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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문화재단 농사짓고 판화 새기며 정직한 노동을 추구한 판화가, 지용출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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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고 판화 새기며 정직한 노동을 추구한 판화가, 지용출
  • 2024-06-27 11:15
  • 조회 453

본문 내용

 

 

 

 

 

 

 

 

 

 

 

농사짓고 판화 새기며 정직한 노동을 추구한 판화가, 지용출



김미선 전북대학교 초빙교수


지용출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쉬운 이별로 그를 떠올린다. 서울에서 자란 지용출은 1994년 그가이제 막 서른을 너머 선 무렵 전주에 왔다. 그리고 사고로 유명을 달리할 당시는 작가로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을 47세의 나이였다. 더욱이 그는 열두 번째 개인전을 불과 며칠 앞두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지용출은 추계예대 재학 시절 ‘사회변혁운동’의 일원으로, 혹은 선봉에 서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주먹을 쥔 판화와 걸개 그림을 그렸다. 졸업 이후 전주에 정착하며 1997년부터 14년 동안 열한 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남다른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그의 활발한 창작 의욕과 순수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예술적 인상은 주변 사람들을 자극했고, 이에 화답하듯 그는 전주에서 ‘전북민족미술인협회’와 ‘전북판화가협회’ 회장, ‘문화연구창’ 이사를 지내며 다양한 활동으로 전북미술의 발전에 힘을 보탰다.

세상 어느 누군들 미련과 애틋함 없이 떠나보낼 수 있겠냐만 그와의 이별은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계속 남는다. 짧고도 강렬하게, 그가 남긴 발걸음이 컸기에 더욱 황망하다.

 


 

 

1. 사회변혁운동 작가로서의 형성 배경: 1980년대 미술판 


“예술가는요,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확실해야 합니다.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작가가 예술작품을 통해 미적인 아름다움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회참여를 해야 하는 거예요. 예술가들이 무조건 자기만족을 위해서 ‘유희성’을 추구하다 보면 ‘나 홀로 예술’이 될 수 있어요. 예술이 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또 참여할 때 사회와 문화의 질이 한 단계 올라 갈 수 있거든요. 결국 대중에 대한, 예술의 공공성에 대한 작가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 전북일보, 2008.11.3.



지용출(池龍出, 1963~2010)은 ‘사회변혁운동’, 즉 민중문화운동이 뜨거웠던 1980년대에 20대를 보냈다. 비록 그가 6수 끝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던 1980년대 후반은 그 힘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여전히 민중문화운동은 그 시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세력은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제5공화국을 건설했다. 그들은 군사쿠데타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내고 국민적 합의와 동의를 끌어내기 위해 집권 초기부터 과감한 문화정책을 펼쳐나갔지만, 민간에서는 군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민중의식으로 무장하고 기득권 세력에 저항하는 민중문화운동을 일으켰다. 다시 말해 1980년대 대학생들과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군사정권의 모순과 불합리성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 이념이 급격히 파급되어 있었고, 이에 미술가들도 마르크스주의에 근간을 두는 사회과학 학문을 현실 변혁을 위한 투쟁적 정신과 실천 강령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의 목표는 민중 정신의 숭고한 가치를 환기하고 전두환 군사정권을 타도해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이었다. 여기에 미술은 시각적 장르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일반 대중에게 민중주의, 민중의식, 민중성을 전달하며 깊숙이 동참했다. 즉 민중문화운동은 군사정권에 반대하던 교수, 학자, 연구원, 지식인들을 통해 촉발되었지만, 이것을 대중적으로 널리 확산시킨 사람들은 대학생들과 예술인들이었다.

 

 

그러나 처음 ‘민중미술’을 일으킨 엘리트 미술계와 민중문화운동의 촉발점은 달랐다. 정확하게 민중미술은 1970년대 이후 국내 미술계의 권위로 군림해 온 ‘단색화’를 비판하면서 출발했다. 

 

이들이 보기에 모더니즘 추상계열의 단색화는 대중과의 소통을 
외면하고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로 일관한 채 현실을 철저히 외면한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작가들은 미술과 정치 현실을 동일시하며, 모더니즘 추상미술이 군사정권과 결탁했다고 주장하면서 미술계의 반성을 촉구했다. 결론적으로 정치 현실과 결합한 개혁적 요구는 미술가들에게 미술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현실 참여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이를 토대로 민중미술가들은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지배계급의 원리에 따른 모순과 불합리에 저항하면서 문화정치 성격의 “우리의 삶이 있는 미술을 이룩”하고자 했다. 
이에 탄생한 민중미술 소집단이 ‘현실과 발언’(1979)과 ‘임술년’(1982), ‘두렁’(1982),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1980)와 같은 그룹이다.⑴
결론적으로 민중미술은 기존 미술계에 대한 반발과 함께 1980년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분단과 외세 극복을 위한 민족주의 열풍, 사회계급의 평등에 대한 욕구가 만들어낸 시대적 산물이었다. 이들은 이데올로기적 권력투쟁의 성격을 바탕으로 미술로써 사회 현실을 변혁하고자 했다. 이에 민중문화운동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민중의 삶이 지니는 사회적 가치 체계를 연구했다. 이들에게 민중이 주체가 되는 세상에서의 미술은 이상향이 아닌 구체적 현실이어야 했으며, 순수한 문화적 유희를 좇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사회변혁운동’이란 이름으로, 국가 기득권 세력에 대한 문화적 투쟁으로서 저항 논리를 계발하고 발전하여, 노동과 노동자의 삶을 예술적으로 발현한 사회참여예술로 확장되었다.1980년대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서 정치적 격동기를 보낸 대학생 지용출에게 ‘사회변혁운동’이란 자신과 자신의 가족사를 대변하며 일체적 공감대를 형성하던 뜨거운 울분과 같았다. 그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는 젊은 혈기로 달아올랐다.

2. 생애: 유년기와 서울 학창 시절

지용출은 1963년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후 가족들은 지용출이 다섯 살이었던 무렵, 아버지 지명환을 따라 서울 동대문구 중곡동으로 이사하였다. 지용출의 아버지는 평생 노동자로 서울에서 폐깡통, 고철 등을 세척해서 재활용하는 공장을 운영하며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노동 생산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었다. 즉 그들은 판매와 이윤을 취하는 데 어떤 권한도, 부도 분배받지 못한 모순된 구조 속에 있었다. 이것은 일반적인 노동자의 모습이었고, 그들은 거친 노동판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해야만 했던 우리네 아버지의 흔한 모습이었다. 지용출은 아버지의 삶과 노동에서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의 의식과 연민으로 새겨졌고, 1993년 『민족 미술』 특별호에 〈아버지의 초상〉(도판3)을 기고하게 된다. 작품에서 그는 아버지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당한 아버지의 평생 노동”의 상징적 단편처럼 표현했다. 즉 그는 노동자로서의 존경과 함께,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아들의 학업에 도움을 주지 못해 눈물을 보이던 아버지를 담담하게 회고했다.
지용출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그러나 “그림 하면 굶어 죽는다”는 부모님의 완고한 뜻을 따라 성동기계공고로 진학했다. 지용출은 이때를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라고 표현했지만, 다행히 그는 학교에서 미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계속 미술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에 연이은 입시 실패로 좌절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미술학원의 강사로서 활동할 수 있었고, 결국 1989년 6수 끝에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에 입학했다. 당시 낮에는 큰누나를 따라 청계천 평화시장의 공장을 다니며 옷 만드는 일을 하고, 밤에는 미대 입시를 계속 준비하여 이뤄낸 합격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삶과 자신의 노동자로서의 경험은 지용출을 사회변혁운동과 민중미술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했다. 이에 대해 지용출은 2008년 전북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난날을 담담히 술회했다.



“저도 80년대에는 운동 참 많이 했죠. (중략) 학교 다닐 때는 맨날 데모만 한 것 같아요. 이데올로기라는 게 참 무서워요.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을 보면 자신이 살아온 것과 다른 불합리한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운동을 하게 되죠. 
저 또한 가난하게 자라서 앞만 보고 살아오다 대학교 들어가서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었어요. 
그때는 미술이 나름대로 민중운동으로 성공한 것 같아요. 리에 띠 두르고 주먹 쥐고 그런 판화가 많았죠.”

- 전북일보, 2008.6.1.


1992년 대학 4학년 시절, 지용출은 추계예술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여 55.6%의 지지를 받고 당선된다. 그는 당시 “학문과 예술, 생활과 투쟁을 통일적으로 행하는 민주적인 학생회, 학우가 주체가 되는 학생회로 발돋음하겠다” 는 당선 소감을 밝혔다. 이는 1987년에 있었던 대학생 박종철과 이한열 사건 등을 절정으로, 90년대 이후 학생회는 운동권의 색을 최소화 하고 변화된 다른 방향성을 모색하던 마지막 데모 세대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민중미술은 엘리트 중심적인 성격으로 인해 민중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 계몽을 위한 성격이 강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중미술 작가 오윤은 “스스로 우선 민중이 되어야 하며 민중을 위한다는 것은 오만한 발상”이라 말하며 스스로를 낮추는 진정한 민중의식을 강조했다. 또 민중미술의 초기 작가들은 주로 전시장 공간에 국한된 활동으로 민중의 생활공간과 거리가 있었고,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이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이제 민중미술 작가들은 새롭게 노동현장으로, 그리고 실생활로 들어가서 민중성을 구현하고 민족미술의 주체인 민중과 소통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에 1980년대 소그룹을 통해 민중미술을 이끌던 작가들을 중심으로 1985년 ‘민족미술인협회(이하 민미협)’를 창설하였고, 1986년 ‘그림마당 민’을 개관하여 다양한 시도를 계획하였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한 지용출은 그해 서울 민미협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인 민중미술 작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때 모임에서 아내가 될 김미경을 만나게 되었으며, 특별하게 태백 작가 황재형과 교류하게 된다.

황재형은 미술대를 졸업하고 1980년대 초반 민중미술의 소그룹 ‘임술년’의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1982년 권위 있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수상하며 중앙 화단에서 주목받았지만, 그는 엘리트주의의 극복과 노동자의 현실적 삶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태백 탄광촌에 위장 취업하여 광부로서 막장에서의 험한 노동의 일과 후에 그들을 담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탄광촌의 풍경을 꾸밈없이 화면에 담으면서 독자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하였고,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이후에도 계속 태백에 남아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황재형은 태백에서 1988년 노동운동 중에 분신자살한 강원탄광의 탄부를 위한 기념사업회의 이사로 활동하였고, 광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황폐해 가는 태백지역의 문화적 활성화를 위해 벽화사업을 주관하는 등 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93년 황재형을 만난 지용출은 그의 작가적 태도와 진정성에 동의하고 그를 따라 태백에서 함께 생활하며 벽화를 제작했다.(도판5)
결론적으로 민중미술가들은 1990년대 이후 국내외적으로 변모된 정치·경제·문화의 새로운 지형 속에서, 급진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그동안 축적된 성과로서의 내재적 가치를 지속시키면서 새로운 시대 상황과 문화 지형에 적응할 수 있는 ‘자기 변신’을 이루느냐가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이러한 문제는 거의 강박관념일 정도로 민중미술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고민이었고, 때마침 1994년부터 시작된 지용출의 전주 타향살이는 지용출에게 극적인 자기 변신의 기회가 되었다.

3. “진짜 작업은 졸업하고 나서부터”: 전주 타향살이, 정착과 ‘자기 변신’

1994년 지용출은 변산중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된 아내 김미경을 따라 전주에 내려왔다. 그의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였다. 아내에게 전북은 고향이었지만 지용출에게 이곳은 아무 연고도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우여곡절 끝에 지용출은 민미협에서 선배 이기홍을 소개받아 그의 전주 작업실에서 거주하며 낯선 전주 생활을 시작했다.(도판6)
한편 그 무렵 전주에서는 1991년 초 일본 동경 ‘KAMEARI판화공방’ 연수를 다녀온 정미경이 같은 해 작업실 ‘정판화공방’을 개방한 이후 1992년 5월 정미경과 전북대 이상조 교수를 중심으로 ‘판화가 모임’이 결성되었다. 현대 판화미술의 불모지였던 전주에서 정미경과 이상조는 전문적인 판화 제작과 대규모 판화전 참여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학과 미술계, 문화계를 연결시키며 판화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유도했고, 마침내 1993년 이들을 중심으로 ‘전북판화가협회’(초대 회장 정미경)가 창설되어 이제 막 창립전을 마친 상태였다. 이에 지용출은 전북판화가협회에 가입하여 2회부터 출품했다.⑵
전주에서 지용출은 줄곧 자기를 ‘왕십리 토박이’라고 소개했다. 이는 왕십리라는 지역이 당시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지용출 자신도 왕십리 인근 청계천 공장에서 실제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민중미술이 그의 예술의 뿌리임을 이야기한 것이다. 즉 그는 사회개혁운동의 미술가로서 사회 현실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담아내고자 한 자신의 예술의 진정성을 이야기하고 싶던 것이다.



때마침 전주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신학철, 안창홍, 임옥상 등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민중미술의 중심적 미술가를 소개하던 온다라미술관(관장 김인철)이 있었다. 1994년 봄, 이제 막 전주에 온 지용출은 온다라 미술관을 출입하며 지역의 작가들과 교류하고 자신의 민중미술적 세계를 확고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희망과 달리 미술관은 얼마 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이에 여담이지만, 당시 온다라미술관에서 소장하던 민중미술 작품들이 전북지역에서 마땅히 기부할 곳이 없어 안타깝게도 부산미술관으로 유출되고 말았다. 민중미술의 관심과 위상이 달라진 현시점에서 남다른 시각으로 민중미술을 지원했던 온다라미술관의 역사적인 미술 문화 자산이 못내 아쉽다.
어찌 됐든 온다라미술관의 폐관은 지용출에게 적지 않은 심리적인 타격을 주었다. 자칫 그의 민중미술의 방향성을 잃고 방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당시 전북 미술계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었다. 1994년은 ‘동학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전주에서 대규모 기념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전시에 참여하는 지역 작가들 중심으로 몇 년 전부터 ‘전북민미협’ 창립을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던 때였다. 지용출은 동학 100주년 기념전을 돕고, 전북민미협의 창립 준비 과정에서부터 1995년 창립(초대 회장 송만규)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중심적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⑶ 지용출은 전북민미협 창립에 대해 “우리가 민미협을 만들 때만 해도 송만규 형님을 비롯해 다들 색깔이 있었어요. 옛날에는 투쟁이 진보였는데, 운동권 이후 세대들이 말하는 진보란 개념은 우리와 달랐죠. 그렇다고 한 조직 안에서 나는 나대로 갈 수는 없잖아요. 합일점을 찾게 된 것이 지금의 민미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젊은 친구들이 전시장 미술만 지향하는 게 아니라 다행히 사회 어두운 부분에도 관심을 가지고 진보라고 생각하는 현장에 항상 있으려고 하니까 그런 것에 만족한다.”(전북일보, 2008.6.1.)라는 인터뷰를 남겼다.결과적으로 지용출에게 1994년과 1995년은 새로운 인연과 정착, 그리고 기쁨의 해였다. 1994년 아내 김미경과의 결혼으로 큰아들 희구가 태어났고, 전북민미협과 전북판화가협회에서 만난 전북지역의 작가들과 어느덧 끈끈한 인연도 쌓았다. 또 특별히 전주에서 만난 유대수와 제대로 된 공동작업실을 차렸다.⑶ 
용출과 유대수는 1994년 폐관한 온다라미술관의 소장품을 옮겨 쌓는 일을 하면서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해 동학 100주년 기념 대형 걸개그림을 같이 그리게 되면서 빠르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둘은 한 살 차이로 서로에게 닮은 듯 다른 유대감을 느꼈다. 즉 그와 유대수는 판화라는 공통의 전공을 했고, 유대수는 전주가 고향이었지만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비슷한 시기 전주에 내려와 힘들게 전주에서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던 때였다.
유대수는 “타향에서 형이 외로울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며 “80년대 운동권 시절을 함께 버티어 온 의식체계가, 민중미술의 합의와 리얼리즘의 가치에 대한 동의가 그와 나를, 나아가 전북민미협의 모든 사람들을 식구처럼 한데 묶어 의지하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이들은 어려운 시절 서로에게 동질감과 위안이 되어준 둘도 없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에 1994년과 2006년 두 번의 ‘지용출·유대수 판화 2인전’을 개최했고, 지역의 문화정책에 대한 고민을 함께 논의하며 ‘문화연구창’을 통해 활동했다.

한편 (대학 시절의 작품들을 제외하고) 1994년부터 1998년까지가 작가로서 지용출의 첫 번째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그는 미술계에 ‘지용출’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킬 인상 깊은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 이 시기 작가는 1997년 제1회 개인전(서울 나무갤러리)을 시작으로 1998년 2회(전주 서신갤러리), 3회(전주 미주치과)의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회 전시에서 그는 효자동 개발지구 시리즈(도판8·9)를 통해 도시개발이 낳은 삭막한 풍경이나 〈정미소〉(1996)(도판 10)에서처럼 오랜 기간 자연에 방치되면서 폐허로 변해가는 건물들을 보여주었다. 이에 혹자는 이 시기를 민중미술 운동에 열정을 쏟았던 그의 현실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함을 물론, 환경에 대한 성찰과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언급했다.

 


반면 1998년 연이은 2, 3회 개인전에서는 〈갯벌〉(1996)(도판11), 〈새만금에서〉(1997) 등을 통해 비릿한 바다 내음을 품은 부안의 자연 풍경과 그곳 어민들의 노동 일상, 그리고 그 일상에서 흔하게 존재하여 의미 없어 보이기까지 한 소박한 소재로서 작은 생물들, 풀꽃들, 곤충들, 말라비틀어진 무청 등을 표현했다.(도판12) 이들은 놀랍게도 거의 같은 시기에 동시적으로 제작된 상이한 것들의 충돌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에서 공통점이 없는 다양한 소재는 사뭇 1회 전시에서 보여준 현실 비판적 시각과 전혀 다른 자연 친화적이고 감상적인 성향으로까지 여겨지며 의아하게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 야생 꽃과 

들풀들은 이름 없는 민중의 삶을 빗대어 주목한 것들이었고, 1999년 〈반핵〉(도판13)에서처럼 여전히 사회 비판적 시각을 내포하는 것들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결과론적으로 당시 그가 교사였던 아내를 따라 전주, 김제, 부안을 오가며 전북지역을 근거지로 자연을 관찰하고 사회적 이슈에 반응하면서 자연스레 이곳에 정착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정착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동시적으로 그에게 사회를 보는 시각도 주변에 대한 애착 어린 시선으로 한결 부드러워지게 했다.
그러나 그의 타향살이 행적을 따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시기의 작품은 우리에게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즉 그는 작가적 근원을 이뤘던 이데올로기의 거대 서사로서 효자동 시리즈에서조차 주변인(人)적인 시각으로 서정적 풍경과 예술적 감상의 태도를 보였고,(도판8·9·10) 여기에 갯벌 시리즈(도판11)를 비롯하여 동판화로 제작된 〈붉은 바위〉(1997)(도판14), 다색목판화 〈늦여름 저녁〉(1998)(도판15) 그리고 석판화 〈겨울나무〉(1998)(도판16) 등의 작품에서는 어쩌면 민중미술가들이 경계했던 예술적 ‘유희성’, 즉 작가의 시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적인 감각까지도 보였다는 점은 놀라운 변화였다.이러한 불분명한 작가의 태도는 주변에서도 감지되었다. 1회 전시에서, “직접 부딪혀 다가선다기보다는 한발 떨어져 관조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손수 희망의 나무를 심을 수 없을 것인지, 조금 더, 머뭇거리지 말고,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 삶을 마주 대할 수는 없을까.”(유대수, 1997년 서울 나무갤러리 전시 리뷰), “그의 작업은 여러 측면에서 주저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드러내며 때문인지 어떤 통렬함이니 절실함에 다다르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이영욱, 1997년 1회 개인전 서평)와 같이 이들은 작품에서 오직 사회참여적인 한 가지 특성만을 요구하며 편향적 시선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연이어 개최된 다음 전시에서 이영욱은 지용출의 작품 생성 과정에서의 솔직함과 투명성, 그리고 일상적 소재에서 오는 소박함 등을 주목하며 “이런 느낌은 우리를 작품 안으로 열어주며, 참여할 수 있게한다. 작은 공감, 지용출의 이번 작업들은 이런 공감을 가능케 한다. (중략)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를 대상으로 한 것들… (중략) 그 일상성 속에서 엉뚱하게도 새롭다. 상투적인 소재 선택이나 표현법을 벗어나 어떤 진솔한 만남의 순간에 집중함으로써 가능한 새로움, 하긴 이 새로움들은 한편으로 소박하기 그지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온갖 관례들과 불필요한 지식들이 몸에 새겨져 스스로의 언어를 찾지 못하는 혼돈과 불투명함에 길을 열어주는 것은 이러한 소박함 아닐까?”(이영욱, 1998년 서신갤러리 서문)라고 언급하며 다행히 그의 선회한 사회참여 의식을 눈치챈 듯하다.

결론적으로 그 당시 작가의 변화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1990년대 이후 사회개혁운동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던 때였고, 이에 민중미술가들은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지속시키면서 새로운 시대 상황과 문화 지형에 적응하던 시기였다. 지용출은 노동 현장 속에서, 그리고 혼돈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또한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화하는 서울 대도시의 토박이로 자랐다. 이에 그의 작품 〈89 신촌에서… 뜨거운 오후〉(도판2), 〈아버지〉(도판3), 〈여성노동자〉는 경험하고 일상의 익숙한 소재에 항상 의식을 가지고 솔직하게 반응한 결과였다. 즉 관조적이라기보다 참여적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관조와 참여는 단순하게 시각적 표현이 온건하냐, 급진적이냐이다. 일상에서의 의식적 참여는 전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에 변수가 있었다. 당시 지용출은 타향에서 가족을 이루며 정착한 동시에 결정적으로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2001년 2월 졸업) 당시 전북대 구성원들은 대부분 이상조와 정미경의 지도 아래 전북판화가협회의 중 
추적 역할을 이끌었다. 지용출에게 전북판화가협회는 민미협 활동과 더불어 전주에서 큰 축을 이뤘던 활동이었다. 지용출은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작업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동료들 그리고 지도교수를 만났고, 이 시기에 타협적이고 과도기적인 과정을 겪었다. 다시 말해 판화가협회의 순수미학적인 작품 사이에서 자신의 사회 저변의 어둡고 무거운 주제는 시대착오적으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그는 이곳 전북에서 작품 내부의 사회참여적 기조를 잃지 않으면서 예술의 시적인 요소를 찾아야 했다. 그는 주변에서 대중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일상의 소재를 찾아 자연과 생명으로 눈을 돌렸다. 다시 한번 되짚어 그의 말을 들어보자.

 

 



“94년 집사람 발령지가 변산이었어요. 처음엔 길어야 3년, 5년? 그 정도 생각하고 내려왔죠. 
여기는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사는 게 어디 계획한 대로 따라주기만 하던가요. 
이 곳에 살면서 미적 가치나 그림의 대상이 조금씩 변해갔다는 게 저한테 중요합니다. 서울에서 태어 
나 대학까지 그곳에서 마치다 보니 늘상 도시나 도회적인 이미지, 그리고 문명적인 소재들을 찾아 그림을 그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 살면서부터는 자연이나 생명에 대해 뭔가가 느껴지게 되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정이 들었죠.”

- 문화저널, 2003년 2월호


아! 그의 그림은 자기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인간적 감동으로, 자연과 생명에서 느껴지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었다. 즉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 ‘정(情)’을 그리고 있던 것이다. 지용출은 작고 소박하고 익숙해서 눈길조차 받지 못했던 것들에서 무의식적으로 혹은 자동발생적으로 한민족 고유의 정서를 발현하고 있었다. 마침내 현실적 시각과 예술적 고뇌 사이에서 탄생한 지용출의 한국적 정서는 역사성 표출의 미학을 통한 민족 정서의 미술로 이어지며 사회변혁운동 미술가로서 철저하게 ‘전통 속으로’ 자기 변신을 이룩한다.


4. 민족 정서의 발현: 고목나무 시리즈, 수제 황토 한지, 전주 옛 지도, 소리 여행


“목판화는 사물을 소박하게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 특히 흑백의 방법으로만 사물을 표현할 
때는 절제된 미적 언어가 필요하다. 절제되고, 소박한 표현이 흑백 목판화의 장점이다.”

- 문화저널, 2008년 10월호


2001년 9월 지용출은 전주 서신갤러리에서 ‘오래된 나무, 작은 풀섶들’이란 제목으로 제4회 개인전을 개최하였다.⑸(도판17) 1998년 3회 개인전 이후 3년 만이었다. 전시에서 그는 오래된 고목나무를 중심으로 모악산, 내장산 등의 뫼(山) 형상, 그리고 소나무와 나비, 잠자리가 함께 어우러진 호박 넝쿨, 마늘과 작고 다양한 야생 풀들을 보여주었다. 즉 작품들은 그가 1997년 가족과 김제에 터를 잡고 처음엔 농가 창고 작업실에서, 이후 2000년 김제 금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새롭게 제작한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여기에 특별히 작품은 이전 전시에서의 현대적인 판화 기법과 방법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직 칼로 파내고 흑백으로만 찍어낸 전통적인 목판화로서 완성하였다.
이에 전시된 작품 중 고목나무는 가까이에서 응시하듯 강렬한 흑백 목판의 맛을 보여줬지만, 대부분 작품은 그의 관조적 시선에 맞춘 유유자적한 풍광과 농촌에서 자연스럽게 체험한 시골 내음의 소박한 정취가 담겨 있었다. 여기에 들풀과 채소들의 수수한 이미지를 담아낸 수제 황토 한지는 전시의 전체적인 인상을 더욱 보수적이고 예스러워 보이게 했다.(도판18·19)
이에 1회 서문부터 작가를 지속적으로 관찰한 이영욱은 “작업들은 지난 8년간 그가 자신이 새로이 살아가게 된 바로 이곳, 지역의 삶에 조금씩 젖어 들면서 그 삶을 긍정하는 새로운 시각을 반영하고, 현시대의 예술에 있어 상품과 사물, 속도와 변화, 왜곡된 글로벌리즘의 현란한 삶에 대항하는 평범한 삶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보았다.(이영욱, 2001년 4회 개인전 서평)
마찬가지로 지난 8년간 판화가협회 회원 동인으로 그리고 대학원 사제지간으로 지용출을 꾸준히 지켜봐 왔던 이상조는 그가 “변함없이, 소중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빗기는 것들”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목판화에서는 흑백의 강력한 단색 기법과 날카로운 칼맛, 거친 황토 등을 통해 이전의 부드러움을 잃었다고 서술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부드러움을 버림으로써 결정적으로 강력한 ‘생명력’을 획득했다고 높이 평가했다.(이상조, 문화저널 2001년 10월호)
앞서 서술했듯이 지용출은 주변의, 소박하지만 가까이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에서 본인이 체험한 민족적 정서를 자동발생적으로 표현했다. 고목과 당산나무 그리고 마늘, 더덕, 호박, 질경이, 파꽃, 들꽃 등 그가 새기고 찍은 작고 소박하고 익숙한 존재들은 아무런 감동도 없고 눈길도 받지 못하는 주변의 것들이지만, 그의 칼끝에서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빛과 흙내음, 바람을 머금고 예술적 생명력을 얻었다. 
지용출은 김제에 터를 잡고 금구 작업실에서 판화 소재와 방법에서 과거로 회귀하면서 자연에 어울려 함께 존재하는 우리 
의 민족적 에너지(생명력)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뒤 그는 문화저널에 자신의 작품 시리즈들을 기고하면서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을 이야기했다.​


 

 

“자연은 우리에게 항상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전달한다. 

사람 들이 항상 변화한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이 변하는 것이지 자 연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회의 이상향도 무위의 소박 함이 아닐까….”


- 문화저널, 2006년 4월호 



그 무렵 지용출은 철학과로 진학해 박사과정을 이수하던 때였다. ⑹ 이는 실제 그 자신이 진정으로 체험한 자연과 시골 생활의 정겨움, 그리고 호사롭지 않지만 넘치는 술 한잔을 기분 좋게 건네는 우리 민족적 정서에 동양철학을 입히는 순간이었다. (도판 20) 즉 지용출에게 “흑백 목판화는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에 부합하는 것이고, 현상을 넘어 정신세계마저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 흑백 목판화가 주는 절제되고 소박한 표현은 아마도 유교의 세계관을 그림으로 표현한 사대부 문인화의 미의식이며 정신세계를 계승한 것”(고충환, 2020년 작고 10주기 기념전 서문)으로 여겨졌다.

 

지용출은 확실히 전통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동안 그의 예술은 도시 노동자를 대변하면서 급속한 도시화나 대자연의 서정적 풍경을 조망하기도 했고, 소박한 일상에서도 가치를 찾기도 했다. 또 수제 황토 한지를 사용해 보거나 중국의 수인(水印) 판화⑺를 실험하기도 했다. 그는 판화만 고집하지 않고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여러 장르를 다양하게 시도했다. 이 모든 시도는 그가 중요하게 추구한 “깨어 있는 자기 가치관”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미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민족미술이라는 전통이나 이념도 소중하고 일반적인 미적 가치관도 중요한”(문화저널 2003년 2월호) 자기 세계관을 목표했다. 
한편 지용출은 2001년 전북청년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여러 기관이나 단체 등의 지속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판화의 장르적 특성상 전통적인 목판 예술이나 민속적 삽화로서 민속 행사나 기념물, 홍보 자료 활용에 적합했다. 이에 전주역사박물관의 전주 고지도, 문자도, 민화도, 태극기 등의 체험판(2003)(도판21) 및 정읍 백정기의사기념관의 독립선언 의거결의서(2007), 정읍사문화제축제위원회의 정읍사 체험판(2008)을 제작하였고, 전라북도 홍보 책자의 소리(2008), 쌀·길(2009) 일러스트⑻, 익산문화 지도(2008), 만경강 생태지도(2008), 임실문화관광지도(2008)와 완주군 이서면 물고기마을 물고기 연작 (2004), 원불교 달력 연작(2005, 2006) 등을 제작하였다.​

 

특히 그는 2003년 전주역사박물관의 의뢰를 받고 전주 고지도 목판을 재현하는 작업과 함께, 민미협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2002년 전주 월드컵 기념으로 전주 종합경기장 일대에 시행된 전주역사그리기 공공미술(벽화) 프로젝트, 같은 해 전주 신흥고 담장 벽화 〈가마귀골의 역사, 전주의 풍물〉과 같은 전주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작업의 책임자로서 활동하게 된다. 

사실 그는 서울에서 온 이방인으로서 오래전부터 특별하게 전주 역사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지용출에게 전주 역사를 연구하는 경험은 그의 다음 시리즈인 옛 지도의 작품들을 탄생하게 했다.

지용출은 옛 지도 작업을 위해 조선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1861)를 연구했다. 목판으로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당대 각종 지도와 지리서를 종합하고 집대성하여 완성한 조선 시대 지도학이다. 김정호는 이를 만들기 위해 팔도를 세 번 돌고, 백두산을 여덟 번이나 올랐다고 전해지며, 전통적인 지도 제작법을 따르면서도 확대와 축소를 할 때는 서양의 과학기술을 가미해 정확성을 높였다. 반면 지용출은 최대한 옛 지도의 전통적 제작법에 근거한 현대판 지도를 제작하고 싶었다. 그는 부감법의 다각적인 시각을 위해 산기슭을 따라 주변의 모든 봉우리를 오르고, 때로는 길이 없는 숲을 헤치고 나가 전주 완산칠봉 및 오목대, 동고사, 남고산성 그리고 전주천 한벽당 등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전주를 키워준 모든 생명의 어머니 전주천, 전주에 나고 자라난 이들 중 전주천에 대한 아련 
한 기억 하나쯤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중략) 전주천에 커다란 홍수가 나서 돼지 
가 떠내려가던 풍경이며, 정월 대보름이면 강을 사이에 두고 완산동 젊은이들과 다가동 젊은이 
들이 벌이던 불꽃 경쟁, … 여름밤이면 몰래 한벽당에서 목욕하는 여인네들의 속살을 훔쳐보 
던 이야기 등 전주천은 전주를 키워온 그 이력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 문화저널, 2004년 12월호

“… 아쉬웠던 것은 곤지산의 초록바위와 다가 산 자락의 끝부분이 넘실대는 전주천 물길에 
발을 담그고 있던 옛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벽당 바위에 한 번 부딪혀서 물보라를 일으켰던 물길이 다시 초록바위에 와서 휘감은 뒤 서천으로 바뀌면서 다가산 발끝에 부딪치면​서 서서히 북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모습은 아마도 이 전주를 낳고 기른 모수(母水), 바로 그 모습 이었을 것이다.”

- 문화저널, 2004년 12월호


2004년 지용출은 전주의 역사를 담은 작품들을 선보인 제8회 개인전 ‘완산을 보다’를 개최하였다. 민화풍으로 완성된 현대판 지도에는 전주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 신앙, 의례, 마을, 생활, 놀이 등 의 민속적 풍부한 정서를 담았다. 후에 지용출은 이 작업을 두고 “이곳에서 자라난 이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것들에 숨겨져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작업들은 지역 사람 으로서의 주체성과 역사의식을 명확히 드러내며, 조각가 채우승의 말처럼 “그는 이방인이면서 이미 이 지역에 젖어 있었고 이 지역민이 되어 있었다.”(도판22)

5. 승화된 예술, “농사는 예술, 행복한 노동”: 곁에 있는 나무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은 아름답다. 흙은 모든 삶을 포용하는 생명의 근원이며, 나무나 풀로, 
때로는 물과 바람으로 화한다. 그 땅에서 자란 들풀, 호박, 마늘은 분명 아름답다.”

- 전라도닷컴, 2002.11.

지용출은 2005년 3월부터 금구에 땅을 얻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작업실 근처의 땅이었다. 
당시 그는 사람들에게 “농사와 판화, 즉 짓고, 새기는 그 정직한 노동”의 동일성을 미소로 이야기하며 행복해했다. 
그에게 예술도 농사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정진하는 삶으로 채우는 것이 진정하게 바라는 삶이었다.”

- 유대수, 전북참여연대 소식지, 2010년 8월호


그리고 농사의 연장선이었을까? 그해 그는 민예총 전북지회 주최로 옛 전북도청사에서 열린 ‘쌀전’ 전시회에서 그의 예술적 노동이 정성스레 새겨진 벼까라기 판화 2,000장을 찍어 무료로 나눠주었다. 농부가 풍족히 수확한 농작물을 이웃에게 마음으로 나누듯, 순수한 마음으로 그의 예술작품을 누구나 가져가라고 했다. 다만 그는 예술이 몇몇만을 위한 특별한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즉 지용출은 예술이라는 것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처럼 일상 속에서 누구나 소유할 수 있고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 사회적인 것임을 상기시켰다.
이렇듯 그는 초기 작품 아버지의 모습에서부터 변함없이 예술이란 삶에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지용출은 주변의 일상적 소재에서 사회 의식적인 자기 소신을 유지하며 작품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의미에서 2007년 우진문화공간에서 개최한 10회 개인전의 제목 ‘곁에 있는 나무’는 그의 예술과 예술에 대한 자기 소신을 가장 적절하게 대변한 문구이기도 했다.


“나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듬직한 상징이다. … 노거수(老巨樹)는 수백 년을 그렇 
게 하늘과 땅을 상징하며 우리의 마음을 지켜오고 있다. 우주목(宇宙木)으로, 때로는 미륵으로… 
그러한 부드러움과 강함은 인간 마음의 투영이다.”

- 문화저널, 2006년 6월호




수백 년간 하늘과 땅의 기운으로 햇빛과 천둥, 비바람을 맞으며 자리를 지켜낸 나무는 인간이 현실적인 삶에 충실하고 행복한 노동을 노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나무를 통해, 자연의 생명력과 자신의 예술관을 그리고 우리의 민족성, 정확하게는 우리의 영원한 내면이 다르지 않음을 표현했다.
한편 2007년 〈바람소리〉 나무들에는 특별하게 아내와의 추억이 담겼다. 유독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그해 여름,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굵은 땀을 뚝뚝 흘리며 여백의 넓은 판은 과감하게, 혹은 나무의 여린 나뭇가지를 따라 섬세하게 형상을 파내었다. 당시 아내가 보기에 단순히 나무 형상만 덩그렇게 보였던 나무판 형상이 조심스럽게 종이에 옮겨지고 모습을 드러내자 잎과 잎 사이로 햇살이 보이는 듯 안개가 보이고, 바람의 길이 열리며, 시원한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용출은 아내 김미경에게 이 작품들의 제목을 무엇이라 할까 물었고, 그녀는 “바람소리가 들리네. 바람소리가 딱 맞아.”라고 그들의 제목을 정했다.(도판23)
이후에도 지용출의 나무들은 지속적으로 새겨졌다. 그리고 2010년 그가 생전에 치르지 못한 12회 개인전을 준비할 때도 나무들은 새겨지고 있었다. 사고가 나던 날 그는 새로 농사지을 땅을 살피러 나가는 농사꾼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지용출은 전시를 불과 며칠 앞두고 미처 발표하지 못한 나무들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났다. 이제 우리는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고, 그가 떠난 작업실에는 마지막 10장의 소나무가 남아 있었다.(도판24)



“수수 백년의 세월을 버텨낸 뿌리 깊은 나무들, 거친 등걸마다 치켜든 가지마다 서리서리 시간과 사연을 품고 있는 나무들. 

칼맛과 흑백 대비가 두드러지는 고목이나 당산나무들은 집요하고도 묵직한 힘을 내뿜으며 순탄치 않았을 역정과 그럼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를 이야기한다. (중략) 그런가 하면 지난 2007년 우진문화공간에서 열렸던 전시명인 ‘곁에 있는 나무’처럼, 곁이라는 말의 따뜻함과 이무로움이 먼저 또 와닿는 나무들도 있다. 마을과 사람과 더불어 다순 숨결을 나누고 있는 나무들. 

또 어느 나무에선 바람을 보고 바람소리를 듣는다. 무게와 힘을 덜고 바람과 몸을 섞고 있는 잎, 잎, 잎…. 채움 대신 비움으로, 그래서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 바람이 마음을 고요히 쓸고 간다.”


- 판화사랑, 네이버 개인 블로그



6. 남은 사람들: 유작전, ‘건실하고 해맑은 청년’ 그를 회고함


지난 2011년 5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는 지용출의 사망 1주기를 기념한 ‘故 지용출 판화유작전’이 열렸다. 지용출의 동료와 지인들은 유작전 준비를 위해 기꺼이 힘을 보탰고, 특히 전시 기획과 전체 진행을 맡은 유대수는 몇몇 작가들과 함께 작품을 사후 재현(Reproduction)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글을 통해 그를 추모했다.

채우승은 지용출과 ‘작업실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통해 교류했다. 그는 지용출을 떠나보낸 이후에도 여전히 ‘건실하고 해맑은 청년’으로 그를 기억했다. 이는 생김새가 청년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지용출에 대한 인상 때문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채우승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지용출의 영원한 인상일 것이다.

그리고 지용출의 가장 가까이에서 오랜 기간 그를 지켜본 아내 김미경은 그를 흡사 바위와 수도승 같았다고 회고했다. 남편은 스케치를 마치고 판 앞에 서서 파 내려갈 때 칼 잡은 손만 움직일 뿐 바위처럼 미동도 없었고,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시간을 잊고, 오로지 묵묵히 판을 파 내려가는 모습이 흡사 수도승 같았다는 것이다.

또 지용출과 민중미술운동의 연으로, 타향 전주에서 만난 동향 선후배로, 평론가와 작가로, 혹은 지인으로 교우 관계를 맺었다는 이영욱은 그가 무엇보다도 판화가였음을 강조했다. 그는 “지용출의 일상적 자세와 성격이 판화의 공정이 요구되는 미덕과 닮아 있었음을 느꼈고, 그의 단호한 성실함과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차분함,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 일관된 평화가 그렇고, 일과 삶을 일치시켜 나갔던 행복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라고 술회했다.

이후에도 유작전은 매번 추모의 열기가 식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특히 유작전은 유족에게 전북대학교와 전북도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에 2020년 전북도립미술관에서 개최된 작고 10주년 전시는 지난 2013년 지역의 미술 애호가 단체인 전북미술관회가 작가의 판화 기증작 63점과 소장작 3점을 더한 총 66점의 소장 판화로 전시하였는데, 이는 사실상 작가의 전작을 망라한 대규모 회고전이 되었다.

 

“판화만을 고집해 온 작가, 판화가라는 말이 그 누구보다 어울렸던 작가 지용출”

- 전북일보, 2010.5.19. 


어느덧 십 년이 훌쩍 넘어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그를 잊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와 남겨진 그의 작품들은 작품 속 시적인 풍경으로, 우리 곁에서 불멸의 영생을 지속하고 있다.

 

 

1) 미술계에서 처음 1980년대 민중미술의 근원적 토대가 되었던 것은 박정희의 삼선개헌에 반대하며 1969년 창립된 '현실동인'이었다. '현실동인'은 당시 저항문학운동을 하던 김지하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다니던 오윤, 오경환, 임세택 등과 함께 창립한 단체였다. 그들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창립전을 준비했지만, 지도교수와 가족들의 만류로 창립전을 포기하고 해체되었다. 그러나 당시 이들은 선언문을 통해 현실참여 미술운동의 방향을 구체화화였고, 이를 다시 10년이 지나 1979년 10·26사태 이후 혼돈의 정치적 현실에 대응하고자 미술 이론가들과 함께 '현실과 발언'으로 새롭게 창립하게 된다.

2) 이후 지용출은 전북판화가협회에서 2001년 2월 회장으로 취임하여 2006년까지 역임하였다.

 

3) 지용출은 2001년 전북민미협 회장에 취임하여 2007년까지 6년간 회장직을 맡았다.

 

4) 지용출은 1994년 9월 결혼하면서 살림집 근처 전주 효자동 융성아파트 지하에 개인 작업실을 차렸다. 그러다 1995년 8월부터 1997년 3월까지 유대수와 함께 효자동 태백주택 지하에 공동작업실을 운영한다. 

그 이후 지용출은 가족과 김제에 터를 잡고 김제 용지면 농가 창고에서 작업하다가, 2000년 그의 마지막 작업실이 된 김제 금구 선암리 싸리골에 작업실을 짓는다.

 

5) 전시는 2001년9월5일부터 9월17일까지 개최되었다. 같은 해 12월 지용출은 제9회 전북청년미술상을 수상하고, 2002년 전주 '얼화랑'에서 청년작가수상전을 기념한 제5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6) 그는 2006년 8월에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7) 목판에 먹이나 동양화 물감을 써서 회화 같은 효과를 내는 중국 전통 판화 기법.

 

8) 2009년 지용출은 전라북도에서 발행한 홍보 책자의 작품들을 모아 최명희문학관에서 소리여행 시리즈를 전시하였다. 그게 그의 마지막 11회 개인전이 되었다.

 

 

참고문헌


전북민족미술인협회, 『故 지용출 판화유작전, 곁에 있는 나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2011 

고영재, 『故 지용출 판화유작전, 흙의 속뜰에서 피다』, 롯데갤러리, 광주, 2012

김은영, 『지용출 판화: 당신이 잠시 잊고 있었던 생의 의지』, 전북도립미술관, 전주, 2020 

전주문화재단, 『전북판화 30년 다시, 판화』, 팔복예술공장, 전주, 2022

김현화, 『민중미술』, 한길사, 2021

성완경, 『민중미술 모더니즘 시각문화』, 열화당, 1999

정상곤 엮음, 『한국현대판화의 담론과 현장 1958-2008』, 한국현대판화가협회, 2007 

민족미술인협의회, 『민족미술』, 민족미술인협의회, 1993년 8월호

도휘정, 「교통사고로 숨진 판화가 지용출씨, 그의 작품세계는…」, 『전북일보』, 2010.5.19. 

--------, 「판화가 지용출 “시적인 느낌을 찾는 것 목판화 매력이죠”」, 『전북일보』, 2008.6.1. 

정 훈, 「판화가 지용출씨, 조각칼로 새긴 ‘과거의 흔적’」, 『전북일보』, 2008.11.3.

이상조, 「오래된 나무, 작은 풀섶들의 이야기」, 『문화저널』, 2001년 10월호

김회경, 「작은 풀섶들에도 ‘아름다움’이 있다-판화가 지용출」, 『문화저널』, 2003년 2월호 

문화저널 편집부, 「아! 거기 늘 어머니 같은 강물이 있었지」, 『문화저널』, 2004년 12월호 

지용출, 「강 길은 지금도 아름답다」, 『문화저널』, 2004년 12월호

--------, 「지용출의 판화 이야기」, 『문화저널』, 2006년 4월호

--------, 「지용출의 판화 이야기」, 『문화저널』, 2006년 6월호

--------, 「농사는 예술, 나는 행복한 텃밭을 가꾼다」, 『문화저널』, 2010년 3월호


곁에있는나무-지용출갤러리 https://blog.naver.com/gema45 

판화카페대수공방 https://printstudio86.tistory.com/ 

판화사랑 https://blog.naver.com/printart


유족 김미경 인터뷰 2023.9.15.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전주역사박물관, 한국수자원공사, 전라북도청사, 전주시 

<지도 그림 제작> 만경강생태문화지도, 최명희문학지도, 익산생태문화지도, 남고산성지도, 전주생태문화 

지도, 완산칠봉지도, 임실생태문화지도, 김제마을지도, 『전북의 재발견』 소리지도, 삼천마을지도 등 



지용출(池龍出, 19632010)

 

1963. 3. 2. 충북 괴산 출생 (5세 때 서울 중곡동으로 이사)

1983. 서울 성동기계공고 졸업

1989. 3. 추계예술대학교 판화과 입학(1992년 추계예술대학교 총학생회장 역임)

1993. 2. 추계예술대학교 졸업.

2001. 2. 전북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석사취득(학위논문: 케테콜비츠 판화에 대한 고찰)

2006. 8. 전북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3. 서울민미협 가입

또 다른 출발전, 그림마당 민, 서울

추계 애오개 동문전, 덕원미술관, 서울

1994. 3. 아내 김미경의 변산중학교 부임으로 전주 생활 시작

전북판화가협회 가입

1994. 9. 지용출·유대수 판화 2인전, 김성연아트홀, 전주

1995. 전북민미협 창립전 황토의 역사, 전북예술회관, 전주

전국민족미술인연합 창립전, 문예진흥원미술관, 서울

해방 50년 역사전, 예술의전당, 서울

동학 101주년 기념전 흐르는 물, 피는 꽃, 서는 땅, 전북예술회관, 전주

광주통일미술제, 망월동, 광주

1996. 12. 전북청년작가위상전, 전북예술회관, 전주

조국의 산하전 ,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1997. 3. 1회 개인전, 나무갤러리, 서울

1998. 3. 2회 개인전, 서신갤러리, 전주

3회 개인전, 미주치과, 전주

11JAAIA, 동경도미술관, 일본

1999. ! 대한민국전, 갤리리상, 서울

영호남미술교류전 동서에서 남북으로, 광주, 목포, 울산

2000. 2. 전북민미협 회장 취임(2007년까지 연임), 김제 금구 선암리에 작업실 지음

통일음악회 무대미술 설치, 삼성문화회관, 전주

2001. 2. 전북판화가협회 회장 취임(2006까지 연임)

전북대학교 석사취득이후 전북대, 정인대, 우석대, 예원대 출강

2001. 12. 전북청년미술상 수상

4회 개인전, 서신갤러리, 전주

2002. 전북청년미술상 수상작가 그룹 4+7활동 시작

5회 개인전 / 청년작가수상전, 얼화랑, 전주

6회 개인전 / 마니프전, 예술의전당, 서울

전주역사그리기전, 종합경기장 일원, 전주

2003. 35회 전라북도미술대전 판화분과 심사위원

2004. 7회 개인전 / 전북아트페어,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주

8회 개인전 완산을 보다, 전주역사박물관, 전주

2005. 3. 김제 금구에 땅을 얻어 농사짓기 시작

전북민예총 주관 제2회 민족예술제 쌀전, 전라북도 구청사, 전주

문화의 달 행사 미술로 보는 판소리 다섯바탕전, 경기전·전주역사박물관, 전주

2006. 9회 개인전 , 문화공간 지담, 전주

2007. 10회 개인전 곁에 있는 나무, 우진문화재단, 전주

2008. 지역문화정책연구소 ()문화연구창 이사 및 운영위원 활동

전라북도 홍보 책자 전북의 재발견시리즈, ‘소리편 일러스트 제작

전라북도 문화예술지원사업 평가위원

2009. 전라북도 홍보 책자 전북의 재발견시리즈, ‘·편 일러스트 제작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이사 선임

11회 개인전(소리여행 시리즈), 최명희문학관, 미나리갤러리, 전주

2010. 5. 18. 새로 마련한 농지를 살피러 가던 중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함

 

2011. 5. 사망 1주기, 지용출 판화 유작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주

2012. 2. 지용출 유작전 흙의 속뜰에서 피다롯데갤러리, 광주

2014. 5. 지용출 판화 유작전 바람소리, 전북도립미술관, 서울

2020. 7. 사망 10주기, 지용출 판화전: 당신이 잠시 잊고 있었던 생의 의지, 전북도립미술관, 전주

 

작품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전주역사박물관, 한국수자원공사, 전라북도청사, 전주시

 

지도 그림 제작

만경강생태문화지도, 최명희문학지도, 익산생태문화지도, 남고산성지도, 전주생태문화지도, 완산칠봉지도, 임실생태문화지도, 김제마을지도, 전북의 재발견소리지도, 삼천마을지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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