호·안세호·양용모·유영희·이광우·이윤상·임광순·이용만·이재인·이종승·이종택·이태현·이한기·정주환·장병선·조명택·최선옥·하재준(이상 『수필의 맛 수필의 멋』)·김상권·최화경·김정길·이수홍·조윤수·국중하·이재인·정원정·고재흠·석인수·박귀덕·유영희·김병규·김희선·한상렬·김영옥·이용미·김길남·황점복·이의·최선옥·조종영·형효순·김세명·김재희·박순희·서상옥·정장영·이기택·이신구·최준강·김금례·김재환·김형중·김백경(이상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등이다.

김학이 발문을 써준 수필가들을 보면 전주를 비롯한 전북 출신이 많지만, 서울·경기·경북·충남·전남·인천·경남·충북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만큼 단순히 우리 지역을 넘어 ‘전국구’였던 수필가 김학이었음을 새삼 알 수 있다. 특이한 건 수필집이 대부분이지만, 시집 발문도 있는 점이다. 김형중·김백경 시집이 그것이다. 아쉬운 건 2012년 1월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을 펴낸 이후로도 쓴 발문들이 있는데, 유고집 발간 소식은 아직 접하지 못한 점이다. 실제로 내가 읽어본 것만 해도 양영아 수필집 『슴베』(2014), 최상섭 수필집 『청동주전자』(2017), 이진숙 수필집 『바람과 새들이 준 선물』(2020) 등 3편이나 된다.

 


 

이렇듯 전주와 전북, 나아가 한국 수필문학사 한 페이지를 뚜렷하게 장식할 그런 활동에 걸맞게 김학 수필가는 스스로 “상복이 많은 편이었다”고 술회했듯 많은 상을 받았다. 

연도순으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수필상(1987)·전북문화상(1988, 1996년부터 ‘자랑스러운전북인대상’으로 바뀜)·전북수필문학상 (1991)·전북문학상(1992)·사선문화상(언론부문)·백양촌문학상(1994)·신곡문학상대상(1995)·영호남수필문학상대상(1997)·동포문학상본상·임실문학상대상·대한민국향토문학상(2000)·펜문학상·전주시예술상(2003)·연암문학상대상(2007)·목정문화상(2009)·한국현대문학100주년기념문학상수필집부문금관상 (2012)·원종린수필문학대상(2018)·자랑스러운 삼계인상(2019)·전북펜기림상(2021) 등이다.

 


 

 

3. 김학의 수필세계


앞에서 말했듯 김학이 남긴 수필집은 선집을 빼더라도 모두 14권에 이른다. 방대한 분량의 김학 수필의 세계를 이 한정된 지면에서 100% 다 살피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한계를 안고 들어갈 수밖에 없지만, 우선 김학 수필세계가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일상적 이야기의 문학성이다. 

1980~1990년대 발간한 『철부지의 사랑연습 』·『춘향골 이야기 』·『오수땅 오수사람들』의 수필세계가 그렇다. 단, 작품 인용의 출처 표기는 편의상 각각 ‘철’·‘춘’·‘오’의 제목 앞 글자로 함을 미리 밝혀둔다.

 

 

1) 일상적 이야기의 문학적 형상화

일상을 담지 않은 문학이 없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듯 특히 수필의 경우, 제재의 다양성이라는 일반적 성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오히려 일상의 문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이다. 김학의 수필도 예외는 아니다. 

그의 수필세계는 우리의 인생살이 전반에 걸쳐 세세한 것까지를 담아내고 있다. 가령 어머니·처자식·제자등의 사람은 물론 

사랑·인정·고향 등의 파토스적 정서와 나팔꽃·모과나무·감자 등의 자연, 심지어 손목시계·파리·무좀에 이르기까지 그의 수필세계는 진부할 정도로 일상의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진부한 신변잡기적 제재들은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고 있는가?

 


 

여기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언어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학은 언어라는 매개물에 의해 표현된다. 

물론 이때의 언어는 일상어와 다르다. 요컨대 단순히 지식이나 사물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콧등시큰한 감동을 샘솟듯 일어나게 해주는 언어이다. 즉 문학에서의 언어는 형상화된 구체적인 것이어야 한다. “김학이 자기 생활주변의 잡다한 일들을 수필로 쓰면서도 독자의 가슴 언저리를 울려주는 형상화된 글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러한 인간성 때문이라 느껴진다.”(『철부지의 사랑연습』 수록)는 정덕룡 수필가 의 주장이 와닿는데, 김학의 수필이 문학성을 획득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아래 예문을 보자.

 

 

행랑채 초가지붕 위에 빨간 고추와 박덩이가 가을 햇살을 부여안고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다.



- ‘철’, ‘아버지, 그 슬픈 기억들’

 

 

위 인용은 유년의 추억 속에 아련히 묻혀버린 아버지에 대한 정한을 그린 수필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김학이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하기 위해서 얼마나 외로운 영혼과 많이 만나는지 그 흔적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경기대학교 교수로 정년퇴직한 이재인 소설가 겸 수필가의 “특히 그의 글에서는 그가 수필을 대하는 뜨거운 애정과 오직 수필만을 위해 살아왔고, 앞으로도 수필만을 위해 살아가려는 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집념과 애착이 문맥마다 흥건하게 스며있”(‘철부지의 사랑연습’ 수록)다는 말은 음미해둘만하다. 실제로 김학은 자작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나는 수필의 소재를 내 생활주변에서 찾는다. 놓쳐버리기 쉬운 사소한 일상일지라도 수필이라는 

안경을 쓰고 살펴보면 좋은 소재가 되는 수가 많다. 소재가 발견되었다고 바로 원고지에 옮기지는 

않는다. 노트에 메모를 하고서 꾸준히 자료를 모은다. 여과를 시킨다.


 

 

문학뿐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이 각고(刻苦)의 노력없이 창작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필에 대한 작가의 이런 태도는 우선 신뢰스럽다. 신뢰스러운 것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문학적 형상화에 값하기도 해서다. 

한편으론 수필문학이 갖춰야할 유머나 위트감각이 뛰어나 김학의 수필들은 싱그러움을 한층 더해준다. 

수필에서 의 위트는 인생의 반짝이는 단면을 예리하게 또는 생생하게 드러내는 절대요건이다. 경쾌한 모멘트도 중요하지만 

신선한 충격, 다같이 아는 뻔한 것이면서도 뻔하지 않은 그 무엇을 잡아내는 일종 메스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래 예문을 보자.

 

 

내 코 고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하기에 이처럼 야단들인가 싶어 언젠가 한번은 아내에게 녹음을 부 

탁해본 일이 있다. 내가 들어봐도 과연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금메달은 내 차지가 틀림없으리라.

 

 

위 인용은 자면서 버릇이 된 코 고는 소리에 얽힌 일화를 소개한 수필의 일부분이다. 언뜻 보면 지겹고, 짜증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들인데도 독자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다. 오히려 코 고는 사람 곁에서 자는 많은 사람들의 현장에서의 짜증을 고소(苦笑)로 환기시켜주고 있어서다. 바로 위트의 힘이다. 

김학의 수필들은 이런 위트와 함께 구조적 미학을 거느리기도 한다. 흔히 수필은 형식(form)이 없다고 말한다. 무형식의 형식이 그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쓸 수 있다고 해서 수필이 되지 않듯 일정한 형식이 없을 수 없다. 다만 소설의 5단계 또는 4단계 구성처럼 도식화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김학의 수필도 예외는 아니다. 잘 살펴보면 뚜렷한 3단계의 구조로 짜여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서두 부문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대상을 관찰하는데, 이것은 거의 예외없이 자기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사한 다음 결국엔 우리 모두의 객관적 세계로 환치되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이는 “대상(사물)의 존재파악으로부터 그것은 소재가 되고, 그 소재에서는 정서를 얻게 되며, 그 정서는 상상·사상과 함께 미적으로 용해되면서 형식(수필)을 취하게 된다.”(장백일, 수필과평론, 수필문학. 1988.11.)는 장백일의 수필창작론에 딱 들어맞는 수필 짓기다. 「우산, 그 사랑의 밀실」·「아침운동」·「파리」·「눈뜬 장님」(이상 『철부지의 사랑연습』 수록, 「우리들의 광대 추송옹」·「선생님, 그 위대한 존재」(이상 『춘향골 이야기』 수록) 등은 얼른 생각나는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그중 두 개 작품만 서두부터 만나보자.

 

 

1. 목련이 하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던 여름 어느 토요일 오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 

었다. 간밤부터 비실비실 내리기 시작한 비가 어느새 장대처럼 굵어졌다.


- ‘철’, 「우산, 그 사랑의 밀실」


2. 우리 하숙집에는 10여 명의 하숙생이 있다. 순경·동직원·세무서와 우체국 과장·은행원·나무장 

사·언론인·회사원 등 직업도 다양하다. 그런데 아주머니에게는 별난 고집이 있다. 빈 방이 있는데 

도 교육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춘’, 「선생님, 그 위대한 존재」

작품을 온전히 읽어보면 분명해지지만, 그러나 지극히 자질구레한 일상의 이야기들이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사변적인 얘기의 변죽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무를 보고도 흔들리는 마음의 소리이며,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혹은 싱그러운 산의 새벽안개와 심원한 계곡의 청정한 물을 보는, 그리하여 얻는 신선한 충격에 값한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제 두 작품의 결미부분을 보자.

 

 

1. 세상을 사노라면 예기치않게 비난·중상·모략 같은 사나운 비를 만나는 수가 있다. 

그럴 때면 그것들을 막아줄 우산이 그립기 마련이다. 어쩌면 사랑일 지도 모른다.


- ‘철’, 「우산, 그 사랑의 밀실」




2. 나이가 들어가면서 교직에 대한 향수가 짙어간다, 젊은 혈기로 뛰쳐나온 교단이 새삼 그리워진 

다. 나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성역(聖域)이 교단이다. 그런 미련 때문에 내가 교육자를 좋아하는지 

도 모른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아무리 교육자를 싫어 한다 해도 나는 그럴 수가 없다.


- ‘춘’, 「선생님, 그 위대한 존재」

 

 

 

대부분 작품이 그렇지만, 위에 인용된 수필의 구조적 미학은 매우 탁월하다. 즉 1에서 비가 내림(기)→우산에 대한 어머니의 꾸중과 학창시절(서)→우산이 갖는 기능의 함축적 형상화와 비가 멈춤(결)의 구조는 김학이 지극히 일상적인 신변잡사를 소재로 취하면서도 이야기의 나열에 그치지 않는, 문학다운 수필을 창작하는데 부족함이 없음을 보여준다.

2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숙집 아주머니가 교사를 하숙생으로 받지 않음(기)→교사친구들과의 에피소드(서)→교직에 대한 향수와 하숙집 아주머니의 싫어함과 나의 그러지않음(결)의 구조 역시 사물관조와 자아투사의 변증법적 결구로 손색이 없다. 이렇듯 김학의 수필은 “객체를 통해서 전체로, 주관을 통해서 객관으로, 또 모든 개체의 이야기로써 전체를 상상적으로 암시하여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해석을 독자에게 체험시키는 작품”(이현복, 수필의 문학성. 수필문학론집, 수필문학사, 1988.10.1)인 것이다.

 

2) 정확한 문장의 표현

무엇보다도 김학 수필의 미덕 내지 강점은 문학으로서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문학으로서의 수필에 값하는 첫 번째 요소가 표현 내지 정확한 문장이다. 수필가 김학의 이력을 살펴보면 사학 전공의 방송인이다. 요컨대 정식으로 문장 수련을 쌓은 수필가는 아니란 얘기다. 이쯤해서 직접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안심대 못 미쳐서 우러러본 배꼽산 비로봉은 50년 만에 찾아뵈온 남녘의 관광객들을 반겨 맞지 않 

고 구름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금강산은 풍진 세속을 외면한 채 구름과 희롱하며 즐기는 

듯 보였다. 껴안고 사랑의 삼매경에 빠진 신랑신부마냥 비로봉은 때로는 구름과 입맞춤을 하고, 때 

로는 구름의 치맛자락을 벗기기도 하고, 또 때로는 구름이 비로봉의 목에 루주 자국을 남기는 듯싶

기도 했다. 금강산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가 그러하니 그 밖에 자잘한 봉우리들도 덩달아 흉내내기에 바빴다.


- ‘오’,  「금강산, 그 아름다운 패션의 산」


 

위 인용문은 금강산 기행을 담은 수필의 일부이다. 한마디로 비로봉에 구름이 끼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로봉에는 구름이 끼어 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들이 마치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수사법을 통해 그런 효과를 거두고 있다. 특히 “구름이 비로봉의 목에 루주 자국을 남기는 듯싶기도” 같은 참신한 수사에 이르러선 표현방식의 세련됨이 김학 수필의 빼어난 미덕임을 확인하게 된다. 말할 나위 없이 이런 표현은 노상 갈고 닦는 문장 수련이 뒤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에 의문이 생겨난다. 의문은, 그러나 너무 싱겁게 풀려 버린다. 김학 수필 곳곳에서 드러나거니와 정확한 문장쓰기가 ‘밤의 여로’라는 프로를 맡았던 방송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 배경이야 어찌됐든 확실히 김학 수필은 정확한 문장의 표현이 무엇보다도 강점이다. 또 어쩌다 그런 것 이 아니라 대부분의 작품이 정확한 문장과 적절한 수식의 표현으로 이루어져 그런 주장을 설득력 있게 해준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정확한 문장은 비단 수필뿐 아니라 모든 글의 기본이다. 문학이 언어의 예술이고, 수필 역시 당당히 그것의 한 장르일진대 일러 무엇하랴만 안타깝게도 수필문학이 보여온 저간의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김학 수필의 표현 내지 정확한 문장이 빛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친김에 그런 표현을 몇 개 더 만나 보자.

 

 

가을은 벌써 대문을 지나 문지방을 넘어서려 한다.

미국 여행길에서 보고 느꼈던 온갖 기억들이 추억의 창고문을 열고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 ‘오’, 「미키 마우스」




높낮은 산들이 강강수월래에 맞춰 원무를 추고, 산허리를 감돌아 흐르는 냇물이 도란도란 밀어를 

속삭이며 섬진강으로 합수(合水)되는 곳이다.


- ‘오’, 「내 고향, 임실」




그 어머니가 흘린 한숨을 모았다면 한강의 수위가 더욱 높아졌을 것이고, 그 어머니가 흘린 한숨을 

모았다면 허리케인에 버금가는 태풍이 되지 않았을는지…….


- ‘오’, 「걱정 끝 기쁨 시작」



위 인용들은 각각 의인법·은유법·과장법 등 적절한 수사적 표현으로 문학적 문장에 값하고 있다. 이외에도 “아파트는 사색의 생산 공장”, “가슴속의 물레방아”, “내 기억의 금고”, “고향은 추억의 박물관”, “내장산은 가슴이 넓은 여인” 등 은유적 수사가 눈에 들어온다. 수필에 설명의 표현 방식이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이다. 논증도 마찬가지다. 서사나 묘사 위주의 표현 방식이라야 비로소 문학으로서의 수필이 될 수 있다.

 

3) 감동 혹은 ‘발칙한’ 모멘트

형식적 요소에 핀트를 맞춘 앞에서의 논의에 이어 이제 문학의 또 다른 축인 내용면을 살펴보자. 내용과 형식면 고찰이라는 논의의 일반적 순서가 바뀐 것은 그만큼 김학 수필의 형식미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연륜이나 경륜을 앞세우긴 할망정 모든 글의 원천적 힘이라 할 문장·문단 등 형식적 요소가 미흡한 수필이 난무하는 수필문학계의 현주소 내지 자화상을 은근히 꼬집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스며 있기도 하다. 노상 하는 말이지만 감동이나 문학성은 독서 그 이후의 결과물 내지 문제이다. 

문장이 부실하면 독자들이 끝까지 수필 읽는 걸 포기하고 마는데, 도대체 감동이 ‘한 근에 얼마’란 말인가! 그렇다고 표현방식이나 정확한 문장만으로 문학으로서의 수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김학 작품이 문학으로서의 수필에 값하는 두 번째 요소는 일상적 이야기를 늘어놓되 단순한 나열로 그치지 않는 점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듯 김학 수필 대부분은 일정한 이야기(서사성)를 갖고 있다. 물론 그냥 이야기의 나열은 문학성 획득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까 김학 수필은 독자에게 선명한 기억을 남기는 뚜렷한 이야기를 정제된 문장으로 의미화시켜 필연 문학성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사를 한 뒤 어느 날, 어머니는 가슴에 담고 계시던 걱정 한 가지를 풀어 놓으셨다. 

“돌아가신 조상님네들이 명절날이나 제삿날 찾아오실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

“아파트는 워낙 집 찾기도 어렵고, 엘리베이터도 안 타보신 분들 아니냐?”

곰곰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말씀도 그럴 듯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사시다 귀천(歸天)하신 

조상님네들이 아니던가.


- ‘오’, 「아파트에서 만난 고향의 소리」


 

불쑥 인용부터 했는데, 이 글은 『오수땅 오수사람들』에 실린 수필의 일부이다. 조금 자세히 내용을 살펴 보자. 난생 처음 아파트에서 살게 된 저간의 경위와 심정 등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위 인용문은 그 중 “이사를 하자고 결단을 내리셨”던 어머니가 뜻밖의 걱정을 털어놓는 대목인데, 그것이 무릎을 탁 치게 한다. 시대의 흐름에다가 그저 편리하여 아파트 생활을 하는 단순한 일상적 이야기 이상의 깊은 울림을 준다. 이러한 깊은 울림이 문학으로서의 감동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수필을 끝까지 꼼꼼히 읽다 보면 그보다 더 묵직한 주제의식과 만나게 된다. 주거 형태가 어떻든, 어디에서 살 건 행복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성이 정제된 형식미를 바탕으로 인생의 잡다한 온갖 현상들을 문학이라는 프리즘에 굴절·반사시켜 독자의 가슴을 때리고 울리는 감동임을 새삼 말할 필요는 없으리라. 수필집 『오수땅 오수사람들』에 실린 70편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상적 이야기의 문학성’이 김학 수필의 미덕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이와 함께 참신한 소재 역시 김학 수필이 문학으로서의 수필에 값하는 요소이다. 고향·가족·자연·직장·친구 등 여느 수필가들이 취하는 일상적 이야기이면서도 김학 수필에는 일상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소재로 끌어들이는 유니크한 기교가 있다. 가령 「군산에 가면」을 예로 들어 보자. 「군산에 가면」은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쌓아 놓은 노적가리”인 군산에 대한 소묘이다. 일정한 이야기의 사건을 긴밀한 구조에 의해 전개하지 않고, 군산에 대한 이런저런 인상을 병렬식으로 추억하고 있어 한 번 읽고도 기억하기가 쉽지 않지만, 아래 인용을 보자.

 

벽에 붙어 있는 차림표에서도 나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가 있었다. 

‘진지 한 그릇 1,000원.’

여느 식당이라면 ‘공기밥 한 그릇 1,000원’이라고 써 붙여야 예사인데 그 곳에서 

그렇지 않았다.


- ‘오’, 「군산에 가면」


 

여기서 감탄스러운 것은 공기밥을 ‘진지 한 그릇’이라고 써붙인 식당의 기발한 발상이 아니다. 그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수필에 접목시키는 작가정신이 감탄스럽다. 다시 『오수땅 오수사람들』에 실린 「전하, 아니 되옵니다」를 만나 보자. 제목에서 짐작되듯 「전하, 아니되옵니다」는 한마디로 역사 드라마 시청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냥 재미있게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완전한 민주주의 시대라 할 만한” 오늘날의 닫힌 언로에 일침을 가한다. 요컨대 전제군주의 왕조시대 어전회의에서도 ‘전하 아니되옵니다’라는 반대 의견이 있었는데, 오늘날 “국무회의 모습에서는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참석한 국무위원들은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발칙한’ 모멘트의 꼬집기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위에서 다루지 않은 김학의 수필세계는 『김학수필문학론』에 수록된 전국 각지의 평론가·수필가의 글을 통해 대략(大略)해볼 수 있을 듯하다. 먼저 “후반기 그의 수필의 경향을 보면 한 가정의 어른으로서 가족에 대한 사랑과 행복, 수필창작 지도교수로서 수필창작과 수필가의 자세, 사학자로서의 역사의식과 전통에 대한 온고지신, 방송인으로서 다양한 매체를 통한 건강한 사회의 미담과 인간학, 여행에서 깨달은 높은 식견, 창의적인 발상과 비유로 승화한 작품 등이 주를 이룬다”(오경옥 수필가)는 비평이 도움되리라 생각한다.

김학 수필집 『아름다운 도전』에 대해 쓴 비평에선 “신문 가십거리가 소재가 되기도 하고 남들이 그냥 흘려 버리기 쉬운 에피소드가 몇 개 모여 이미지와 메시지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는 주변의 소박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한 평범한 것들을 비범하게 만드는 재능을 보여주며 발견과 의미부여의 광채를 발하게 한다. 이러 한 요소가 김학 수필의 개성이 되고 있다.”(정목일 수필가)는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독자들의 가슴에 순수수필이 가야 할 지표를 제시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신선한 목소리를 갖고 있기에 그의 수필은 그만큼 강렬함과 지순한 문학적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수필문학의 순도 높은 창조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본격 수필가로서 지녀야 할 마땅한 창작 정신이라 하겠다.”(한상렬 문학평론가)는 김학 수필집 『호호부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4. 불광불급(不狂不及)은 이제 우리의 몫


지금까지 한정된 원고량 안에서 김학 수필인생과 문학세계를 살펴보았다. 한 마디로 수필에 미친 김학의 인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김학은 “수필은 아내보다 더 가까운 나의 평생동지요, 영원한 내 삶의 반려자라고 생각한다. 수필이 내 곁에 있는 한 나의 행복과 기쁨은 보장된다. 수필이 나와 함께 있는 한 나는 결코 외로울 수가 없다. 내가 많은 예술장르 가운데서 문학을 선택하고 그 문학 중에서도 수필을 치켜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축하의 박수라도 보내고 싶다. 나는 후배들에게 불광불급(不狂不及)이란 교훈을 전해주려고 노력한다”(두루미사랑방, 2008.3.8.)며 자신의 수필인생에 대한 소회(所懷)를 밝힌 바 있다.

김학의 수필세계는 거의 예외없이 일상적 이야기의 소재이면서도 문학성을 획득하는 미덕을 지닌다. 특히 일련의 수필에서 드러나는 사물에 대한 관조와 자아투사의 변증법적 처리, 수필가 오창익이 「미래문학으로서의 새로운 지평」(『수필문학』 창간호, 1988.9.)이라는 글에서 말한 개념으로 ‘의미화’(대상을 관찰함으로써 자기화하는 개성적인 눈이요, 마음)는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김학의 빼어난 작가정신의 소산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언어면에서 보인 문학적 형상화와 정확한 문장, 위트 감각과 구조적 미 학 역시 김학 수필이 문학에 값하는 중요 요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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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저서(김학수필집ㆍ수필평론집 포함)

김학수필문학론, 장세진편, 신아출판사, 2022.1.28.

수필문학론집(수필문학별책부록), 수필문학사, 1988.10.1.

철부지의 사랑연습’, 교음사, 1982.6.25.

춘향골 이야기’, 신아출판사, 1986.9.5.

호호부인’, 미래문화사, 1992.4.15

오수땅 오수사람들’, 자유문고, 1999.10.25

아름다운 도전’, 수필과비평사, 2003.7.17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대한문학, 2006.6.19

수필아, 고맙다’, 대한문학, 2010.9.15

하여가&단심가’, 수필과비평사, 2015.4.30

쌈지에서 지갑까지’, 도서출판 북매니저, 2017.7.25

하루살이의 꿈’, 도서출판 청명, 2019.5.18

지구촌 여행기’, 수필과비평사, 2019.8.15

수필의 맛 수필의 멋’, 대한문학, 2007.5.19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 도서출판 북매니저, 2012.1.31

 

2. 잡지

전북수필’ 17, 전북수필문학회, 1986.7.20

격월간 수필문학창간호, 수필문학사, 1988.9.1

격월간 수필문학’ 2, 수필문학사, 1988.11.1

전북문단’ 26, 전북문인협회, 1998.12.1.

전북문단’ 28, 전북문인협회, 1999.12.1.

 

3. 인터넷

두루미 사랑방, 2008.3.8.

이종근의 한국문화스토리, 2010.5.23.

DSB한국문학방송, 2012.3.13

 

 

 

 

 

김학 연보

 

 

김학(1943~2021) 수필가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의 유아 사망으로 장남이 됨. 호는 삼계(三溪).

수필집 14(방송수필집 2권 포함), 수필선집 3, 수필평론집 2권 등 총 19권의 저서를 남김.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ㆍ신아문예대학 등 여러 곳에서 수필쓰기 지도교수로 봉직해 수많은 수필가를 배출했음.

 

1943(105) 부친 김옥기와 모친 이복남의 차남으로 태어남.

1955년 삼계초등학교 졸업

1958년 오수중학교 졸업

1961년 전주상업고등학교(현 전주제일고등학교) 졸업

1966년 전북대학교 사학과 졸업과 동시에 ROTC 4기로 육군소위 임관

1968(6) 육군 중위 전역

1969(3) 전주해성고등학교 교사

(9) 군산서해방송 프로듀서 입사

1974(1) 유영금과 결혼(정수ㆍ창수 2남과 선경 1녀를 둠)

1975(7) 군산서해방송 제작부장

1978(3) 방송수필집 밤의 여로발간

1979(8) 발기인 참여로 전북수필문학회태동의 밑돌을 놓음

(10) 방송수필집 밤의 여로2’ 발간

1980(8) ‘월간문학31회신인작품상 당선(수필 전화번호’)

(12) 5공화국 방송통폐합으로 KBS남원방송국 전보

1982(6) 수필집 철부지의 사랑연습발간

1984(7) KBS남원방송국 방송부장

1986(9) 수필집 춘향골 이야기발간. 전북수필문학회 회장.

1988(12) 29회전라북도문화상(문학부문) 수상

1990(2) KBS전주방송총국 제작부장

1991(12) 4회 전북수필문학상 수상

1992(4) 수필집 호호부인발간. 12월 제4회전북문학상 수상

(6) KBS군산방송국 방송부장

1993(4) KBS전주방송총국 편성부장

1994(9) 8회 사선문화상(언론부문), 12월 제6회백양촌문학상 수상

1995(12) 1회신곡문학상대상 수상

1997(8) 1회 영호남수필문학상대상 수상

1998(2) 한국문인협회전북지회(전북문인협회) 회장

1999(10) 수필집 오수땅, 오수사람들발간

2000(2) 15회 동포문학상본상, 12월 임실문학상대상 수상

2001(3) 수필선집 가을앓이’(교음사) 발간

(9)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반 지도교수 출강

(12) KBS 전주방송총국 정년퇴임

2003(7) 수필집 아름다운 도전발간, 9월 제19회펜문학상 수상

(12) 14회 전주시예술상(문학부문) 수상

2006(6) 수필집 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발간

2007(5)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발간

(11) 1회 연암문학상대상, 12월 대한민국향토문학상 수상

2008(8) 수필선집 자가용은 본처 택시는 애첩’(좋은수필사) 발간

2009(12) 7회 목정문화상(문학부문) 수상

2010(3) 고교 작문교과서(중앙진흥교육연구소)수필 그 30초 전쟁수록

(9) 수필집 수필아, 고맙다’(등단30주년 기념수필집) 발간

2012(1) 수필평론집 수필의 길 수필가의 길발간

(7) 수필집(고희기념) ‘나는 행복합니다발간

(3) 현대문학100주년기념문학상(수필집 창작부문 금관상) 수상

2015(2)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반 전담교수 퇴임

(3) 신아문예대학 수필반 전담교수 취임

(7) 수필집 하여가&단심가발간

2017(7) 수필집 쌈지에서 지갑까지발간

2018(9) 14회 원종린수필문학상 대상 수상

2019(5) 수필집 하루살이의 꿈’, 8지구촌 여행기발간

(10) 자랑스러운 삼계인상 수상

2020(6) 수필선집(등단40주년기념) ‘손가락이 바쁜 시대발간

2021(1) 1회 전북펜기림상 수상

(1) 28일 영면(모악추모관 안장)

(11) 12일 유족에게 전북수필문학회공로패 증정

2022(128) 1주기추모문집 김학수필문학론’(장세진 편저) 발간

2023(10) ‘전주 백인의 자화상작고작가 세미나(전주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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