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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백인의 자화상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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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난만한 동심 세계와 한국적 감성 구현, 문인화가 하수정
  • 2025-04-08 14:06
  • 조회 44

본문 내용






 

 

 

 

 

람곡 하수정의 삶과 예술세계

-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한국적 감성의 구현 -

 

 

 

이은혁(문학박사)

 

 

람곡 하수정


 

1. 가계와 생애

 

람곡 하수정은 1942(壬午) 8, 부친 하수열(河粹烈)과 모친 조남천(趙南川) 사이의 3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하화자(河和子),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경남 거제 출신의 서예가 성파(星坡) 하동주(河東州) 선생의 증손녀이다. 성파 선생은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누각으로 불리는 경남 밀양의 <嶺南樓> 현액을 쓴 서예가로 추사의 제자였던 부친 하지호(河志灝)로부터 추사체를 전수(傳受)했다고 알려져 있다. 람곡 선생이 자신도 모르게 서화의 길로 들어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래적(生來的)이라고 회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부친 하수열은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농대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정읍농고, 이리농고, 전주사범 서무과장을 역임한 교육자였다. 농학을 전공하여 화초와 수목을 가꾸었으므로 사람들은 선생의 거처를 화초를 기르는 집으로 일컬었다고 한다.

모친 조남천은 군산 멜볼린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에 유학하여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전주시청 최초 여성 공무원이 된 신여성이었다. 전주 백도극장에서 열린 국악 창극 <임춘앵과 김진진>의 사회를 맡아 진행하며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람곡 선생은 형제자매 중 어머니의 예술적 기질을 가장 닮았다고 회고한다. 모친은 연설가로도 활약했으며, 대한부인회 회장을 30여 년간 역임하였다.





 

 

 

람곡 선생은 신학문을 익힌 부모의 슬하에서 진취적인 사고와 호학 정신을 이어받았고, 아울러 예술적 기질을 물려받았다. 특히 신여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보였던 모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회고한다.

전주사범 부속국민학교(현 전주교대 부속초등학교)-중앙여중(현 중앙중)-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대)를 졸업하고 남원에서 처음 교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0(19) 9, 남원 송동국민학교 교사로 초임 발령을 받은 이래, 남원 금지국민학교, 남원국민학교를 거쳐 전주 팔복국민학교로 발령을 받아 고향 전주로 복귀하였다. 남원 금지국민학교에 재직할 때 교동의 강암 송성용 선생을 직접 찾아뵙고 정식으로 문하에 들어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웠다. 전주사범학교 지근 남천교 건너에 강암 선생이 거처하고 있었으므로 학창 시절부터 동경하던 스승에게 비로소 친자(親炙)를 받게 된 것이다. 1968(27) 전주 남국민학교로 전근했을 무렵에는 강암 선생의 문하생 모임인 (강암)연묵회가 결성되었고, 그해 10월 연묵회 주최 제1회 전라북도 서예전람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969년 제1회 연묵회전(5.10.~5.16.)이 사리문다방에서 열렸다. 강암 선생을 중심으로 전북 서단이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람곡 선생은 주말마다 강암 선생을 찾아 서예를 배웠다. 비회원이었지만 강암 선생이 추천하여 연묵회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정식으로 연묵회에 가입하였다. 연묵회에 들어간 것은 비로소 정식 문제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삼십 대 중반에는 사범학교 근처 동서학동에 거처하고 있던 유제식(柳濟寔) 교수에게 한학을 익혔다. 유 교수는 본래 불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유학자 성당(誠堂) 박인규(朴仁圭, 1909~1976)의 문하로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클래식 음악에도 정통한 학자였다. 본래 전주사범 2회 졸업생으로 사제이자 선후배로서 각별하게 대했다고 한다. 이즈음 유제식 교수께서 람곡(嵐谷)’이라는 아호와 호기를 지어주었다. ()은 맑은 봄날 햇빛이 강할 때 지면에서 아른거리며 올라가는 아지랑이를 뜻하는데, 한자어로는 야마(野馬) 또는 양염(陽炎)이라 부른다. 봄날 아지랑이가 핀 계곡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한 아우라가 느껴지는데 그 속에서 왕성한 생명 활동이 전개되고 있듯, 여성 교사로서 열정적인 모습이 아리송하지만 배움의 열정과 강한 집념이 이와 흡사하다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화자(和子)’라는 본명 대신 수정(秀貞)’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여 람곡 하수정라는 호와 이름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젊은 여성으로서 교직에 종사하는 한편, 유학자적 풍모와 지덕을 갖춘 강암 선생과 유제식 교수를 사사(師事)하며 학예를 겸수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양친에게서 물려받은 호학 정신을 실천한 것으로 역시 선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두 스승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람곡 선생은 1972년 전주 남국민학교를 끝으로 12년 남짓의 교직을 명예퇴직하고, 전주시 중앙동에 <잉꼬수예의 집>을 개업, 운영하면서 서예에 매진하였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37(1978) 때 제27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일명 국전)에 출품하여 처음 입선함으로써 서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45년 후인 201372세때 강암연묵회 회장을 역임하고, 금년 83세이니 어언 60여 년의 세월이다.

 

 

 

2. 서단의 동향과 강암연묵회

 

광복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신인 작가의 등용문인 전국 규모의 공모전은 크게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1949~1981), 대한민국미술대전(1982~1988), 대한민국서예대전(1989~)으로 이어졌다. 람곡 선생은 강암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국전 서예 부문에 출품하여 제27(1978), 28(1979)에 연이어 입선하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제1(1982) 입선, 2(1983) 특선, 3(1984) 입선하였다. 이후 1989년 한국서예협회가 창립되면서부터는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그간의 공모전에서 엄선된 작품을 일별해 보면 황산곡 해서, 하소기 행서, 하소기 금문, 금문 대련, 북위서 대련 등이다. 황산곡과 하소기는 혁신파에 속하는 개성이 뚜렷한 작가이며, 금문과 북위서는 당시 새롭게 유행한 서체이다. 등용문인 공모전 출품작의 성향을 보면 혁신과 신서풍에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이후 작가의 작품 성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외에도 지역작가 등용문인 전라북도미술대전에서도 특선 2, 동상, 은상을 수상하고 3년의 추천작가를 거쳐 전북도전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국전에서 연이어 두 번의 입선과 전북도전에서 특선과 동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던 1981년에는 미술 교사인 부군 김대현(金大鉉)과 함께 전주시 중앙동 373-2번지에 금하(金河)미술관을 개관하였다. 금하는 부군의 성인 자와 자신의 성인 자를 합하여 미술관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때 개관을 기념하여 첫 개인전 <하수정 임서전>(6.25.~7.5.)을 개최하였다. 그 내용은 32점의 한문 오체 임서전으로 전통 서예의 수련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이때 발간한 도록에는 스승 강암 송성용 선생의 축사와 유제식 교수의 중국 법첩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강암 선생의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嵐谷 河秀貞 女史가 처음으로 臨書發表展을 갖는다그의 書度는 이미 道展이나 國展을 통해 널리 斯界의 認證을 받은 바 있다主婦로서 奔忙한 生活의 餘白을 이와 같이 法古의 書藝로 昇化시킨 점에 대하여 讚辭를 아끼지 않는다날로 刻薄해 가는 듯한 오늘의 世態에 비추어볼 때 그 淳厚한 情緖가 더욱 하게 여겨지는 바이다이번에 展示되는 作品에서 法古爲主의 正道를 指向하고 있다이로써 그의 書藝의 앞날에 精進이 豫見됨은 물론이요다른 學書人들에게도 많은 參考가 될 줄 믿는다繼續 정진 있기를 바란다.” 

辛酉 六月 日 剛菴 宋成鏞

 

 


 

 

전시 개막 때 강암 선생은 刮目(괄목)’이라는 두 글자를 방명하였다고 한다. 이 전시는 10일간의 전주전에 이어 7월에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순회 전시를 하였다. 여기에는 다양한 서체 학습의 과정을 선보임으로써 서예가로서 굳건한 입지를 다지려는 포부가 깃들어 있다. 이로부터 현재까지 수십 번의 개인전을 통해 끊임없이 서예의 영역을 확장해 왔다.

 

 
 

강암연묵회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시가 대만 감람재((橄欖齋)와 공동으로 주최한 국제교류전이다. 1982년 제14회 연묵회전은 대만의 원로 서예가 사종안(謝宗安, 1907~1997)이 이끄는 감람재와 <1회 한중이문연의전(韓中二門聯誼展)>이란 이름으로 국제교류전을 개최하였다. 이로부터 24(1991) 연묵회전까지 격년제로 양국을 오가며 모두 다섯 번의 <한중연의전>을 개최하였는데, 람곡 선생도 참여하여 대만을 방문함으로써 예술적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고, 동시에 중국어에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985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한 이력은 바로 이런 열정이 지속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후 중국어 공부는 오랜 시간 차근히 진행되었다.

 


 

 

3. 작품 활동과 예술관

 

람곡 선생의 개인전은 국전이 30회로 막을 내리던 1981년에 처음 열렸고, 이후 미술대전 시기에는 예루갤러리 개관기념 초대전(1983)이 있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서단이 급변하여 1989년 한국서예협회가 창립되고,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로 선정되면서부터 공모전을 벗어나 비로소 작가로서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람곡 선생에게서 두드러진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이다. 연묵회와 진묵회 등 단체전도 꾸준히 참여했지만, 50세 이후에는 주로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였다. 1990년대에는 서예에서 문인화로 영역을 확대하였다. 90년대 초에 잠시 창현 박종회(創玄 朴鍾會) 선생을 찾아 문인화의 기초를 다진 후 주로 문인화에 대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법(師法) 얽매인 작품은 없었다. 주된 소재는 연()과 새, 그리고 국화 등이었다. 문인화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연마한 서예에서도 사법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는 람곡 선생이 전통적 기법의 고수보다는 창신(創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그렇다고 숨겨진 것을 찾아내고 기이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일상의 일을 예술로 환원하고, 그런 작업이 일상이 되는 일상의 예술이자 예술의 일상이다. 작품뿐만 아니라 언행도 그렇다. 선생의 이러한 점을 이해하여야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다.

 

1) 빙점 시리즈와 한국성

람곡 선생의 예술세계를 조망하기 위해 1981년 첫 개인전으로부터 2024년 청목미술관 초대개인전까지 50여 회에 달하는 개인전을 몇 개의 단위로 구분 지어 논하고자 한다.

그중에서 먼저 빙점 시리즈개인전을 들 수 있다. <빙점(氷點)>을 주제로 내세운 개인전은 모두 세 번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빙점은 작품의 내용을 망라한 키워드가 아니라 작가의 예술적 고뇌를 상징화한 말이다. 빙점의 사전적 의미는 물이 얼기 시작할 때 또는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의 온도이다. 즉 물과 얼음의 경계선이다. 물이 될 수도 있고 얼음이 될 수도 있는 변화의 갈림길이다. 경계란 양단을 겸하고 있는 곳이며, 이는 다양성과 모호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주역'에서 제시한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구즉궁(久則窮)”이라는 말은 세상 만물이 순환하며 변화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종이 순환론이다. ‘궁하면 변한다궁즉변이 필연적인 시간적 인과성(因果性)을 말하는 것이라면, 빙점은 그 변화의 기로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모호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술 작업에 대한 성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갤러리 초대전으로 열린 <氷點 > 전시와 관련하여, 당시 도록에서 김승방(강암연묵회장)문인화의 새로운 모습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번에 전주 수갤러리에서 초대전을 갖는 람곡 하수정의 작품은 문인화의 새로운 시도이고 모색이다. 문인화라기보다는 그냥 그림이다. 람곡의 작품에 문인화니 서양화니 하는 장르를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람곡은 누구보다 열심히 서예와 문인화 공부를 했고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런 그의 작품이 점차 전통적인 서예와 수묵으로 그린 문인화의 모습이 사라지고 화선지 대신 천연염색을 한 삼베 모시 한지 천으로 바뀌고 종전의 수묵과 함께 아크릴 그 외 이름을 알 수 없는 서양화 물감이 스스럼없이 등장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는 람곡이 남의 눈을 끌기 위한 제스처가 아니다. 그는 오래전에 수예점을 한 일이 있어 천과 가까이한 그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군과 아들은 서양화가이다. 서양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옆에서 일상으로 보았고 물감이 주변에 널려 있다. 서양화 붓을 사용한 것은 아니고 나이프를 사용한 것은 더욱 아니다.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것이다. 사실 손만큼 편한 것이 있을까? 우리 전통 그림 중에도 지두화가 있다. 붓이 아니니 따지고 들 격식이 없고 얽매일 데 없으니 자유스럽다. 유치원생이 간섭도 받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린 것 같다. 그의 그림에는 대상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서예가 있고 문인화가 살아 숨 쉬고 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관자(觀者)에게 왜 장르가 있어야 하고 법이 중요하냐고 묻고 있다. 달관한 그의 인생을 본다.”


 

이 전시는 서예가라는 직함에 걸맞게 전통적인 서화 작품이 주류를 이룰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서양화인지 동양화인지 의아해하는 관객들의 당황한 표정에서 그동안 얼마나 편협한 사고로 예술을 바라보았나 자반(自反)하게 만들었다. 필자 또한 전시를 관람하고, 그 감흥을 차분히 정리하여 '월간서예'에 리뷰를 게재한 적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세간의 평처럼, 람곡 선생은 금번 전시를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그러나 그 변화에 대하여 경계가 모호한 빙점이라는 주제어를 반어적으로 제시하여 스스로가 혼돈(混沌)의 상태에 처해 있음을 고하고 있다. 따라서 변해야 한다는 예술가적 강박관념에 의한 표출이 아니라 일상적인 예술 행위와 표현되어진 그 자체에 위안할 뿐이다. 그러고는 스스로 자신의 행위와 표상들에 대하여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짐으로써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어쩌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겠다는 대상과 방법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예술적 행위와 소산에 대해서도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작가의 또 다른 의도인지도 모른다. 아니 서예에서 문인화로, 그리고 다시 서양화로 전이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새삼 의아해하는 세간의 평을 일축하는 예술가적 코멘트로도 느껴진다

보일 듯 말 듯 먼발치에서 가물가물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람곡 선생다운 발상이다.

실은 람곡 선생의 부군께서는 일찍이 서양화를 전공하였고, 영식(令息) 또한 서양화를 전공한 유학파 화가로서 동서양의 예술이 한 지붕 아래에서 늘 자연스럽게 논해지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선생의 작업과 작품이 왜 그리로 향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 필묵과 함께 대해 온 서양화의 재료들이 데생을 배운 적도 없는 선생에게 어떻게 유용할 수 있었을까. 람곡 선생이 일종의 지두화(指頭畵)라고 고백하였듯이, 금번 작품들은 우연히 남겨진 서양화 물감들을 손수 공들인 한지천에 바르고 문질러 만든 것이다. 아무렇게나 손끝에서 문드러진 모호한 형상들을 재차 초필로 선을 그어 형태를 빚어냄으로써 다분히 생동감이 느껴지는 문인화로 탈바꿈시켰다. 몇 가닥의 가녀린 선이 생명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화의 재료에서 나타나는 면과 색의 확장을 선을 통하여 제어하고, 다시 한지 천의 특성을 살려 낙관을 첨가하였다. 다소 번잡스럽다는 관자의 평에 내버려 둬, 그것이나 내 맘대로 하게라며 웃음 짓는 모습에서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예술적 탈피(脫皮)의 쾌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자신을 답답하게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벗어버린 만큼 선생은 

당분간 또 다른 경계에서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빙점 시리즈를 통해 선보인 작품들에서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서예와 한학을 겸수했던 전통적인 서예가의 모습보다는 90년대 이후 관심을 보인 문인화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지필묵이 아닌 광목과 한지천에 아크릴릭을 활용한 문인화와 성화(聖畵) 등 다양한 소재를 독특한 기법으로 담아냈다.

 



일별해 보면, 광목과 한지천을 이용한 작품은 2007년 전주 인근 운암의 오스갤러리 초대전에서 비롯되었다. 이어 2007년과 2008년 뉴욕 맨해튼(한인회관)에서 한지천에 아크릴릭을 활용한 문인화를 선보인 것도 동일 선상에 있다. 일련의 혁신적인 작업들은 서울코엑스 엑스포(2008), 전주패션협회 한지천 침장전(전주 코아아울렛, 2008), 그리고 전주 한지축제와 한스타일박람회(2008), 전주공예품전시관(2010) 등의 초대전으로 이어져 한지천과 침장, 지두화 등이 어우러진 독창적인 기법으로 한국성을 담아냈다. 이는 종래 기능적 서사를 위주로 하는 전통적 서화를 탈피한 새로운 영역의 개척이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은 고착화된 예술의 경계를 허물어 장르를 넘나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를 아울러 말하면 예술적 융합(融合)이다.

 

 

 

 

  

이처럼 과학적 내지는 미학적 견해를 들추기에 앞서 람곡 선생은 특유의 어법으로 빙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빙점의 사전적 의미는 물이 얼고 얼음이 녹는 경계점이지만,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쫄면 얼고 아니면 풀린다는 말이 있다.”

 

빙점을 다양성과 모호성 또는 경계점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일상에서 열등한 상황을 표현할 때 쫄아서 얼었다는 말과 쫄지 않으면 긴장이 풀린다는 일상의 표현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로써 본다면, 작품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작업이 쫄아서 얼었는지, 아니면 쫄지 않았는지스스로를 반추하는 독백인 셈이다. 이처럼 모호한 한자어를 일상적인 언어로 풀어내는 것은 람곡 선생만의 특유의 어법과 관련이 있다. 독특한 발상과 해학적인 비유는 사람을 친근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도 권위적인 허세를 벗어버리고 천진난만한 경지를 맛보게 한다.

 

 

 


 

 

이후에도 줄곧 지속되었던 한지천과 광목 등을 이용한 작업은 가히 선구적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수예점을 운영한 것과 관련이 있다. 지금 눈에 들어오고 손에 들려 있는 것이 곧 예술의 소재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깊숙이 배어 있다. 예술이 현실과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하여 빙점 시리즈는 생활이 곧 예술이 되었음을 보여준 전시였다.

 


 



 

2) 赤 靑 黃・・五方으로 풀다

고희를 지나, 2013(72)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24회 개인전은 <赤 靑 黃・・五方으로 풀다>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아울러 전시 도록 표지에는 짙은 필선으로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뒤 조병화 시인의 시 일부를 독백처럼 풀어놓은 <수정이 자화상>을 배치하였다. 그래서인지 회고전 같은 느낌이 든다. <자화상>에 등장하는 시의 내용은 이렇다.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이 자화상은 애써 만들고자 조탁한 작품이 아니다. 서예용 체본지 구궁지(九宮紙) 한 장에는 의식하지 않은 채 낙서하듯 얼굴을 그리고, 다른 한 장에는 마치 해변의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듯 내키는 대로 시를 서사하였다. 소품이지만 람곡 선생의 예술상이 잘 드러나 있다. 가슴에 와닿은 시를 화폭에 녹여내는 작업은 이처럼 순박하다 못해 천진난만한 모습을 띤다. 이 자화상은 여러 곳에 활용되었다.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자화상은 크게는 무던한 나의 삶이 과연 어떠했는가’, 작게는 예술가로서 살아온 삶이 또한 어떠했는가를 회고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이끌려 수없이 붓을 들고 상념을 쏟아내며 잊어버리려 했던 날들이 하루 이틀 사흘. 아련함에 뭉클해진다.

이 전시에 즈음하여 필자는 평소 선생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로>라는 제하의 평론을 작성하여 도록에 실은 적이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몇 해 전부터 빙점시리즈 초대전을 지속해왔고, 최근에는 글씨, 그림으로 보는 침장전-바람, 어디까지일까?’ 등의 부제로 서화작업의 외연을 확장하는 개인전을 펼쳐왔다. 금번에는 오방(五方)으로 풀다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부제만으로도 원색적이고 한국성이 짙게 배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한지천을 활용한 일련의 초대전과 개인전이 다소 생경할 수 있지만, 이곳 한옥마을에서는 이미 낯익은 작품으로 각인되어 있다. 몇 해 전, 선생의 개인전 때 필자의 감상평에서 소개하였듯 

선생의 예술은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선생의 곁에는 늘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항상 전시장을 찾아 예술적 담론을 일삼고, 언제나 해맑은 웃음을 짓는 소녀 같은 모습을 대할 수 있음이 인상적이다. 나는 평소 선생의 작품을 볼 때마다 동심(童心)의 세계로 이해하였다. 작품을 대하면 금세 천진난만한 소녀가 떠오른다. 바탕에 그려진 사물과 놓인 그 자리, 거기에 쓰인 글씨며 낙관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동심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어린 소녀의 소꿉장난과도 같은 천진함이 가득하다. 소동파가 말한 이른바 

천진난만이 내 스승이다(天眞爛漫是吾師)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다소 생경함과 치기(稚氣) 어린 화면에서 오히려 동화 속 풍경 같은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회고적(懷古的) 감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선생과 평소 담소를 나누어 본 이라면 아마 쉽게 이 말에 수긍이 갈 것이다.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맛깔스러운 비유와 즉흥적이며 꾸밈없는 언사에서 선생의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애써 조탁하거나 기교를 과시함이 없는 것은 그만큼 순수에 가깝다는 것을 반증하며, 그것은 논리적으로 숙후부생(熟後復生)으로 봐야 할 것이다.”

 

람곡 선생에게는 부정을 긍정으로 환원하는 힘이 있다. 세상 만물에 존재하는 양면성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변증법적 합일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화해와 상생으로 귀결된다. 선생의 생활이 곧 예술이 되는 동력이 여기에 있다. 주어진 상황을 순히 받아들여 그 자체에서 합일을 이루어내는 수시처변(隨時處變)의 권도(權道)를 지향한다. 금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방으로 풀다라는 부제에서 보듯 색()에 대한 접근이다불가에서는 현상계를 색()이라 일컫지만 선생이 표현하고자 하는 색은 한국적인 오방색이다. ()()()()()()에서 색을 선택한 것은 가장 원초적인 감각, 즉 시각적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함이리라. 한지천을 활용한 작업이 주류를 이룬다

이를 앞서 언급한 회고적 동심의 세계로 환치하면 색동옷을 입던 어린 시절을 연상시킨다.”

 

2015(74)에는 전북도립미술관에서 기획, 전시한 <전북여류작가 8인전: 모악에 품다>전이 612일부터 719일까지 열렸다. 선정된 8인은 김수자김연익김화래송영숙양화선임섭수하수경하수정이며 서양화한국화서예 등 250여 점이 전시되었다. 이때 람곡 선생은 천을 소재로 한 담채 문인화 위주로 선보였다. 원로로 접어든 시점에 전통의 구습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개성과 색깔을 관객들에게 각인시켜 준 작품이었다.

앞서 언급한 <赤 靑 黃・・五方으로 풀다>라는 회고전 성격의 전시는 해외전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2015년 전라북도 해외전시작가 지원사업 작가로 선정되었다. 이해 83일부터 810일까지 미국 뉴저지주 리버사이드갤러리(Riverside Gallery)에서 <Pitorial Smiles / Whaso(畵笑) - Creating through O-bang(五方: Oriental Five-direction) Colors>라는 주제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한자를 중심으로 하는 동양의 서화를 서양에서 전시한다는 것 자체가 한계일 수 있다. 지필묵을 통한 서사와 사의적인 문인화가 단조로울 뿐만 아니라 내용을 담은 한자나 한글 서사가 서양인에게 쉽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람곡 선생의 실험적인 작품들은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람곡 선생은 전시를 마치고 귀국하여 성과보고서를 제출하면서 미국 현지의 반응과 관람객들의 평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극히 자연스럽고 아동틱한 작품이라는 평이 많았다. 문인화는 그 자체가 단순히 그림만이 아닌 여백의 미가 극치를 이룬 격조 높은 예술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편안하지만 한국적 색감은 감히 흉내 낼 수 없다는 것과 기법을 초월하여 마음 내키는 대로 자연스럽게 구성되었다는 호평을 들었다. 그러므로 작가의 나이를 감지할 수 없다는 것과 주제와 연결 짓지 못한다는 갤러리 측의 평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작품이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우며 편하다는 말로 칭찬해 주었지만, 특히 캔버스천을 황토로 염색한 바탕에 三色竹을 구현한 작품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적 관념을 뛰어넘었다는 것

즉 파랑, 핑크, 녹색의 댓잎에서 주저함이 없는 일필휘지의 과감함이 느껴진다고 평해주셨던 것이 인상 깊었다.”

 

 

 

 

 

 

 


 


 람곡 선생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천진성(天眞性)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라 그냥 꾸밈없이 그때그때 마음에 따라 떠오르는 즉흥을 즐긴다. 물론 예술작품은 인위성을 전제하는 것이니 만약 작위성이 없다면 그것은 예술품이 아니다. 다만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 내겠다는 강박감에 스스로 구속되지 않아야 그 작위가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의 끝은 어릴 적 천진난만하게 놀던 동심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필자가 오랜 세월 람곡 선생의 작품을 대하면서 느낀 감정이다. 람곡 선생은 미국 전시를 마치고 예술가로서의 인생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다.

 

 

 

나는 1993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20161월까지 통산 개인전 34회를 기록하고 있다. 전시를 준비할 때 설렘으로 시작하고 끝날 때는 반성과 모자람 일색으로 마감한다. 마치 중독처럼 이어지는 혼자만의 기대와 설렘, 어느 곳에서 정점을 찍을지. 하지만 이 작업이 없었다면 무료하고 많은 시간 인생의 항로는 과연 어떠했을까?’라고 느낄 때 진정으로 고맙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끼면서 그간 너무 애썼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대로 가는 것을 멈추지 말라고 다짐하며, 자신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일만이 성공(?)하는 길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할 따름이다. 금번 미국 전시를 통하여 한국적인 도시 전주에 거주하는 작가로서 국내는 물론 해외에 동양예술의 근간인 서예문인화를 널리 알릴 수 있었다는 점은 매우 의미가 있었다. 국내를 벗어나 서양문화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환경적인 변화를 체감하면서 시야가 넓은 작품의 재탄생에 활력을 찾을 수 있었으며

다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는 데 주력하고 싶다.”

 

 

람곡 선생은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감성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기를 바랐다. 순간 확 탈바꿈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무젖듯 자기만의 길을 간다. 그렇다고 어떤 목표나 방향을 설정해 놓고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면서도 어쩌면 변덕스러운 마음을 잘 다스리려 한다. 그래서 선생의 작품을 처음 보는 이들은 탈속한 작품에 어리둥절할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의 인생관을 이해하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결과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예술작품을 공졸(工拙)의 잣대로만 논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전시까지 진행되어 온 34회의 개인전을 돌아보면 하나의 맥락이 있다. 지면이든 한지천이든 광목이든 캔버스천이든 그 바탕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굳이 필묵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먹과 서양화 물감이 늘 공존한다. 부득이 면을 만들기도 하지만 선으로 제어한다. 따라서 필묵을 버린 듯하지만 어딘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어릴 적 배운 말이 평생을 가듯, 서화는 물론이고 경계가 모호한 유화 같은 작품에도 젊은 시절에 연마한 서력(書力)이 내재하고 있다.

 

 

 

 

3) 개인전 50회를 넘어서서

2020(79) 12월에는 전북문화관광재단 국제문화교류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하수정김미경안홍남 3인 교류전>이 미국 뉴욕 K&P갤러리에서 열렸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들은 색한지를 이용한 콜라주 기법에 필선을 가미한 소품을 3점 선보였고, 대부분은 화선지에 수묵으로 연()을 다양하게 그린 애련설 시리즈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전과는 달리 필묵으로 회귀하여 대담한 구도로 연을 형상화하였다. 특히 이때 가장 공들인 작품은 <천주실의 서문>이다. 전통 모시를 조각조각 연결하여 3단의 대작으로 구성하였는데, 좌우 양단은 대련처럼 천주실의 서문을 붉은 전서로 서사하고, 가운데는 육중한 바위와 국화, , 대를 색으로 표현한 대작이다. 이는 오랫동안 천주교인으로 살아온 선생의 종교적 믿음을 표현한 역작이다.(도판 참조)

 

 

 


 

 

2020(79) 4, 51회 개인전이 <50+1st 화이불류(和而不流)>라는 제목으로 전주 우진문화공간에서 열렸다. 여기에 출품된 작품들은 이해 6월 갤러리1898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독특한 전시 제목은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50+1st51회 개인전이라는 의미이지만 굳이 50+1st로 표현한 것은 50회 이후 첫 번째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50회를 넘어서서 다시 처음처럼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또 화이불류는 더불어 살지만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길을 걸어왔다는 독자성을 은연중에 대변하고 있다. 팔순을 앞두고 갖는 개인전에서 남다른 감회를 스스로 귀결한 것이다.

갤러리1898의 전시에 즈음하여 큐레이터 김순아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중용』 10 장에 나오는 군자의 실행도를 일컫는 어울려 화합하되 휩싸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화이불류(和而不流)를 타이틀로 삼은 이번 전시는 시서 위주의 작품, 문인화 작품, ()와 서()가 사라진 채색화 작품, 그리고 한지 콜라주 작품 등으로 구성된다. 먹과 획의 맛을 십분 살린 채색화 작업에서는 작가의 감성적 직관이 부각된다. 감성은 외부에서 주어진 자극을 능동적 정신적으로 성찰하고 해석하여 감성적 지각이라는 고유한 경험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이 직관은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획득한 감각적인 표상으로, 시가와 문인화, 채색화 등이 자유롭게 혼합되는 고유한 작가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데 일조한다.”

 

 또 이 전시평에는 당시 람곡 선생이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한 말이 인용되어 있다.

 

나는 작업할 때 아무것도 의도하거나 계획하거나 지향하지 않는다. 무작위적인 생각과 몸짓을, 그때그때 우러나오는 느낌과 지각에 따라 스스로의 행위로 작업한다. 이는 서예를 통해 붓이 주는 획의 맛을 터득하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기운으로 작업해 왔던 문인화에서 더 전진하는 작업이다.”


최근 80세를 넘어서도 작품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다. 2022(81) 9, 전주 기린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이 열렸다. 이때 출품된 작품들은 흑백의 서예 문인화와 염색한 광목을 바탕으로 한 파스텔 톤의 담채 문인화로 양분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다양한 천이 활용되었다. 천에 표현된 담채는 온화하고 따뜻한 운취(韻趣)가 감돌지만 그 개성적 특징은 강렬하였다. 서예 작품은 상형과 특징적인 전서형을 택하였고, 문인화의 소재는 국()과 연()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 화첩의 표지를 이용함으로써 화면 분할의 효과를 노린 작품도 있었다.

올해 2024(83) 3월에는 청목미술관 초대 개인전이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는 주제로 열렸다. 전시 제목은 익숙한 노래 가사이다. 그동안 20여 년 이상 한지천과 광목 그리고 모시 등을 활용한 커튼이나 침장류 등 장르를 초월한 선구적인 작품들이 오히려 눈에 익숙해 있었다. 그로 인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서예 문인화 대형 작품이 이 전시에 다시 등장하였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는 노랫말처럼 전시장에 다시 소환된 예전의 서화 작품은 오랜 세월을 잘 버텨온 만큼 이목을 집중시키며 회자되었다.

전시장 한편에는 새롭게 시도된 키 작은 문인화 병풍이 자리하였다. 이는 지난해 중국을 다녀온 뒤 중국 공필화에서 얻은 감흥을 문인화적 기법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좁고 긴 족자 형태로 연작된 담채 문인화는 수묵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이 외에도 한지천을 활용한 대형 커튼과 콜라주 기법으로 색지를 붙여 이미지를 완성한 작품 등 종래의 실험적인 작품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 람곡 선생만의 특유의 구도와 색감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4. 전주와의 연관성

선생은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20대 초반에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2년 남짓 교사로 재직하였다. 퇴직한 이후로는 전주에서 수예점(잉꼬수예의 집, 우리집아트갤러리)을 운영하며 서화와 한학을 겸수하였다. 작가로 활동하면서 5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어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고 세상 사람들과 공유했으니 그 인생이 가히 예술이라 말할 수 있다. 2014(73) 1011,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56회 전주시민의 날에 <전주시 시민의 장 문화장> 수상하였다. 또 이해 123, 천주교 전주교구 치명자산성지 사랑문화센터에서 개최한 제1회 월요강좌 10주간(2014.9.15.~11.17.)의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리고 2015(74) 829, 신앙문화유산해설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5. 결론: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와 한국적 감성의 구현

주지하듯, 전주는 전통의 텃세가 강한 곳이다. 서예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섣부른 현대주의보다는 온축된 전통주의를 표방하며 열성(熱性)보다는 온성(溫性)을 지향한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전통서예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며, 서예문화를 지역을 대표하는 하나의 문화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전주의 서예문화를 깊이 탐구해보면 이러한 전통이 온고(溫故)나 법고(法古)의 정신으로만 유지되어 온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술가는 항상 심미(審美)와 탐미(探美)를 추구하기 때문에 감흥(感興)과 승흥(乘興)을 천금처럼 여긴다. 법고에만 머무를 경우 감흥이 감쇠하여 매너리즘에 빠져버린다. 이른바 니고(泥古)이다. ‘온고지신이나 법고창신이라는 말이 익숙하게 오르내리지만, 전통주의자는 온고와 법고를 강조하고, 현실주의자는 창신과 창의를 중시한다. 뿌리 깊은 나무는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는 용비어천가의 첫 구절을 상기하면 법고와 창신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200여 년 전 연암 박지원이 법고와 창신을 논변한 것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소위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상도(常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이다.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전아하다면, 요즈음의 글이 바로 옛글인 것이다.[法古者, 病泥跡; 刱新者, 患不經. 苟能法古而知變, 刱新而能典, 今之文, 猶古之文也.]”

 

예술가에게 최종의 목표는 창신에 있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문화는 뿌리가 아니라 꽃과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어난 서화 작품을 정화(精華)라고 한다. 예술가는 자기만의 집을 만들어 놓고 꽃을 피우는 사람이다. 따라서 깨어 있는 예술가는 전통의 묵수(墨守)보다 자기만의 창신을 선호한다. 그것이 자기만의 집을 짓는 일이다. 이른바 작가(作家)이다. 창작(創作)이 칼에 베인 상처처럼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평소 람곡 선생께 근황을 여쭈면 그냥 짓이 날 때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작품을 한다는 말씀을 듣곤 하였다. 이때 이 바로 흥()이다. 람곡 선생은 일상에서 어느 순간 문득 솟구치는 흥을 타고 즐긴다. 이 때문에 작품이 차분히 정제(整齊)되기보다는 생동감이 넘친다. 흥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특유의 붓질이 보인다. 서예의 특성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필휘지(一筆揮之) 아닌가.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즉흥성의 예술이 바로 서예다. 선생의 작품은 서예의 즉흥성이 늘 우선한다. 오랜 시간 조탁과 정제할 여유 없이 이처럼 순간의 감흥을 그대로 포착해 내는 작업이 일상이다. 그래서 람곡 선생은 천생 예술가이다. 지금껏 오로지 그 흥을 따라 작업에 몰두해 온 전업 작가이다. 짓이 나지 않으면 억지로 붓을 들지 않는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 또한 강하다.

람곡 선생이 작가로서 첫 개인전을 가진 이래 50여 회가 넘는 개인전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 왔다. ‘득어망전(得魚忘筌)’이란 말이 있듯, 수없이 법을 연마했지만 그 법에 얽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기능적 공졸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이 고루하면 작품이 진부해지듯 늘 열린 사고로 매사를 대한 결과이다. 평생을 전통적인 도시에 살았지만 오히려 생동감 넘치는 창의적인 작품을 선도해 왔다. 전통의 묵수가 아니라 늘 창신의 선봉에 있었다. 이에 람곡 선생의 예술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귀결하고자 한다.

 

첫째, 즉흥성이다.

이것은 서예적 특성인 일필휘지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의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결국에는 그 법을 파()하고 떠나야만 법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법을 떠나고 나면 일필휘지의 즉흥성만이 남는다.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리는 달밤에 흥을 타고 섬계(剡溪)의 대안도(戴安道)를 찾아갔듯, 예술가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감흥을 즉흥적으로 망설임 없이 표현하고 있다.

 

둘째, 천진성이다.

이것은 꾸밈이 없이 자연 그대로 참된 데가 있음을 말한다. 람곡 선생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는 바를 따르고 있다. 특히 작품의 구성은 천진난만한 동심(童心)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동양인은 물론이고 서양인들도 익히 공감하는 바이다.

 

셋째, 한국성이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라고 표방한 전주에서 평생을 살아온 탓일까. 람곡 선생의 작품에는 한국성이 물씬 풍긴다. 전통적인 수묵을 넘어 한지천과 천연염색 그리고 아크릴릭과 유화, 지두화와 콜라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구와 방법들이 동원되지만, 완성된 작품은 언제나 한국인의 정감을 대변하고 있다. 모시나 광목, 한지천 같은 까칠한 질감이나 오방색을 풀어놓은 담담한 색감이 묘한 아우라를 자아낸다. 이는 서예의 발묵에서 느껴지는 현()의 세계와는 다른 맛이다. 사의적(寫意的)인 전통문인화를 기반으로 하지만 그 기저에 한국성이 짙게 배어 있다는 점에서 가히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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