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문화재단

검색
전주문화재단 전북 문단의 스승 가람, 이병기 | 자화상
전체메뉴SITEMAP
전주문화재단 전북 문단의 스승 가람, 이병기 | 자화상
전주문화재단 전북 문단의 스승 가람, 이병기 | 자화상
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제목

전북 문단의 스승 가람, 이병기
  • 2022-03-25 09:12
  • 조회 4948

본문 내용

 

 








 

 

 

 

 

 

탄생 130주년 전북 문단의 스승

가람 이병기의 삶과 문학



글. 박태건 (시인, 문학박사)




가람 이병기의 삶과 문학 탄생 130주년을 맞은 2021년에 가람 이병기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개최됨을 뜻깊게 생각하며, 원광대 대안문화연구소에서 진행한 『가람 이병기 학술대회 자료집』(2011~2018)과 최승범 선생이 지은 『스승 가람 이병기』(범우사, 2001), 이병기 선생의 『가람문선』(신아문화사, 1966)을 바탕으로 이 글이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격변기에 태어난 민족의 스승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전북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에서 아버지 이채와 어머니 윤병 사이에 태어났다. 가세가 넉넉한 편이어서 7세가 되자 서당 훈장을 들여 한학을 공부했고 16세에 결혼하였다. 중산층 가문에서 평범한 지식인으로 살 것 같은 청년 가람의 삶을 뒤흔든 것은 일제의 침탈이었다. 가람이 혼례를 치르기 한 해 전인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전리품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국권을 빼앗기자 민영환, 조병세 등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자결로 저항하거나 의병으로 봉기했다. 가람이 혼례를 올리던 1906년 12월경엔 한반도 중남부에서 의병이 일어난 지역이 60여 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해 6월 전북 태인에서는 양반이었던 최익현이 봉기했고, 경상도에서는 평민 출신 의병장 신돌석의 신출귀몰한 활동이 풍문으로 전해졌다.

일제는 통감부를 통해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였다. 가람은 기울어가는 나라의 현실을 외면하고 전통 교육에 매진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지 한참 되었고 을사오적이 판치는 조정에 나가서 뜻을 펼치기도 싫었다. 시골 서생으로 살았을 가람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읽고부터다. 서구 열강에 대항한 청나라의 변법자강운동을 알게 된 가람은 신학문에 대한 뜻을 세우게 된다. 하여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했다. 

1910년 3월에 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가람은 만주에서 온 비보를 접하게 된다.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것이다. 양계초의 변법자강운동에 감화를 받아 신학문을 접한 터라 안 의사의 죽음은 가람의 피를 더욱 뜨겁게 하였다. 가람은 지체 없이 서울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1910~1913)에 진학했다.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계몽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우재 

가람은 여산의 <수우재>에서 유년과 말년을 보냈다. 수우재(守愚齋)는 ‘어리석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격동의 한국사를 
온몸으로 견뎌내면서 기본을 지키려는 가람의 소박한 선비 정신이 이곳에서 뿌리내렸다. 









민족의식의 형성

가람은 평일에는 한성사범학교에 다녔지만 휴일에는 주시경이 설립한 조선어강습원에서 수학했다. 그곳에서 조선어문법을 배워 1912년 3월에 중등과, 1913년 3월에 고등과를 마쳤다. 가람은 조선어강습을 받은 것 때문에 사범학교의 일본인 주임과 사감에게 시말서를 몇 번이나 작성해야 했지만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가람이 조선어강습원을 마쳤을 무렵엔 한성사범학교도 졸업하여 전주와 여산 등지의 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訓導)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교원을 이르던 말)로 재직하게 되었다.
이때 가람은 전주의 남양보통학교와 고향의 여산보통학교의 훈도 생활을 하며 관례대로 금테 둘린 모자와 긴 칼을 찼다. 저녁에는 호영강습원을 열어 학교에 가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일깨워 주었다. 






▲ 한성사범학교 재학 시절 

가람에게는 한성사범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휴일에 조선어강습원에서 배운 것이 더욱 중요했다.













일경에 의한 세 번의 취조와 세 번의 귀향

가람은 일제에 의해 두 번의 취조를 받게 된다. 첫 번째는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1919년의 일이다. 당시 가람은 29세로, 여산 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그는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교직을 그만두고 상경했다. 상경한 그해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만주 여행을 하게 된다. 상해나 미국으로의 망명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람의 수상한 행적(?)은 일경에 의해 발각된다.



종로경찰서로 들어가자 한 가운데 마루판에 꿇앉히며 웬 안경쓰고 박힌 사진 한 장을 보이며 “이것이 너 아니냐”한다. 
…… 나는 “아니라”하였다. 뭇 무리가 “너다”하며 먼저 앉았던 의자를 들어 마구 때리며 찬다.

- 이병기, 『가람일기』 부분





​ ▲ 가람일기 1920년 7월 31일 

 가람은 19세인 1909년 4월부터 1966년 6월까지 일기를 썼다. 가람이 58년간 쓴 일기는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가치가 높다. 
초기에 한문으로 쓰던 일기를 1914년 8월부터 한글로 바꿔 쓴 것은 주시경의 영향으로 보인다.



​​3·1운동 이후 가람은 두 가지 결심을 한다. 첫째는 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 일이며, 두 번째는 10여 년간 한문으로 적어 오던 일기를 한글로 쓰는 것이다.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된 가람은 망명을 포기하는 대신 한글 보급 운동으로 독립운동을 대신하려 했다. 한글 일기 쓰기는 이러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작고도 꾸준한 실천이었다. ‘가람’이라는 호를 직접 지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20년 무렵에 쓴 『가람일기』의 한 부분을 보자.


수당께 갔었다. 내 호를 지어준다. 나는 이미 가람이라 했다. 가람은 강의 우리말이다. 온갖 샘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가 된다. 그러면 가람은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근원도 무궁하고 영원하며, 
이 골물 저 골물 합하여 떳떳함을 이루니 완전하며, 산과 들 사이에 끼어 뭍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함이다.

- 이병기, 『가람일기』 부분



자신이 직접 지은 호 ‘가람’처럼 그는 세상 어느 틈에도 관여하고 스며들어 조화롭게 하는 조정자의 역할을 하였다. 가람은 1921년 12월에 권덕규·임경재·최두선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22년 4월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의 조선어 및 습자(習字) 교원으로 취직하면서 서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어학회 간사를 맡아 한글강습회와 한글 사전인 ‘말모이’작업에 주력한다.​





 
▲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겪은 분들의 단체사진(1946년)

가람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된 후에도 변절하지 않고 우리말을 지키며 동지들을 격려했다.







가람이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가 바로 한글 대중화 사업에 한창 열정을 쏟던 시기다. 일경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궁극적으로 항일운동임을 깨닫고 가람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동지들을 체포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이 그것이다. 일제는 1938년부터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소굴이자 요주의 단체’로 규정하고 감시하며 탄압하고 있었다. 전시 총동원 체제하에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어학회는 검거해야 할 ‘불령선인(不逞鮮人) (일제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들의 집합’이었던 것이다. 가람은 동지들과 홍원형무소에서 함흥형무소로 옮겨서 복역하다 1943년 9월 18일에 기소유예로 출감했다. 가람은 출감한 지 얼마 후인 10월 10일, 고향인 여산의 천호산에 올랐다. 아마도 고향의 산과 들을 보면서 가람은 귀향을 결심했을 것이다. 이듬해인 1944년 3월 말, 가람은 수우재로 귀향했다. 







▲ 수우재 앞 연못

가람의 시조에서 나타난 자연경관은 ‘마음의 정원’을 의미한다. 가람은 백련을 가꾸기 위해 직접 일본어로 된 전문서적을 
구입하여 연구하는 등 정성을 보였다. 수우재 연못에 비친 배롱나무의 풍모는 소박한 선비정신의 기품을 보여준다.





가람의 나이 54세가 되던 해, 일제에 의한 투옥과 귀향은 아들을 잃는 아픔과 함께 왔다. 장남 동희가 광복을 1년도 안 남기고 징병이 되어 영영 소식이 끊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에도 가람은 경찰에 의해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서울대를 비롯하여 각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인 1949년 7월 7일에 수도청 사찰과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인 것을 문제 삼았다. 가람은 전조선문필가협회에만 가입하였고 조선문학가동맹엔 가맹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점을 들어 혐의에서 벗어났다. 당시 『가람일기』는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무슨 단체 또는 개인으로서 내 이름을 팔아 쓰기를 종종 한다”라고 적었다.









고문서 구입에는 생활비를 다 써 버려도 좋아

가람은 동광, 휘문, 보성 등 여러 학교에서 우리말 문법 및 작문과 습자를 가르치는 한편 고문헌 수집에 열성적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고문헌들은 ‘좀먹고 썩은 책’ 취급을 받았다. 가람은 고전적 가치가 높은 희귀한 자료를 찾아서 서울 진고개의 여러 서점을 며칠 건너 발걸음했다. 가람은 그렇게 모은 책에 주해를 붙여 학계에 소개하여 가치를 드높였다. 『금강경삼가해』를 구하는 데 선뜻 3개월의 월급을 빚내어 샀고, 『대한계년사』의 낙질(落帙)이 (한 질을 이루는 여러 권의 책 중에서 빠진 권이 있음. 또는 그런 책.) 어느 시골에 있다는 소식에 노자를 마련하여 직접 사람을 보냈을 정도였다.​



내가 처음 18원 월급을 받았으나 그 돈의 반 이상은 책을 샀었다. 
나는 이걸 한 오락으로 여기려니와, 보다도 우리 국학에 당한 귀중한 문헌을 수집하자던 것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사고픈 책을 살만한 돈이 없었다. 
…… 자식에겐 맛있는 과실 한 개를 못 사다 주고 아내에겐 반반한 치마 한 벌도 못 해 입혔다.
- 이병기, 『가람일기』 일부 



가람은 수많은 고서를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활용하여 『국문학전사』 등을 집필하여 서지학 연구의 기틀을 세웠다. 496권에 달하는 한 고문헌에 대한 해제를 써서 한국문학의 성과를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하였다. ‘우리 고전에 대한 정확하고 착실한 직관’으로 모은 이 고문헌들은 해방 후 한국 문학사를 구축하는 기초자료가 되었다.
가람이 수집한 고문헌은 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귀중본이 많다. 『한중록』,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의유당일기』, 『대한계년사』와 같은 역사서를 비롯하여 『어우야담』, 『요로원야화기』, 『가루지기타령』 등의 민담․야사류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특히 완판본 한글 고전소설인 『열녀춘향수절가』 등 국문학 소설을 수집한 경위가 『가람일기』에 꼼꼼히 기록되어 있다.

가장이 살림을 돌보기보다 장서 수집에 열중하다 보면 살림은 궁핍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람은 이에 개의치 않고 돈이 생기면 서점을 돌며 고문서를 구입하고, 이 책을 ‘가요연구회’에서 연구하였다. 가람이 생활비를 아껴서 수집한 덕분에 그의 저서는 오늘날 한국 고전문학의 풍부한 스토리텔링의 보고가 되었다. 가람은 생전에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5천여 권의 자료를 기증하였고 이는 <가람문고>로 보관되고 있다. 가람의 방대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서가인 셈이다. 서울대 규장각에는 가람이 기증한 도서 중 귀중본 3천여 권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다. ​





 가람의 부인과 자녀

가람이 고문헌을 구입하고 한글 보급에 힘쓰는 동안 살림을 꾸리는 것은 부인의 몫이었다.


















한글날을 만들고 말모이를 기획하다

​가람은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는 행사를 최초로 제정하였다. 1924년에 가람은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하는 행사를 주관한다. 가람의 의향이 반영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시 ‘가갸날’을 주관한 조선어학회의 간사가 가람이었다는 점, 그리고 전통에 
현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노력했던 가람의 성향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1924년 2월 1일(금) 맑다. 오후 4시부터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훈민정음 8회갑 기념회를 하였다. 
모인 이가 수십 명. 개회사를 마치고 세종대왕의 공적과 주시경 선생에 대한 강화가 있었고, 
정음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폐회했다. 

-이병기, 『가람일기』 부분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였던 가람은 1924년 첫 번째 훈민정음 창제 기념행사를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열었다. 당시 휘문고 교장인 임경재가 조선어학회 창립회원이었던 인연 덕분이었다. 이듬해인 1925년 4월부터 가람이 휘문고보의 교사가 되면서 휘문고보는 조선어학회 활동의 거점이 된다. 훈민정음 창제 기념행사를 개최한 지 두 해 후인 1926년 11월 4일에 가람은 훈민정음 반포 8회갑 행사를 또 열었다. 이는 세종실록에 문자 개발일(2월 1일)과 해례본 발간(11월 4일)일이 각각 기록된 것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조선어학회는 가람과 임경재 등의 주도로 한글강습회를 본격적으로 열게 된다.(이 점에서 가람 이병기를 기리는 전주백인의자화상 작고 작가 세미나 행사가 2021년 한글날에 개최되는 것은 여러모로 뜻깊다.)

가람은 30대의 왕성한 역량을 한글 운동과 국어 연구에 쏟아부었다. 휘문·동광·보성 등 여러 학교에서 우리말 문법 및 작문과 습자를 가르쳤고, 방학이면 조선어학회 회원들과 전국을 순회하며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글과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알리는 이 행사는 문명퇴치 운동과 민족문화 계승을 위한 계몽 운동이 되었다. 한글강습회를 통해 가람은 시조 작품 속 고유 표현을 살려 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가람은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로서 국어사전 편찬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사전 편찬을 통해 우리말을 지켜낸 가람의 노력은 영화 <말모이>에도 잘 나타난다. 가람은 맞춤법과 표준어 제정위원이 되었고, 동인지 『한글』의 발간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가람은 고유어 회복을 통해 민족의 고유성을 찾고자 노력했다. 








우리말은 그렇게 천대하거나 쉽사리 여길 것이 아닙니다. 장구한 동안, 무수한 파란을 겪어오면서 
오늘날까지 살아 있고 이 뒤에라도 무궁 무궁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 이곳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조선의 마음과 정조가 질정된 훌륭한 사상이나 문학도 이것에서 생길 것입니다.

- 이병기, 「조선어강화 1」 부분





 ◀ 조선어학회 시절 단체 사진             ◀ 철자법위원회 회원 시절(1933)

가람은 조선어학회 초대 간사로 일하면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한글강습회를 열어 우리말을 보급하기 위해 애썼다. 
가람의 어문 운동은 민족의 고유성을 지키는 독립운동이었다.











시조 부흥에서 고전 부흥 운동으로

가람은 한글 보급 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고전문학 연구에도 열정을 보였다. 당시 의식 있는 문학인들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 1925~1935)을 결성하고 계급주의적 문학론을 펼쳐 종래의 기성 문단을 비판하고 있었다. 이때 가람은 ‘조선적인 것’의 수호를 강조하는 국민문학론의 논지를 발전시켜 민족시로서의 시조 부흥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당시 시조 부흥 운동의 과정에서 여러 의견이 존재했다. 즉 시조를 조선 문학의 정수로서 옹호하는 만큼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서‘시조부흥론’에 관한 비판적 의견이 많았던 것이다. 당시 최남선 『백팔번뇌』(1926)가 출간되었지만, 문단에선 여전히 불확정성을 갖고 있었다. 

이때 가람은 영도사에서 시조회를 조직하여 시조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시조회는 1928년에 가요연구회로 개칭하여 고전 가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이병기의 시조 연구에 동조하듯 이광수의 「시조의 자연율」, 이은상의 「시조단형추의」 조윤제의 「시조의 자수고」 등이 잇달아 발표되면서 시조의 형식과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가닥을 잡아나갔다. 가람의 노력으로 1930년대 후반에는 고전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동아일보와 『문장』에서 시조 작품을 모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람은 실증주의적 학문 연구를 중시했다. 시조 부흥론의 경우도 우리 고전을 연구하고 다른 나라의 다양한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다듬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로 가람은 「시조는 혁신하자」(1932)라는 유명한 평론을 발표한다. 가요연구회의 활동과 고전 연구를 통해 숙성시킨 가람의 ‘시조혁신론’은 육당 최남선의 ‘시조부흥론’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육당의 ‘시조부흥론’은 ‘시조를 무시하는 것은 조선적인 것을 망각하는 것임으로 부흥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당위론에 근거한 것이라면, 가람의 ‘시조혁신론’은 ‘시조가 근대문학으로 이행하는 데 실패한 원인을 따지고 무조건적인 퇴출이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여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실증적으로 검토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문학자로서 가람은 한국어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리듬이 시조의 형식에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탐구했다. 즉 운율이 ‘동일한 음이나 유사한 음이나 또는 다른 음이 서로 조화되어 율격 있는 한 형식미’라고 할 때, 시조의 운율을 알기 위해서는 한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즉 가람은 한글을 통해서 근대적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조선 문학의 정수는 여성에게 있다

가람은 도남(陶南) 조윤제(趙潤濟)가 국문학사를 연구하면서 사대부 문학과 양반 시조에 치중하고 고려가요나 기녀 시조, 판소리계 소설 등 평민문학에 소홀한 것에 비해, 국문으로 쓰인 잡가, 가사, 사설시조 등 서민문학에 주목했다. 특히 가람이 ‘서민문학의 백미’로 규정한 것은 판소리문학이었다. 가람은 “이 극가(劇歌, 판소리)는 그때 천대를 받던 광대·기생이 창작한 것이었으며 이들 중에 호협·호방한 천재적인 예술가가 많다”라고 했다. 가람이 보기에 ‘중국의 사상이나 시문을 모방한’ 사대부 문학과는 달리 서민문학인 판소리에는 우리의 자주성과 반항적 사상이 우리말을 통해 오롯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특히 가람은 여성문학의 존재 의의를 높게 평가하여 여성이 쓴 시조에 사대부의 시조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기녀의 작품은 관념이나 유희로서 시조를 읊은 것이 아니라, 절박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생활감정과 인정을 교묘한 수사로 읊어내어 귀족 양반들의 문학을 압도’한다고 하였다.(이병기, 『국문학전사』) 가람은 조선조 여성 시인인 황진이의 시조에 대해 ‘자신의 실감에서 비롯된 시조야말로 그 시대 모든 노래 가운데서도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고 극찬한다. 
한편 가람은 ‘노래로서의 시조’에서 ‘읽는 시조’로의 변모를 주창했다. 그는 ‘격조(格調)’라는 개념을 통해 시조가 말과 소리의 합치를 통해 발전이 가능하며, 이는 시인 자신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리듬에 의해 생겨난다고 하여, 근대시의 문법과 시조의 그것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가람은 ‘격조’라는 말로 시조의 현대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격조에 대한 가람의 발견은 “마침내 시조들이 시인을 만나서 시인한테로 돌아오게 되었다”라는 정지용의 헌사를 낳게 한다. 

가람은 ‘격조’란 결국 말과 리듬, 의미와 음악의 결속으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격조를 형상화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치밀한 묘사를 중시했다. 가람은 감각 경험이나 미적 체험에 기반한 작품 평가를 통해 우리 문학의 정수가 민중의 언어인 한글에서 비롯되었음을 찾으려 했다. 기존의 민족문학사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반영이고 남성 중심이었다면 서민의 언어에 중심을 두고 여성 중심의 문학사를 써낸 가람의 식견은 탁월했다.









문화의 경계인, 한국문학의 영역을 넓히다

가람은 한힌샘 주시경과의 인연에서 국학자로서의 삶을 정립하게 된다. 한힌샘과 인연이 없었다면 가람은 민족의식을 가진 평범한 교사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가람의 변모는 마치 호찌민을 만난 젊은 교사 ‘보구엔지압(Vo Nguyên Giap, 붉은 나폴레옹이라고 불리운 베트남의 군인이자 정치가)’의 운명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보구엔지압이 게릴라전의 영웅이 된 것처럼 가람은 한힌샘(주시경)과의 만남 이후로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에 맞서 전방위적인 게릴라 문화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가람의 투쟁은 가람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한국학의 운명을 바꿨다. 

국학 연구와 교유관계에 있어서 가람이 열린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출신과 성장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유학파 출신도 아니고, 양반 후손도 아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여산 시골 태생으로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양반과 상민의 문화를 즐길 줄 아는 경계인이었다. 재야에 기반을 두고 민족과 세계에 대해 고민하던 가람의 여유와 열린 사고는 광복 이후 좌익과 우익 문인, 재야 국학파와 제도파 학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가람이 1934년에 조선의 언어·문학·역사·민속·미술을 연구하는 <진단학회>를 꾸리게 된 것도 가람의 다양한 교유 관계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진단학회>는 조선의 다양한 장르의 학자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조선어학회 출신을 비롯하여 일본 유학파, 미국 유학파, 민속학 연구자, 마르크스주의자도 조선의 문화를 지키고자 한뜻으로 모인 것이다.

가람 이병기의 열린 식견으로 인해 오늘날 고대가요와 무가가 우리의 전통문화의 성취로 전해지게 되었다. 가람에 의해 구비 전승되었다가 한자로 정착된 신화·전설·민담이 우리 전통문화의 자산으로 기록하게 된 것이다. 가람은 “한문학을 빌려 기록된 것일지라도 우리말로 환원시켜 놓는다면 우리 고대문학의 풍부한 보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이병기, 『국문학전사』) 

가람에 의해 한국문학사는 편협한 경계를 넘어 풍부해졌다. 불교가 기존 사상의 반향으로 시작되었고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켜서 주류의 사상이 되자 폐쇄적 경계를 만들었으며, 불교의 반향이던 유교 역시 같은 절차를 밟았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서학과 동학의 태동이 유교의 반향으로 퍼지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상이든지 배타적이고 독선적으로 군림하게 되면 수용자를 무비판적이고 굴복적으로 만들게 된다. 즉 수용자의 주체성과 자주적 수용력이 있어서 ‘민족적 본질’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장파>의 정신적 지주

가람의 고전 부흥론은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며 인연이 된 정지용·이태준이 잡지 『문장』을 창간하면서 창작계에도 뿌리내리게 된다. 잡지 『문장』은 고전적 심미주의로 불릴 만한 1930년대 후반 고전 부흥 운동을 일으켰는데, 가람은 이 운동의 정신적 수장이었던 셈이다. 가람은 또한 우리나라 최초로 신인 선고 위원을 맡아서 김상옥, 이호우 등의 시조시인을 데뷔시켰다. 당시 ‘문장파’로 표상되는 신예 작가들은 요즘의 ‘아이돌’ 같은 인기를 끌었는데 이들 문장파 작가들이 섬세한 감각과 절제된 언어로 세계를 정감 있게 그려내면서 한국문학의 한 축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가람의 영향이 현대문학에 깊게 자리했다고 할 수 있다. 




 ◀ 휘문고보 재직 시절         ◀ 『가람시조집』(1939)        ◀ 『문장』

휘문고보 교사 시절 제자로 만난 정지용과 이태준은 『문장』을 이끄는 동지가 되었다.





‘문장파’의 특징은 상고주의적, 전통 지향적 관심이 컸다는 것이다. 그들은 한국 고전문학의 최고의 예술적 수준을 여성문학의 성취에서 찾았는데 이는 가람의 평소 의견과 같다. 특히 문장파로 지칭되는 이들은 ‘난’으로 표상되는 정신적 기호를 통해 상고주의(옛 문물 등을 숭상하는 주의)의 기풍을 표현했다. 문장파가 추구한 것은 고전론을 통한 민족공동체에 관한 역사적 감각의 각성이었으며, 사대부의 심미적 문화의 지향이었다. 가람은 문장파와 함께 고전문학의 재발견 작업을 지속하였다. 문장파는 이후 청록파라 불리는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다. 조지훈은 조선어학회 간사를 거쳐 가람과 함께 국정교과서 편찬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또한, 잡지 『문장』에는 편집인 제도를 두었다. 편집인 정인택은 이상, 김유정, 박태원 등의 글을 발표하게 했고, 편집인 조풍연은 해방 후 을유문화사의 편집인이 되어 한국문학의 주요 작품을 출간했다. 을유문화사 직원이었던 박두진이 이곳에서 『청록집』을 낸 것도 이러한 인연 덕분이다. 가람 이병기가 영향력을 행사한 『문장』이 해방 이후 한국문학 편집과 출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









해방 후 교과서를 편수하고 가장 많은 교가를 지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가람은 서울 집을 팔고 고향인 여산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밭머리를 지나가는 마을 사람에게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듣는다. 가람은 1945년 8월 17일 고향 사람들의 추천으로 여산민회(礪山民會)의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10월 30일엔 미군정청 학무국 편수관으로 취임하여 중학교 국어 교과서의 편수 주임을 맡았다. 『가람일기』에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인물인 외솔 최현배의 소개 덕분이었다. 외솔은 미군정청 시절 교과서 편수국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해방 직후 교과서 편찬에 대한 각종 학회의 갈등이 심하자 이 일을 해결할 적임자로 가람을 추천하여 2년간(1945~1947) 가람이 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게 했다. 





  ◀ 『현대시조 삼인집』       ◀ 군정청 편수관 근무 시절(1946)

해방 후, 가람은 교과서 편수주임을 맡아 우리말의 미학적 가치를 드높였다. 





해방이 되자 학교에서 쓸 마땅한 교과서가 없었다. 그래서 조선어학회는 군정이 시작되기 전인 1945년 8월 25일에 긴급총회를 열어 한글 교재를 펴내기로 결의했다. 교과서를 편찬할 시간과 인력이 없었던 군정이 조선어학회에 교과서 편찬 사업을 일임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조선어학회 간사였던 조지훈이 국어 교과서와 국사 교과서 편찬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사연이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국어 교과서뿐 아니라 교과서 편찬 전반에 걸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다른 학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던 중이었다. 이때 좌익 계열의 문인들이 만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이하 문건협)는 교과서 편찬 방침에 반발하던 여타 단체들을 규합하여 국정교과서 편찬연구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세력화에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람이 교과서 편수관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가람은 국정교과서가 좌우익에 편향되지 않게 문학성과 교육성의 균형성을 갖고 편수 작업에 매진했다. 

가람은 해방 이후 가장 많은 교가를 작곡한 작사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 교가를 비롯하여 전북대학교 교가와 여산 남초등학교 교가까지 역사가 오래된 50여 개 학교의 교가를 작사했다. 1949년에 쓴 일기에는 서울대학교 교가 발표회와 관련된 내용이 밝혀져 있다. ‘10월 26일(수) 오후 1시 강당에서 국립서울대학교 교가 발표식이 있다. 점심 먹고 문리대 강당에 갔다. 학생 교수가 빽빽하게 모였다. 내가 지은 교가를 읽으며 해설했다. 그다음 현재명 군이 작곡에 대해 설명했다. 퍽 유쾌했다.’ 
가람은 전북대학교 학장이 되면서 전북대학교 교가도 서울대학교 교가를 작곡한 현재명과 함께 만들어 발표하게 된다. 전주 시절 가람의 양사재에는 최승범, 박병순, 황희영, 이기반 등 지금의 전북 문단을 만든 이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난초꽃이 피면 술 마시자는 서신보냈다

가람을 떠올리는 데 있어 가장 어울리는 말은 삼복지인(三福之人)이란 말일 것이다. 스스로 술 복, 난초 복, 제자 복이 있다고 자랑했거니와 뇌내출혈로 쓰러져 사망하기까지 10여 년간 매일 두 되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는 늘 ‘영양가가 밥보다도 술’이라고 말했고, 만년의 와병 중에도 ‘내 병과 술은 무관하다’면서 술잔을 기울였는데, 고급 요정보다는 선술집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데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 이병기, 「난초 4」 전문




깨끗함을 즐기면서도 굳은 듯 보드라운 난초는 곧 시인의 마음이자 정신적 태도를 보여준다. 하얀한 꽃이 벌거나, 이슬이 구슬 되어 마디마디 달린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시인은 어떤 기품을 나타내려 한다. 그것은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사는 태도를 의미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가람의 면모는 고향 집의 당호인 ‘어리석음을 지키는 집[守愚齎)]’과 닮았다. 그는 친히 수우재의 기둥에 ‘욕됨이 없으니 편하다(安兮身無辱)’라는 주렴을 걸었다. 난초의 외관 묘사를 통해 난초가 가진 속성을 표현한 것은, 선비의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던 가람의 의지가 사물과 합일되어 나타난 것이다. ​


나는 난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분(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병원이라고도 하였다. 
(중략) 휘문중학에서 교편을 잡고 독서·작시도 하고 고서도 사들이고 그 틈틈이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왕왕 새우기도 하였다. 그러면 그럴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 이병기, 수필 「풍란」 부분





​가람은 난초가 꽃을 피우는 것을 기다리고 보는 행위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엄혹한 현실에서 자신을 지키면서 본원적 생명과 예도를 지키겠다는 미학적 의지를 표명한다. 가람은 난에서 ‘기개를 품은 선비 정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람은 난을 키우며 온갖 괴로움과 울적함을 이겨내려 했다. 가람의 미학적 초극(超克) 정신은 수감 기간 내내 창씨개명(일본식 성명 강요)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석방 후에는 절필로 저항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여 친일 문학 연구의 선구자인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가람을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긴 일이 없는 영광된 작가”라고 기술하였다. 이러한 전후 사실을 볼 때 일부 제기되는 가람의 친일 혐의는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가람 선생 내외 

가람은 생가인 <수우재>에서 난을 기르며 삼복지인(三福之人)의 풍류를 꽃피웠다. 




가람은 1939년에 쓴 시조론에 추사 김정희의 서화론의 핵심인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책을 많이 읽고 쌓으면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이 난다)’을 빌려 온다. “서권기란 독서의 힘이요, 교양의 힘이다. 이것이 어찌 서도에뿐이리오. 문장에서도 없을 수 없다. 위대한 천재는 위대한 서권기를 흡수하여서 발휘될 것이다.”(이병기, 「서권기」) 
난초의 향기는 가람의 정신사적 풍모에 다름 아니었다. 가람은 난초꽃이 피면 휘문고보 제자들이자 고전 미학론의 동지인 정지용·이태준에게 서신을 보냈다. 이태준의 글에 보면, “지용 형에게서 편지가 왔다. ‘가람 선생께서 난초가 피었다고 22일 저녁에 우리를 오라십니다. 모든 일 제쳐놓고 오시오. 청향복욱(淸香馥郁, 맑고 깨끗한 향기가 그윽하게 풍기는)한 망년회가 될 듯하니 질겁지 않으리까.’ 과연 즐거운 편지였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하는 노래도 있거니와, 이 영하 이십 도라는 엄동설한 속에 꽃이 피었으니 오라는 소식이다. 이날 저녁 나는 가람 댁에 맨 먼저 들어섰다. 미닫이를 열어주시기도 전인데 어느덧 호흡 속에 훅 끼쳐 드는 것이 향기였다.”(이태준, 「설중방란기(雪中訪蘭記)」)라고 추억한다.









​전북에 선비 정신을 뿌리내리다

가람은 해방된 이듬해인 1946년 10월부터 서울대 문리과 대학 교수로 근무하였으나 한국전쟁 때의 부역 혐의로 그만두게 되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 해인 1951년에는 61세 화갑(華甲)을 맞아 전주 명륜대학(전북대 전신) 교수와 원광대 명예 국문학과장과 교수 겸임을 수락하면서 지역 문단의 어른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서울에서 내려오면서 장서는 여산 고향 집으로 옮기고 생활은 전주의 양사재에서 하게 되었다. 1952년에 가람은 전북대학교 초대 문리대 학장이 되었다. 가람이 전주시 양사재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다. 한번은 신석정·박희선 등과 통음을 하다가 술상을 물리치고 주인장에게 지필묵을 청해 “때로는 개도 사람보다 낫다.”라는 글을 써 주었다. 당시 양사재에서 키우던 개(재동이)에 대한 시조가 남아 있으니, 한국전쟁 후 독재로 치달았던 야만적인 세상을 경계한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가람의 순박함과 솔직함은 종종 재미있는 일화를 남기기도 한다. 한국전쟁 중의 통행금지가 있던 험악한 시절에 술이 불콰한 채로 여산지서 앞을 지나다가 불심검문에 걸리자 “나 이병기야! 몰라?”라고 호통을 쳤다. 다행히 검문초소에 서울대에서 학생으로 있던 이가 그를 알아보고 즉결심판이 될 것을 면했다. 가람은 한국문단의 기틀을 세웠으며 전북문단에 서권기 문자향의 뿌리가 되었다. 전북 문단의 시작이 가람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5년 8월에 쓴 『가람일기』에는 신석정 시인과의 만남이 기록되어 있다. 




 ‘조운, 신석정 등과 대항리 해수욕장에 갔다. 오전 3시까지 천막 밑에서 맥주를 마시며 밤을 새우다…… 
채석강 바위 언덕에서 섬월은 노래를 한다. 육자배기는 더욱 잘한다. 
이 바다의 풍경에도 손색이 없을 만한 고운 소리다. 신석정 군이 음식 한 상을 차려 왔다.’

- 이병기, 『가람일기』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영광의 조운 시인과 부안의 신석정 시인과 만난 이야기다. 월북한 조운 시인과는 후일 『삼인시조집』을 펴냈고, 신석정 시인과는 스승과 제자처럼 여러 자리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곤 했다. 매창에게서 조선문학의 정수를 발견했던 가람의 영향으로 후일 신석정은 『매창 시집』을 번역하여 발간하게 된다. 
람은 말년에 중풍으로 언변이 자유롭지 못할 때도 문병객에게 한참 끙끙대며 ‘나는 살고 싶다’는 말을 써주었을 정도로 생에 대한 열정이 강했고, 난초꽃이 피면 지인들과 꽃그늘 아래 술잔을 기울이자는 서신을 보내어 선비의 격조가 고전의 문자향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삶에도 풍류의 바람을 따라 가득하길 바랐다. 









가람의 유산


가람은 해방 이후 극심했던 이데올로기를 초극한 소통적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주시경 문하에 있던 최현배·정인승 등과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였고, 손진태·안확 등과 진단학회에도 참여했다. 이희승·이병도·조윤재 등 우파 성향의 학자들과도 잘 지냈으며, 이전에는 조선불교 중앙구락부와 대종교에도 참여했다. 석전 박한영과 춘원 이광수와의 교류가 깊어 금강산 유람에 동행한 것도 가람의 폭넓은 교유 관계에 기인한 것이다. 이렇게 가람의 활동 범위는 문학·예술·역사·종교 등 광범위하여 “가람 있는 곳에 국학이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한국문학사에서 가람처럼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분야에 문학적 영향력을 갖는 문인이 드물다. 가람은 어학·문학·민속학·서지학 등 국학 연구 전반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귀향한 후에는 그의 집으로 신석정·최승범·박병순 등이 출입하면서 문자향 서권기의 정수를 전북문단에 이어받았다. 

 

가람이 남긴 저술은 시조집 2권, 시조론 1권, 국문학사 1권, 국문학개론 1권, 주해서 8권, 번역 및 선집 6권, 교과서 11권, 서지 목록 2권, 어린이 역사서 1권, 육필 일기와 고어집 노트 1권을 비롯하여 신문과 잡지 및 학술지에 실린 850여 편의 저술과 교가 47편 등 총 자료 수는 930여 편을 헤아린다. 그가 남긴 멋과 풍류의 정신은 전북학의 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람의 사후에 문화포장(1962)이 수여됐고, 건국포장(1977)은 이후 건국훈장 애국장(1990)으로 승격되었다. 생가는 전라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17년에는 가람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가람 이병기 전집』의 출간이 시작되었다. 

 

 

 

 

  ◀ 평생을 써 온 『가람일기』

 

 

  ◀ 국가에서 받은 훈장         ◀ 『가람문선』       ◀ 『국문학개론』​

 

 

 

 


 

 ● 자료제공: 가람문학관













이병기 연보


1891년(1세): 3월 5일, 전북 익산 여산면 원수리에서 이채·윤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16세): 12월, 김수와 결혼했다.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읽고 신학문에 뜻을 세웠다. 

1909년(19세): 4월 13일 한문으로 일기를 적기 시작했다.

1910년(20세): 3월, 전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동시에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에서 수학했다. 

1913년(23세): 3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남양보통학교와 여산보통학교에서 훈도(訓導)로 재직했다.

1919년(29세): 3월, 교직을 그만두고 4월 상경했다. 8월 10일부터 한글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만주로 갔다. 10월 8일,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으나 상업 목적 방문임을 주장하여 10월 11일에 풀려났다.

1920년(30세): 11월, 조선불교회에서 박한영의 『능엄경』 강의와 권덕규의 ‘조선어 강의’를 들었다. 12월 조선불교회 이사가 되었고,‘대종교’에도 참여했다. 

1921년(31세): 11월, 주시경이 추진했던 ‘말모이’목록을 기초로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획했다.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를 열어 초대 간사를 맡았다.

1922년(32세): 5월, 동광학교 교원이 되어 1924년 보성고보 분교가 되기까지 근무했다.

1923년(33세): 7월, 박한영·이광수와 금강산 여행을 했다. 9월, <말모이> 낱말카드를 작성했다. 

1924년(34세): 2월 1일, 휘문고보에서 조선어연구회 주최로 훈민정음 8회갑 기념회를 개최했다. 4월, 휘문고보 교원이 되었다. 장남 동희을 얻고 서울 계동집을 구입했다. 

1926년(36세): 5월, 경성중등교원 시찰단으로 일본을 여행했다. 11월 4일과 6일에 교육·언론계를 대상으로 훈민정음반포 8회갑 기념축하회를 개최하고 기념 강연을 했다.

1927년(37세): 1월, 조선어강습회를 시작했다. 10월, 훈민정음 반포기념일을 ‘가갸날’로 명칭을 정했다.

1929년(39세): 차남 경희가 태어났다. 1월과 2월 ‘한글과 시조’, ‘한글과 가요’에 대해 강연했다.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이 되었고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40세): 11월, 한글반포기념식을 명월관에서 거행하고 다음 해부터 10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12월, 조선어연구회 한글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다.

1931년(41세): 1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규칙 개정에 참여했다. 2월, 조선어·한문교원회를 결성했다. 7월 전국에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32년(42세): 삼남 종희가 태어났다. 11월 휘문고보 교지 발행이 금지됐다.

1933년(43세): 1월, 조선문흥회 초대 간사를 맡았다. 온양온천에서 합숙하며 조선어표준어사정회(철자법 통일안)를 검토했다. 이후 세 번의 독회를 거쳐 1936년 10월 표준어사전 결과 발표를 했다. 11월, 모친이 사망했다.

1934년(44세): 5월,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송만갑·이동백을 찾아가 판소리(극가)에 대한 의문점을 문의했다.

1935년(45세): 1월,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이 되었다. 김소월 추도회에서 추도사를 했고, 구인회 행사에 참석했다. 8월엔 전라도 일대를 답사하며 신석정 등과 만났다.

1936년(46세): 10월 28일 한글날 기념식(490주년)에 ‘한글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했다. 

1937년(47세): 5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주관한 ‘조선교화단체 연합회 조선문예협회’ 참석을 거부했다. 방송 출연이 많아졌다.

1938년(48세): 3월, 조선어 과목이 폐강되자 휘문고보를 사임했다. 이후 시간강사를 하며 연희전문에 출강했다. 6월, 조선어학연구회 사전편찬위원 위촉을 거절했다.

1939년(49세): 2월, 『문장』지 시조 추천위원이 되었다. 9월에 『가람시조집』을 출판했다. 

1940년(50세): 1월, 신석정 첫 시집 『촛불』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7월, 아악부에서 거문고를 배우기 시작했다. 8월, 창씨개명 수속 마감일까지 불응했다. 

1942년(52세): 10월 22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홍원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3년(53세): 9월 12일,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다. 9월 18일, 출감 후 고향인 여산에 갔다.

1944년(54세): 3월, 계동 집을 팔고 낙향해서 8·15 광복까지 고향 여산에 머물렀다. 9월, 장남 동희가 징집된 후 돌아오지 않았다.

1945년(55세): 8월 17일, 여산민회를 조직하고 부위원장에 피선됐다. 10월, 미군정청 학무국 에서 중등 국어 교과서 편수주임에 취임했다. 

1946년(56세): 9월, 서울대 교수로 임용됐다. 11월,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직을 맡아달라는 김남천의 청을 거절했다. <교과서 검정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었다.

1947년(57세): 4월, 군정청 편찬과장을 사임했다. 6월 『한중록』을 출판했다. 조선어학회가 출간한 『조선말큰사전』 제1권을 축하하는 시조를 발표했다.

1948년(58세): 2월, 『가람시조집』(백양당) 재판을 냈다. ‘조선문화’를 주제로 각지에서 초청 강의를 했다. 12월 부친이 작고했다.

1949년(59세): 3월, <시조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7월, 수도청 사찰과에 <조선문학가동맹> 가입 사실이 없음을 진술했다. 12월, 서울대 교가를 현재명과 짓다.

1950년(60세): 6월, 인민군 치하에서 서울대 임시자치위원회 상임위원에 선출됐다. 서울이 수복되자 학도호국단의 조사를 받았다. 10월 25일, 고향 여산으로 낙향했다.

1951년(61세): 4월, 전주 명륜대학 교수가 됐다. 6월, 전주시 양사재로 이사했다. 7월, 원광대학 명예 국문학과장 및 교수가 됐다. 

1952년(62세): 6월, 전북대학 초대 문리과대 학장이 되었다. 

1954년(64세): 3월, 심원다방에서 가람 동인회 사화집 『새벽』 출판기념회를 했다.

1956년(66세): 3월, 전북대학교 정년 퇴직 했다. 전북대, 중앙대, 서울대 강사로 위촉됐다.

1957년(67세): 4월, 학술원 추천회원이 됐다. 9월, 문교부장관 초대 국제펜클럽 작가 환영연에 참석했다. 10월 9일, 한글날 기념행사 후 귀가 도중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1958년(68세): 3월, 교수직을 사임하고 여산으로 귀향했다. 10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백철과 공저한 『국문학전사』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1960년(70세): 7월, 학술원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8월, 학술원 임명회원이 됐다.

1961년(71세): 6월, 전북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 8월 15일엔 문화포장을 받았다.

1963년(73세): 5월 16일, 갑오동학혁명기념탑 건립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5월, 장서를 서울대에 기증했다. 10월, 정읍 황토현에 건립한 동학혁명기념탑 제막식에 참석했다.

1968년(78세): 11월 28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12월 2일, 전라북도 문화인장으로 여산 남초등학교에서 영결식을 하고, 생가 뒤에 안장했다.

1973년 : 6월 23일, 생가인 수우재가 전라북도 지방문화재(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다. 

1990년 : 건국훈장애족장을 포상받았다. 

2017년 : 10월, 가람문학관이 건립됐다. 『가람 이병기 전집』 간행이 시작됐다.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첨부파일
Life  where  art  becomes  everyday   life  where  art  brings  happ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