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 130주년 전북 문단의 스승
가람 이병기의 삶과 문학
글. 박태건 (시인, 문학박사)
◀ 조선어학회 시절 단체 사진
◀ 철자법위원회 회원 시절(1933)
◀ 휘문고보 재직 시절
◀ 『가람시조집』(1939)
◀ 『문장』
◀ 『현대시조 삼인집』
◀ 군정청 편수관 근무 시절(1946)해방 후, 가람은 교과서 편수주임을 맡아 우리말의 미학적 가치를 드높였다.
◀ 가람 선생 내외 가람의 유산
가람은 해방 이후 극심했던 이데올로기를 초극한 소통적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주시경 문하에 있던 최현배·정인승 등과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였고, 손진태·안확 등과 진단학회에도 참여했다. 이희승·이병도·조윤재 등 우파 성향의 학자들과도 잘 지냈으며, 이전에는 조선불교 중앙구락부와 대종교에도 참여했다. 석전 박한영과 춘원 이광수와의 교류가 깊어 금강산 유람에 동행한 것도 가람의 폭넓은 교유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게 가람의 활동 범위는 문학·예술·역사·종교 등 광범위하여 “가람 있는 곳에 국학이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문학사에서 가람처럼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에 문학적 영향력을 갖는 문인이 드물다. 가람은 어학·문학·민속학·서지학 등 국학 연구 전반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귀향한 후에는 그의 집으로 신석정·최승범·박병순 등이 출입하면서 문자향 서권기의 정수를 전북문단에 이어받았다.
가람이 남긴 저술은 시조집 2권, 시조론 1권, 국문학사 1권, 국문학개론 1권, 주해서 8권, 번역 및 선집 6권, 교과서 11권, 서지 목록 2권, 어린이 역사서 1권, 육필 일기와 고어집 노트 1권을 비롯하여 신문과 잡지 및 학술지에 실린 850여 편의 저술과 교가 47편 등 총 자료 수는 930여 편을 헤아린다. 그가 남긴 멋과 풍류의 정신은 전북학의 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람의 사후에 문화포장(1962)이 수여됐고, 건국포장(1977)은 이후 건국훈장 애국장(1990)으로 승격되었다. 생가는 전라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7년에는 가람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가람 이병기 전집』의 출간이 시작되었다.
◀ 평생을 써 온 『가람일기』
◀ 국가에서 받은 훈장
◀ 『가람문선』
◀ 『국문학개론』
● 자료제공: 가람문학관
이병기 연보
1891년(1세): 3월 5일, 전북 익산 여산면 원수리에서 이채·윤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16세): 12월, 김수와 결혼했다.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세웠다.
1909년(19세): 4월 13일 한문으로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1910년(20세): 3월, 전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동시에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수학했다.
1913년(23세): 3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남양보통학교와 여산보통학교에서 훈도(訓導)로 재직했다.
1919년(29세): 3월, 교직을 그만두고 4월 상경했다. 8월 10일부터 한글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만주로 갔다. 10월 8일,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 상업 목적 방문임을 주장하여 10월 11일에 풀려났다.
1920년(30세): 11월, 조선불교회에서 박한영의 『능엄경』 강의와 권덕규의 ‘조선어 강의’를 들었다. 12월 조선불교회 이사가 되었고,‘대종교’에도 참여했다.
1921년(31세): 11월, 주시경이 추진했던 ‘말모이’목록을 기초로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했다.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를 열어 초대 간사를 맡았다.
1922년(32세): 5월, 동광학교 교원이 되어 1924년 보성고보 분교가 되기까지 근무했다.
1923년(33세): 7월, 박한영·이광수와 금강산 여행을 했다. 9월, <말모이> 낱말카드를 작성했다.
1924년(34세): 2월 1일, 휘문고보에서 조선어연구회 주최로 훈민정음 8회갑 기념회를 개최했다. 4월, 휘문고보 교원이 되었다. 장남 동희을 얻고 서울 계동집을 구입했다.
1926년(36세): 5월, 경성중등교원 시찰단으로 일본을 여행했다. 11월 4일과 6일에 교육·언론계를 대상으로 훈민정음반포 8회갑 기념축하회를 개최하고 기념 강연을 했다.
1927년(37세): 1월, 조선어강습회를 시작했다. 10월, 훈민정음 반포기념일을 ‘가갸날’로 명칭을 정했다.
1929년(39세): 차남 경희가 태어났다. 1월과 2월 ‘한글과 시조’, ‘한글과 가요’에 대해 강연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40세): 11월, 한글반포기념식을 명월관에서 거행하고 다음 해부터 10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12월, 조선어연구회 한글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다.
1931년(41세): 1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규칙 개정에 참여했다. 2월, 조선어·한문교원회를 결성했다. 7월 전국에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32년(42세): 삼남 종희가 태어났다. 11월 휘문고보 교지 발행이 금지됐다.
1933년(43세): 1월, 조선문흥회 초대 간사를 맡았다. 온양온천에서 합숙하며 조선어표준어사정회(철자법 통일안)를 검토했다. 이후 세 번의 독회를 거쳐 1936년 10월 표준어사전 결과 발표를 했다. 11월, 모친이 사망했다.
1934년(44세): 5월,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송만갑·이동백을 찾아가 판소리(극가)에 대한 의문점을 문의했다.
1935년(45세): 1월,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었다. 김소월 추도회에서 추도사를 했고, 구인회 행사에 참석했다. 8월엔 전라도 일대를 답사하며 신석정 등과 만났다.
1936년(46세): 10월 28일 한글날 기념식(490주년)에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했다.
1937년(47세):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주관한 ‘조선교화단체 연합회 조선문예협회’ 참석을 거부했다. 방송 출연이 많아졌다.
1938년(48세): 3월, 조선어 과목이 폐강되자 휘문고보를 사임했다. 이후 시간강사를 하며 연희전문에 출강했다. 6월, 조선어학연구회 사전편찬위원 위촉을 거절했다.
1939년(49세): 2월, 『문장』지 시조 추천위원이 되었다. 9월에 『가람시조집』을 출판했다.
1940년(50세): 1월, 신석정 첫 시집 『촛불』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7월, 아악부에서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8월, 창씨개명 수속 마감일까지 불응했다.
1942년(52세):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홍원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3년(53세): 9월 12일,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 9월 18일, 출감 후 고향인 여산에 갔다.
1944년(54세): 3월, 계동 집을 팔고 낙향해서 8·15 광복까지 고향 여산에 머물렀다. 9월, 장남 동희가 징집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1945년(55세): 8월 17일, 여산민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피선됐다. 10월, 미군정청 학무국 에서 중등 국어 교과서 편수주임에 취임했다.
1946년(56세): 9월,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11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직을 맡아달라는 김남천의 청을 거절했다. <교과서 검정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었다.
1947년(57세): 4월, 군정청 편찬과장을 사임했다. 6월 『한중록』을 출판했다. 조선어학회가 출간한 『조선말큰사전』 제1권을 축하하는 시조를 발표했다.
1948년(58세): 2월, 『가람시조집』(백양당) 재판을 냈다. ‘조선문화’를 주제로 각지에서 초청 강의를 했다. 12월 부친이 작고했다.
1949년(59세): 3월, <시조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7월, 수도청 사찰과에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사실이 없음을 진술했다. 12월, 서울대 교가를 현재명과 짓다.
1950년(60세): 6월, 인민군 치하에서 서울대 임시자치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출됐다. 서울이 수복되자 학도호국단의 조사를 받았다. 10월 25일, 고향 여산으로 낙향했다.
1951년(61세): 4월, 전주 명륜대학 교수가 됐다. 6월, 전주시 양사재로 이사했다. 7월, 원광대학 명예 국문학과장 및 교수가 됐다.
1952년(62세): 6월, 전북대학 초대 문리과대 학장이 되었다.
1954년(64세): 3월, 심원다방에서 가람 동인회 사화집 『새벽』 출판기념회를 했다.
1956년(66세): 3월, 전북대학교 정년 퇴직 했다. 전북대, 중앙대, 서울대 강사로 위촉됐다.
1957년(67세): 4월, 학술원 추천회원이 됐다. 9월, 문교부장관 초대 국제펜클럽 작가 환영연에 참석했다. 10월 9일, 한글날 기념행사 후 귀가 도중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1958년(68세): 3월, 교수직을 사임하고 여산으로 귀향했다. 10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백철과 공저한 『국문학전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1960년(70세): 7월, 학술원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8월, 학술원 임명회원이 됐다.
1961년(71세): 6월, 전북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8월 15일엔 문화포장을 받았다.
1963년(73세): 5월 16일,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5월, 장서를 서울대에 기증했다. 10월, 정읍 황토현에 건립한 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했다.
1968년(78세): 11월 28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12월 2일, 전라북도 문화인장으로 여산 남초등학교에서 영결식을 하고, 생가 뒤에 안장했다.
1973년 : 6월 23일, 생가인 수우재가 전라북도 지방문화재(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다.
1990년 : 건국훈장애족장을 포상받았다.
2017년 : 10월, 가람문학관이 건립됐다. 『가람 이병기 전집』 간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